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구폭발의 시작, 구룡성채 탄생 배경
홍콩 구룡반도의 0.03㎢, 서울 잠실종합운장 절반도 안 되는 공간이지만 한때 5만 명이 모여 살았던 '구룡성채'는 인류 문명사의 극한실험 그 자체였다. 그 뿌리는 원래 송나라 시절 해적·외세 방어를 위해 지어진 군사 요새였다. 19세기 말 아편전쟁 이후 홍콩 대부분은 영국령이 됐으나 이 성채만큼은 예외적으로 중국(청 나라) 관할로 남으며, 이후 누구의 완전한 지배도 받지 않는 치외법권의 회색지대로 남았다. 당연히 법과 행정력의 공백지대가 되면서, 사회 불안·정치적 격변 시기마다 난민, 빈민, 범죄자들이 밀려들어 이곳을 집단 거주지로 삼았다.

기록을 뛰어넘는 초고밀도 주거지
구룡성채는 세계기록을 가진, 1㎢당 180만 명을 초과하는 인구밀도로 악명 높았다. 이는 당시 뉴욕 약 11,300명/㎢, 마닐라 약 42,000명/㎢의 수십 배였으며, 실제로 '지구상 그 어떤 도시도 실현하지 못한 초고밀도'의 인간 거주지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성채 내에는 공식 건축감리나 설계 없이 원래 2~3층 주택 위에 또다시 갖다 얹는 방식으로 건물이 쌓이고 연결되며, 결과적으로 15~16층 높이의 미로형 복합 건축군이 형성됐다. 인구와 건물들은 더 이상 수평적으로 확장할 수 없어 수직적으로 밀집했고, 햇빛과 환기는 자연적으로 차단된 극악의 환경이 만들어졌다.

환경·생활·위생의 붕괴와 생존
빛도 바람도 막힌 성채 안 일상은 환경·위생·안전 모두가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수도와 전기 다수가 불법 연결되고, 하수처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오물이 넘쳤다. 여름이면 악취, 곰팡이, 해충이 들끓었다. 건물 곳곳에 무허가 병원, 자가공장, 식당, 불법치과, 탁아소 등이 들어섰고, 불법 전선·배관이 거미줄처럼 얽혀 화재나 감전사고가 빈발했다. 계단과 복도가 매우 복잡하여 실제 화재가 나면 탈출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출구 자체가 봉쇄된 경우도 허다했다.

법의 사각지대, 범죄와 삼합회의 도시
구룡성채는 치안도, 행정도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19세기 후반 영국과 청나라의 주권 분쟁과 무관심, 중·영·홍콩 당국 모두가 관리책임을 회피하면서 실제 통치는 중국계 범죄조직 삼합회가 장악했다. 자연스레 마약, 매춘, 도박, 암살, 밀수 등 다양한 범죄가 성행했다. 무자격 의사·치과의사와 불법 의료, 아편굴, 밀수공장, 도박장 등이 성채의 일부가 되었으며, 경찰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암흑가의 본산’으로 악명을 떨쳤다.

기적처럼 남은 공동체와 우체부의 전설
그러나 이런 혼돈 속에서도 구룡성채 안에선 독특한 공동체가 꽃피었다. 주민 대부분은 범죄자라기보다 생존을 택한 평범한 이민자, 노동자, 가족들이었다. 그들 덕분에 내부적으로 수도망, 간이전기망, 경제체계까지 스스로 구축했다. 놀랍게도 '우체부'까지 존재했는데, 번지와 도로명이 없는 미로에서 한 사람이 임의의 주소 체계를 만들어 골목골목을 누비며 우편을 배달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전설로 남아있다. 유치원, 학교, 시장, 미용실, 반찬가게 등 인간 공동체의 기본이 유지됐다.

사라진 전설, 도시 문명에 남긴 경고
폭발적인 인구와 범죄, 비위생적 상황이 극에 달하면서 1980년대 중·영 양국은 성채 철거를 결정했고, 1993~1994년에 3만여 주민들에게 보상을 지급하고 성채를 철거했다. 현재 그 터에는 구룡성채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생존력과 공동체성은 지금도 전세계 학자, 건축가, 예술가의 연구대상이다. 구룡성채는 현대 문명이 공간, 질서, 공존을 망각할 때 어떤 미래가 도래하는지를 보여준 경고장이다. 동시에, 극한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인간 공동체의 의지와 창조성 또한 반면교사로 남아 있다.
이 글은 구룡성채의 역사적 의의, 초고밀도 인구 현상, 극단적인 삶과 생존, 도시 환경의 붕괴, 범죄와 공동체성, 철거와 기억 등 연관된 주제를 하나로 묶어 현대 도시문명을 되돌아보는 메시지로 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