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집 사장님에게, "최고 맛있다"고 칭찬했다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미화원 여사님에 "깨끗해서 좋아요", 버스기사님에 "운전 잘하시네요" …무대 뒤의 삶에 '피드백' 줘보니]
단골 떡볶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손엔 비타민 음료 하나를 쥐고서. 시간은 오전 11시. 점심 장사 시작 전인데도, 달큰한 떡볶이 향이 코를 찔렀다. 익숙하고 좋아하는 냄새였다.
떡볶이 가게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두근거렸다. 이 분이 누구냐 하면, 나이는 50대쯤 됐을까. 늘 빨간색 위생모를 단정히 쓰고, 카리스마 넘치는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배가 고파 조바심이 나서 냄비뚜껑을 자꾸 열려고 하면 혼이 났다. 어느샌가 다가와 "끓으면 드세요"라고 외치곤 했었다. 투박한 정(情)이었고, 만드는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물씬 느껴졌다.
그리고는 그에게 대뜸 "이거 드세요"하고 비타민 음료를 건넸다. 그러자 그가 날 바라보는 눈빛이 이랬다. '이 이상한 XX는 대체 뭐지?'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했다.
"제가 아내 덕분에 여길 처음 알았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왔다고 하더라고요. 떡볶이 좋아해서 숱한 데를 다녔는데, 여기가 최고 맛있어요. 적당히 맵고, 해물 때문에 국물은 시원하고요. 맨날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이에요. 그래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오래 장사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계산하고 나가던 손님이, 처음 건넨 얘기였다. 주방에서 가만히 듣던 사장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고, 너무 고맙다"며 주름이 깊이 패도록 환하게 웃었다. 몇 년을 다녔지만, 그리 밝은 웃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피드백(feedback)'
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그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어서.
그건 내게도 큰 힘이었다. 기사를 본 독자들 반응 말이다.
영 기운이 안 나 멍하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상사가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다니는 요가 선생님이 있는데요. 기사 정말 잘 봤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요. 마음이 똑같이 느껴졌다고요. 그러니 요가 배우러 오라고요." 생각지 못한 말 한마디에, 허리를 다시 꼿꼿이 세웠다. 그날 하루, 그 기운 덕분에 잘 보냈다.
잘 봤다고, 마음을 울렸다고, 생각하지 못한 걸 생각할 수 있었다고. 오래도록 기사를 써줬으면 싶다고, 그러니 건강 잘 챙기라는 안부도 있었다. 쓰디쓴 비판은 더 생각하게 하는 큰 힘이 됐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화려하기보단 사소하더라도, 대단한 성과를 내진 못했더라도, 그게 꽤 주목받는 일이 아닐지라도. 매일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에게, '당신은 꽤 괜찮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막연히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피드백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맘먹었다. 원칙은 두 가지로 정했다.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지난 16일부터 26일까지 약 2주 동안 진행했다.
동네 편의점 사장님에게, "여기가 있어서 참 편해요"
동네 가까운 이들에게 먼저 말해보기로 했다. 그냥 얘기하면 뻘쭘하니, 비타민 음료를 사서 나눠주며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동네 편의점에 갔다. 사장님이 있었다. 오가며 자주 들르는 곳이지만, 그와는 간단히 인사만 했었다.
비타민 음료 9개를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사장님이 동분서주하기에 "무슨 일 있냐" 물었더니, "CCTV를 보는 모니터가 꺼졌다"고 했다. 다가가 살펴보니 모니터 뒤쪽 연결선이 빠져 있었다. 꽉 꽂으니 화면이 나왔다. 다음에 또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도 알려줬다. 사장님은 무척 고마워했다. "역시 젊은 청년이라 이런 걸 잘 안다(이런 칭찬 좋음)"며
때마침 나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동네 가까운데 편의점이 생겨 참 편해요. 여름엔 지나가다 아이스크림도 사고, 급할 때 건전지도 사고, 동네 고양이들 간식 캔도 사고, 운동 끝나고 야식도 먹고요. 잘 운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은 밝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한 뒤 "얼굴을 이제야 처음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자주 와도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었으니.
동네 미화원 여사님을 처음 만났다
만나고 싶은 이가 있어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동네를 깨끗하게 청소해주시는, 미화원 여사님이었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돌아오니 만날 기회가 없었다. 매일 오가는 공간에서 그의 존재를 느낄 뿐이었다. 지저분하던 엘리베이터가 깨끗하게 청소돼 있고, 계단에 내려앉아 있던 먼지도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매일 누군가가 정성을 쏟은 덕분이었다.
돌아다니다 그를 만났다. 아파트 1층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지하로 연결돼 있었다. 거기서 미화원 여사님이 나왔다. 걸레를 물로 씻을 때 사용하는 공간이란다.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힘들 것 같았다.
여사님에게 비타민 음료를 건네자, 그는 "감사하다"고 웃으며 벌컥벌컥 마셨다. 1층부터 5층까지, 계단을 닦았단다. 미끄럼 방지 부분이 너무 많아 애를 먹었단다. 그래서 목이 많이 탄 모양이었다.
마시면서 잠시 얘길 나눴다. 그는 관리사무소 직원이 "아줌마!"라고 언성을 높였다는 얘기부터 했다. 출근 체크를 할 때, 기계가 잘 안 돼 여러 번 하고 있으니 그리 부르며 핀잔을 줬단다. 자기가 청소한다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고, 그날 밤까지 그게 생각나서 잠을 설쳤다고.
그에게도 늘 하고 싶었던 얘길 했다. 오가며 동네가 늘 깨끗해서 참 좋다고. 여사님 없었으면 얼마나 지저분했겠느냐고. 청소가 보통 일이 아니고, 꼼꼼히 잘하는 게 쉽지 않다고. 그래서 늘 감사하다고 말이다.
여사님은 비로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와 잠시 더 얘길 나눴다. 그는 헤어질 때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을 걸어줘서 참 감사하다"고.
구석의 쓰레기는 내가, 공공근로 어르신
동네 인근을 걷다, '무단투기 단속'이라 적힌 형광 초록 조끼를 입은 어르신 세 분을 봤다.
허리가 좋지 않은 듯 엉거주춤 걸으면서도, 연신 몸을 숙여 쓰레기를 주웠다. 환경미화원들이 채 줍지 못했거나, 치우고 간 뒤 또 버려진 쓰레기들이었다. 그들이 구석구석 지나간 자리는 금세 말끔해졌다. 이런 분들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너무 열심히 다녀서, 다가갈 타이밍을 잡기도 쉽지 않았다. 걸음을 멈춘 이들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허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킨 그는 자신이 '공공근로'라고 했다. 선선해진 가을 아침임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르신들 덕분에, 동네가 깨끗해져서 참 좋다"며 운을 띄웠다. 숨은 자리에서 이렇게 다니는 분들이 있는지 몰랐다고. 발견하기 힘든 쓰레기들을 말끔하게 치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비타민 음료를 건넨 덕분에, 그들은 자리에 멈춰 서서 잠시 쉬었다.
그리고 다시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기운이 훨씬 더 넘치는 것 같았다.
'길거리 홍보 전문가', 여사님에게
길을 걷는데 누군가 비닐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엔 기념품 휴지와 홍보 전단지가 담겨 있었다. 분홍색 옷에 검은 조끼, 베이지색 모자를 쓴 여사님이었다.
그는 "지금 원룸 분양하는데, 한 번 들어와서 봐요. 젊은 사람들 살기 딱 좋아"라며 내게 서글서글한 미소로 말을 건넸다. 그렇다면, 날 홀로 사는 30대 초반 정도 청년으로 보는 것인가. 이런 상상의 나래 속에서 나도 모르게 모델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재빠르게 보고 나와, 길거리에 서 있던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여사님이 어찌나 홍보를 잘하시는지, 저도 모르게 들어갔다"며 "잔뼈 굵은 홍보 전문가"라고. 여사님은 기분이 좋은지, "내가 이 동네, 저 동네 분양을 완판(완전 판매)하고 여기에 온 것"이라고 싱글벙글 웃었다.
멀리 수원에서 두 시간 넘게 걸려 왔다는 그는, "솔직히 힘들긴 힘들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 고생해, 자식 셋을 결혼까지 다 시켰다고도 했다. "그게 정말 대단한 거라고, 어렸을 땐 잘 몰랐는데 나이 들어갈수록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보인다"고 진심 어린 피드백을 했다. 여사님은 고맙다며 웃었다.
길을 건너, 그가 다시 길거리 홍보에 나선 모습을 물끄러미 봤다. 무심코 지나가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이들 속에서, '길거리 홍보 전문가'는 유독 빛났다.
앉을 때까지 기다려준, 버스 기사님
홍대에 가던 길, 자주 탑승하던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아 버스 기사님을 봤다. 한 40대 후반쯤 됐을까. 까만 선글라스에, 가운데 가르마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배려가 깊은 기사님이었다. 대부분 승객이 자리에 앉기 전에 휙 출발해 몸이 휘청거리는데, 이 분은 달랐다. 승객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착석한 뒤에야 비로소 출발했다. 여유롭고 안전했다. 버스를 타는 내내 맘이 편안해졌다.
신호가 걸릴 때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기사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기사님, 제가 운전하시는 걸 지켜봤는데 승객들이 다 앉기 전까진 출발하지 않으시더라고요. 배려가 깊으신 것 같아요. 운전도 능숙하게 잘하시고요. 덕분에 불안하지 않게,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잘 타고 왔습니다."
기사님은 "아이고,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칭찬받는 건 처음이라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며 몸둘 바를 몰랐다.
홍대에 하차하면서 "감사합니다!"하고 크게 외쳤다. 그는 "안녕히 가세요"하고 다시 인사를 했다. 룸미러에 언뜻 비친, 그의 표정이 환해서 좋았다.
'똘이' 미용해주는 실장님에게
반려견 똘이(5살, 몰티즈)는 소심해서, 털을 깎고 나면 일주일씩 풀이 죽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정성껏 깎아줬는데 어김없이 '개+새(몸은 민둥산으로 만들고, 머리는 사자처럼 남는 컷, 욕 아님 주의)'가 됐다. 그럼 똘이는 어둠의 자식처럼 구석으로 가서,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날 원망스레 바라봤다.
그래서 털을 깎는 걸 눈으로 볼 수 있는, 반려견 미용실을 찾았다. 유리로 돼 있어서 미용하는 똘이를 볼 수 있었다. 똘이는 몸을 떨면서도, 가끔씩 형과 누나가 있는 걸 확인하면서 버텼다. 그래서 다닌지 벌써 1년 정도 됐다.
똘이 털을 깎아주는 실장님이 있는데, 미용을 차분하게 잘했다. 몸을 자꾸 움직이고, 들썩이고, 앞발을 숨기고, 말을 안 듣는 똘이라, 쉽지 않은 걸 잘 알고 있다. 그럴 때 "에헤이, 옳지, 잘했어, 다 끝나가네"하고 달래가며 미용을 해줬다. 솜씨도 좋아서, 똘이도 무척 맘에 들어했다(사실 안 물어봄).
이 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직접 연락이 닿지 않아 다른 직원을 통해 전달했다. 똘이 미용을 잘해준 덕분에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다고, 감사하다고.
점심시간에, 텅 빈 '동네 밥집'에서
늘 좋은 피드백만 준 건 아녔다. 때론 솔직함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동네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하나가 있었다. 생긴 지 2년쯤 됐는데, 한 번도 안 가봤었다. 그런데 오가며 보면, 장사가 그리 잘되진 않는 것 같았다. '아마 이유가 있겠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가볼 생각을 못 했다.
그 가게에 처음 들어가 봤다. 정오라 점심시간이지만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7개 정도 되는 테이블이 무색했다. 배달 주문만 2건 정도 있는 것 같았다. 안경을 쓴 사장님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토마토 파스타 하나를 시켰다. 가격은 8000원이었다.
토마토 파스타는 기대했던 것보다 소스가 묽었다. 빵은 따끈하고 부드러웠지만, 파스타와 썩 어울리는 맛은 아녔다. 다만 소스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깊은 맛이었다. 입안에서 여운이 남는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이걸 사장님에게 얘기했다. 그러면서 "혹시 점심에 동네서 먹기엔 가격 부담이 있는데, 점심 메뉴로 가격을 좀 낮출 순 없느냐"고 제안했다. 메뉴는 파스타가 가장 저렴한 편이었고, 스테이크 파스타나 리조또 등은 1만4000원 정도 했다. 편히 오기엔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사장님은 "그래도 남는 게 있어야 해서요"하며 말끝을 흐렸다. 토마토 소스도 아이 엄마들이 얘기해 묽게 바꾼 거라고. 그러면서도 "손님들이 맛에 대한 얘길 잘 안 해주는데, 알려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그래서 "우리 동네 유일한 파스타집이니, 꼭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오면서 보니 가게 안에 로봇 프라모델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그 역시 가족들에겐 영웅이겠지', 생각하며 장사가 잘 되길 속으로 응원했다.
관객이 없는 '버스킹'을 들었다
낮에 홍대 번화가를 지나다, 버스킹을 하는 한 청년을 봤다(나이 짐작 불가).
검은 모자를 쓰고, 노란색 피카츄 옷을 입고 열창을 했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부르다가, 뜬금없이 왬(Wham)의 라스트 크리스마스(Last christmas)를 열창했다. 잘 부르는 노래는 솔직히 아녔지만, 개성은 있었다. 알 수 없는 춤과 몸짓이었지만, 뭔가 생동감이 넘쳤다. 노래와 어울리지 않는 과한 몸짓이 중독성 있었다. 참으로 열심이었다.
하지만 발길을 멈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앞쪽은 민망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 유일한 관객이 됐다. 나도 모르게 종종 웃음이 터지곤 했다. 노래가 끝나고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그는 '땡큐 붸리 머치(감사합니다)'라고 영어 발음을 굴리며 화답했다.
공연을 재밌게 잘 봤다고 얘기해주려 했는데, 도저히 짬이 안 났다. 그는 노래가 끊길세라 다음 노래를 연달아 틀고, 목청껏 부르고, 땀에 흠뻑 젖도록 춤을 췄다. 동전만 있는 버스킹 모금통 앞엔 노란색 피카츄 인형이 웃고 있었다.
30분 정도 지켜보다가, 그와 잘 어울리는 노란색 비타민C 한 통을 슬며시 놓고 나왔다. 그리고 그를 보고 웃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역시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담배만 태우던, 연남동 카페 사장님
쉬는 날이었다. 연남동엔 늘 사람이 많아서, '조용한 카페'를 찾고 있었다.
골목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니 인적이 끊겼다. 그 때 카페 하나가 나왔다. 유리문을 활짝 열어젖혀 안까지 확 트여 있었다. 시원시원해서 가을 정취를 느끼기 좋았다. 마당엔 초록 화분이 세워져 있고, 들어가는 길목엔 느낌 좋은 초상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내부엔 나무색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흡사 편안한 가정집 같은 느낌이었다.
바깥에서 담배를 태우던 남자 사장님은, 날 보고 "어서오세요"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40대 후반쯤 됐을까, 부리부리하게 잘 생긴 눈에 깔끔한 인상이었다. 그는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와 주문을 받았다. 그를 따라 걸으며 카페를 천천히 둘러봤다.
앉을 자리는 많았지만, 채운 이는 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텅 빈 카페에 홀로 앉았다. 커피 내리는 향에 오랜만에 맘을 비우고 여유를 가졌다. 내겐 편안한 이 고요한 정적이, 누군가에겐 두렵고 힘든 시간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짐작이 충분히 갔다.
사장님의 말벗이 돼 주기로 했다. "장사가 잘 되느냐"는 말로 물꼬를 텄다. 그는 한숨부터 내쉬며 "잘 안 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의 삶 얘길 했다. 30대 초반에 부갑상선이 문제가 생겨 칼슘 조절이 안 됐고, 뼈가 약해지고 어지러워 많이 아팠고, 맥주 회사 영업을 하다 결국 그만뒀다고. 5년간 누워 있으며 아파트 한 채 값의 절반 정도는 병원비로 날렸단다.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일했고, 카페를 한 지 3년쯤 됐단다. 삶은 여전히 순탄치 않은 듯했다. 적자란다. 대관 업무로 수익을 내려 노력 중이다. 조금만 더 해보고 안 되면 다른 일을 하겠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맛이 깊었다. 샷을 두 번 내려줬고, 신맛과 쓴맛도 선택할 수 있었다. "좋은 원두 같다"고 하자, 바리스타인 신부님에게 가져온단다. 사실 다른 원두보다 비싼데, 수익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 해서 그냥 가져온다고 했다.
커피가 담긴 유리컵엔 꽃 두 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다. 그의 인생도 앞으로 꽃 같기를. "분위기도 너무 좋고 커피도 맛있다"며 "입소문을 많이 내겠다"고 했다. 그가 "정말 감사하다"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연트럴파크'가 예쁜 이유를 알았다
그리고 나와 연남동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푸른 나무에 곳곳엔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잔디는 머리를 깎은 듯 단정했고, 길섶엔 이름 모를 꽃들이 한 움큼 피었다.
'연트럴 파크'라 불리는 이곳은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핫하다. 저녁엔 많은 이들이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맥주를 마시곤 한다.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친구들끼리 깔깔거리고, 강아지가 활짝 웃은 채 헥헥 거리며 산책한다.
왁자지껄한 이들 사이에서, 묵묵히 일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조경관리'란 조끼를 입은 걸 보고, 누군지 짐작했다. 그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묵직한 호스를 어깨에 이고 있었다. 한 명은 그걸 들고, 다른 한 명은 잔디에 그걸 흩뿌렸다. 그렇게 물을 주고, 나뭇가지를 치고, 화단에 가서 꽃들을 돌봤다.
그중 한 명에게 다가가 비타민 음료를 건넸다. 그러면서 "여기 공원을 참 좋아하는데, 괜히 잔디와 꽃이 예쁜 게 아니었네요. 산책할 때마다 힐링이에요. 이리 살뜰하게 잘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얘기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들은 조경관리 직원은 "감사하다"며 환히 웃었다. 그러면서 "여기 꽃들도 한 달에 한 번은 바꿔서 심어줘야 해요. 저희가 다 심었어요. 잔디도 자라면 제때 깎아줘야 하고요"하며 자랑스레 자기가 하는 일을 더 얘기해줬다.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그냥 지나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범한 광화문 직장인에게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한 중년 직장인을 봤다. 50대 초반쯤 됐을까. 안경을 쓰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는 의자에 앉아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비타민 음료를 건넸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이거 왜 주느냐"고 반문했다. 넉살 좋게 "오늘 하루 고생한 직장인들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그랬더니 "그게 뭐냐"면서도 "이런 건 처음 받아본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잠시 얘길 나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란다. 직급은 부장이고, 정신없이 출근과 퇴근을 하고, 돈을 벌고, 애를 키우다 보니 벌써 다닌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고. "저도 10년이 다 돼 가는데, 그 마음 이해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소주 한 잔을 하며 나눌법한 얘기였다.
"뭐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그에게, "그냥 그 하루하루를 산 게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일이 맘처럼 안 풀리기도 하고, 승진에 가슴 졸이고, 상사 쓴소리에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 않았냐고. 그걸 그 오랜 시간 견딘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고 했다.
구두는 낡았고, 시계 줄은 허름하고, 정장은 커졌으면서 배는 여전히 나왔을지라도, 그 모습이 멋진 거라고. 차마 쑥스러워 그런 얘긴 못했지만, 속으론 그리 응원했다.
무대 뒤에서, 조명받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피드백 프로젝트'가 모두 끝났다.
어찌 보면 참 소소한 응원이었다. 말 한마디에 비타민 음료 하나 정도. 표현하는 게 쑥스러워서 좀 머뭇거리기도 했다. 마음은 늘 있었으나, 입 밖으로 그렇게 말하고 다닌 건 첨이었다. 처음엔 낯이 간지러웠다, 많이. 후다닥 얘기하고 돌아서기도 하고, 다가가 엉뚱한 얘기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스쳐 지나간 이들이라서, 말이 잘 안 나왔다. 그만큼 침묵하고 지냈었다.
무대 뒤의 삶이었다.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동네 붕어빵 할머니였고, 주유소 직원이었고, 애를 데리고 가는 주부였고, 막 창업한 스타트업 직원이었고, 헐레벌떡 도착한 음식 배달원이었고, 묵직한 가방을 메고 독서실에 다녀오는 중학생이었고, 음반을 내도 댓글 하나 없는, 무명 가수였다.
그래서 얘기해주고 싶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니 좋았다. 환히 웃는 얼굴을 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더 큰 힘을 얻었다. 처음엔 쭈뼛거리다 갈수록 구체적인 얘길 해줬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그 삶이, 사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게 좋았고 또 어떤 게 아쉬운지 말이다.
그들도 좋았다고 했다. 아무도 몰라주는 일을 누군가 알아줘서, 사소하다 여겼던 일을 칭찬해줘서, 반복되는 삶에 때론 지루할 때도 있었는데 가치가 있다고 해줘서. 그래서 고맙다고 했다. 한 고객센터 상담사에겐 "상담사님 덕분에 그 회사 이미지가 좋아졌다"며 "거기 사장님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런 얘긴 처음 들었다"며 "보람을 느낀다"고 웃었다.
아직 말 못 한 이들이 많다. 마동석이 나오는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어떨까. 그의 통쾌한 주먹도 좋지만, 그걸 맞고 나가떨어지는 수많은 이들을 봐주면 어떨지. 그들에게 "당신이 정말 실감나게 맞고 날아가고 쓰러진 덕분에, 영화가 살았다. 연기 정말 잘 봤다"고 말이다. 방송으로 치면 화면에 나오는 이들도, 주목받는 PD도 아닌, 온갖 섭외며 자료조사며 구성이며, 잡일까지 다 하는 방송작가들 말이다.
지쳐 쓰러지려 할 때, 누군가 봐준단 것만으로 또 다른 하루를 살 게 될 거라고. 힘겨운 가운데 꿈을 지탱하는 힘이 될 거란 믿음으로.
에필로그(epilogue).
집안에 놓인 조명 하나가 불이 나갔다. 이사할 때 큰맘 먹고 샀던, 값비싼 조명이었다. 인테리어용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나무 식탁 위에 고이 설치해뒀다.
부리나케 전구를 사와서 조명에 끼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0만원짜리 조명도, 1000원짜리 전구 하나가 없으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공간을 환히 빛내는 건 전구라고.
혹여나 1000원짜리 전구처럼 느껴져 힘들더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기를. 나도 중요한 존재니까. 괜찮은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