'기후 위기, 동물권' 필리핀 비건 문화에서 만난 같은 고민들 [당신도 어쩌면 비건일지도③-1]

우리나라에서 비건 축제 등 큰 행사는 주로 서울과 제주를 중심으로 열린다. 대표적으로 서울 비건 페스티벌은 2016년 5월에 1회가 열렸다. 비건·친환경 업체들이 한데 모이는 대형 전시회 '코리아 비건 페어'는 2020년 시작됐다. 가까이는 대구·부산에서도 비건 페스티벌이 열린다. 경남에서sms 진주에 사는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 등 다양한 이들이 소소한 행사를 열고 있다.

육식 문화가 지배적인 필리핀에서도 최근 비건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제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2016년부터 해마다 '베지페스트 필리피나스(VegFest Pilipinas)'라는 비건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필리핀 비건 문화는 우리와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우리는 축제를 운영하는 비건스 오브 마닐라(Vegans of Manila) 측에 연락했다. 운영자인 자크 아베르가스(Jaq Abergas·43) 씨는 무척 적극적이고 호의적이었다. 11월에 열리는 축제를 직접 보면 제일 좋겠지만 취재 일정상 어려웠다. 대신 자크 씨와 마닐라 시내 비건 카페와 식당을 찾아다니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필리핀 비건 공동체 '비건 오브 마닐라'를 창립한 자크 아베르가스 씨. /백솔빈 기자

자크 씨의 비건 생활 = 자크 씨는 마닐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른이 될 때까지 비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식품업계에서 일하면서 광고 문구를 쓰고 때론 글을 쓰는 일을 했다. 그런 그가 비건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건강, 둘째는 동물 해방이다. 그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 있어서 식습관을 바로 잡으려고 공부를 했다. 유제품이나 설탕을 줄이는 것을 시작하다가 식물성 식재료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러다 2013년 국제 동물권 단체 페타(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에서 제공한 동물권 보호 또는 동물 해방과 관련된 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영상 내용은 참혹했고, 자크 씨는 그 이후로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비건인이 그렇듯 일상 속에서 온갖 편견과 비난을 받아내며 지금까지 왔다. 특히 그는 공동체에서 겪는 어려움을 얘기했다. 11년 동안 겪은 일이라 이제는 괜찮다고 했지만, 힘든 시간(Hard Time)이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친구, 동료, 가족과 함께 먹는 식사를 무척 즐긴다. 푸짐한 음식과 술을 앞에 두고 북적거리며 떠들고 이야기한다. 코로나19를 거치며 한국은 회식 문화가 간소화됐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푸느라 오히려 만나는 횟수나 규모가 더 커졌다. 필리핀 사람들의 모임에서 빠질 수 없는 게 고기다. 식탁에 나온 고기를 볼 때마다 자크 씨는 페타 영상이 떠올랐다.

필리핀 일부 지역에는 전통적으로 열리는 '피에스타'가 있다. 영어로 페스타(festa), 즉 축제다. 지역 전통 축제에다 가톨릭 문화가 가미된 것으로 정해진 주간에 잔치가 열린다. 자크 씨가 사는 지역에서도 해마다 피에스타가 열렸다. 피에스타 주간에는 집집마다 통돼지구이와 술을 기본으로 준비해 친지, 친구, 지인을 초대하는 온 마을이 떠들썩해진다. 자크 씨도 피에스타 주간에는 가족과 친척이 있는 동네로 간다. 여러 집에서 음식 해온 것을 가져와 함께 나누고 먹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크 씨는 2013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음식을 나누는 기쁨을 거절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못지않게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느냐는 식의 반응을 견뎌야 하는 일도 힘들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나요?" 자크 씨는 이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질문을 되새기느라 그랬는지, 질문 자체가 불쾌했는지는 모르겠다. 자크 씨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삶, 동물로 만든 제품을 쓰지 않는 삶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페타의 영상을 본 순간, 그는 자연스럽게 고기를 즐기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리고 그는 이후의 힘든 시간을, 비건을 알리는 시간으로 바꿔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비건스 오브 마닐라(Vegans of Manila)'다.

2019년에 열린 필리핀 비건 축제 '베지페스트 필리피나스' 모습. /비건 오브 마닐라
2019년에 열린 필리핀 비건 축제 '베지페스트 필리피나스'에 소개된 비건 음식들. /비건 오브 마닐라
2019년에 열린 필리핀 비건 축제 '베지페스트 필리피나스'에 소개된 비건 음식들. /비건 오브 마닐라

정보 나눔에서 대형 축제로 = 자크 씨는 국외 여행을 갔을 때 비건 식당이나 상점을 알려주는 누리집을 참고한다. 2015년께 호주에 여행을 갔을 때였다. 시드니 비건 가이드(Sydney Vegan Guide)라는 사회관계망서비스 속 계정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고 편하게 식사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열리는 자연식품 박람회(Natural Products EXPO)에 방문했을 때 비건 제품 전시관을 보고 또 다시 자극을 얻었다. 자크 씨는 이런 것들에 영감을 얻어서 필리핀에서 비건을 할 수 있는 정보를 나누려 했다. 행사 기획에 경험이 많은 비건인 친구 티제이 혹손(TJ Jocson·43) 씨와 의기투합해 시작한 공동체가 '비건스 오브 마닐라'다. 시작할 당시에는 마닐라에 비건 식당이 한 군데밖에 없어서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8년 차인 지금은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초창기에는 어려움투성이였다. 축제를 열 장소나 스폰서를 찾기도 어려웠고, 비건 관련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할 개인이나 업체를 모집하기도 쉽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들에게 비건을 이해시키는 과정부터가 고난이었다. 어려움이 이어지자 마음 맞춰서 함께 일하던 이들이 축제 팀에서 빠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크 씨는 티제이 씨와 당시 마닐라에서 운영하던 다양한 비건 사업을 소개하고 더 많은 사람이 비건 사업을 시작하거나 제품을 만들도록 영감을 주려는 생각으로 1년 반이란 시간을 몰두했다. 그리고 2016년 제1회 '베지페스트 필리피나스'를 꽤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2017년에는 케손시티에 있는 이스트우드 시티 워크와 마닐라에 있는 럭키 차이나 타운 두 곳에서 2회 축제를 열었다. 자크 씨는 "쇼핑몰이 있고, 음식을 제공하는 너른 장소를 선택했던 게 성공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판매자 40곳이 장을 펼쳤고, 축제가 열린 이틀 간 6000여 명이 방문했다.

매년 축제를 이어가다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온라인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기후위기 관련 콘퍼런스를 열기도 했다. 올해 11월 16·17일에 열릴 축제에 판매처가 60곳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방문객은 7000명 이상 모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 필리핀에는 다른 비건 축제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코로나19 이후로는 다시 열지 못했다고 했다. 사정은 비건 식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자크 씨는 올해부터 축제 개최에는 손을 뗀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열리는 축제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중산층에게는 비건이 와닿지만, 취약계층에게는 쉽지 않다. 필리핀 전 인구가 비건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판매 업체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피(New Blood)가 들어오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을 살려 비건 식당을 운영할 생각이다. 그동안 진행한 비건 음식 관련 연구를 필리핀 아침식사에 접목하려 한다. 아직 식당 이름이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에도 열어주시라"라고 했을 때 "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2017년 열린 제2회 베지페스트 필리피나스에서 자크자 아베르가스(가운데) 씨 모습. /비건 오브 마닐라

아주 작은 것으로 시작 = 자크 씨는 "비건으로 엄청난 일을 하려고 하냐, 혁신적인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라고 답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요소를 바꾸는 것부터 비건은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가죽으로 된 가방 대신 천 가방을 들고 다니고, 찻집에서 내주는 일회용 잔 대신 보온병을 쓴다.

독일의 데이터 전문 플랫폼 스타티스타가 지난해 조사한 통계를 보면 필리핀 인구 1억 1191만 명 중 식물성식품 소비자는 3%, 약 335만 명이다. 고기에 대한 필리핀 사람들의 인식도 비건 문화가 확산하지 못하는 데 한몫한다. 자크 씨는 "정부 지원이 없기에 채소, 과일이 고기보다 비싼데도 고기를 먹어야 더 높은 계급, 지위에 있다고 여긴다"며 "육식이 일종의 '가난해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비건이 우리 삶에 이로운 이유를 설명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2030세대가 기후위기나 비건에 큰 관심이 없다고 자크 씨는 답답해한다.

하지만, 그는 비건 축제에 일반인들이 와서 식물성 제품에 관심을 두거나, <경남도민일보>처럼 비건을 주제로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이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조만간 휴가차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자크 씨는 한국에서의 비건을 즐길 생각에 눈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주성희 기자

※ 왜 하필 필리핀으로 갔느냐고요?

비건을 취재하러 필리핀에 간다고 하니, 다들 '거기 비건 문화가 활발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오히려 유럽에 잘 돼있는 곳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가보지 않았으니 쉽게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사전 조사에서 여러 자료가 눈에 띄었습니다. CCPI(Climate Change Performance Index)라는 지표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풀어내면 기후변화대응지수입니다. 전 세계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잘하는 나라를 줄 세운 것입니다. 64개국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표는 제일 잘한다고 무조건 1위를 주진 않더라고요. 1~3위는 공백입니다. 4위가 덴마크고요. 기후 위기 상황을 세계적으로 알린 그레타 툰베리가 사는 나라 스웨덴도 10위입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이 6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공백을 포함해 전체 67개 순위 중에 64위였습니다.

비건은 단순히 채식주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자, 동물권을 보호하고자 또 다른 여러 생각과 실천을 포함합니다. 또한 기후 위기와 비건을 연결 짓지 않을 수 없었고 자연스레 필리핀의 비건 문화가 궁금해졌습니다.

필리핀의 문화를 압축적으로 살펴보면요. 가톨릭교도가 다수지만,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도 있어서 국가에서는 라마단 기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인간의 힘으로 전혀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에 완전히 노출돼 있습니다. 기후 위기 때문에 자연재해인 태풍이 몰려온다는 걸 필리핀권익위원회도 인정한 바 있죠. 또 필리핀국립대학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 꾸준히 개발도상국 지원이 필요하다고 발언하고 있습니다. 국민 개개인이 기후 위기 대응 실천에 힘쓰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비건 공동체는 오래되고 또 굳건한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비건 문화가 보편적으로 확장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우리나라, 특히 경남에서는 더더욱 쉽지 않겠지요.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지난 6월, 필리핀 마닐라와 만달루용에 다녀왔습니다.

/ 주성희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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