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텐에 담는다고?” 항의가 빗발쳤다…전통의 재해석으로 왕좌에 올랐다는 ‘이것’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10. 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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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왕(the king of the wines) 또는 왕들의 와인(the wine of kings)이라고 불리는 와인이 있습니다. ‘네가 마신 최고의 와인을 꼽으라’고 하면 와인 애호가들이 반드시 거론하는 와인, 바롤로(Barolo) 입니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역 바롤로라는 마을에서 재배한 네비올로 품종 포도로, 법에 정해진 방식을 따라 양조하는 와인을 바롤로라고 합니다. 불리는 별명(와인의 왕)에 걸맞게 이탈리아 최고의 레드 와인으로 꼽히죠.

보르도나 부르고뉴처럼 품종이나 브랜드 스토리가 수백년씩 이어지는 와인에 비하면 바롤로의 역사는 짧은 편입니다. 오랜 기간 지독한 전통 방식을 고집해온 특유의 자부심(또는 자존심) 때문에, 불과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와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1980년대 몇 가지 획기적인 변화가 바롤로를 와인의 왕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오늘 와인프릭은 바롤로 이야기의 심화 버전, 클래식과 모던 바롤로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기본적인 바롤로 이야기는 와인프릭 <<a href="https://www.mk.co.kr/news/business/10816578" class="ix-editor-text-link" target="_blank">“너의 인내심을 보상하리라” 왕의 DNA를 가진 와인>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바롤로 주요 마을 중 하나인 라 모라(La Morra) 마을의 풍경.
바롤로 보이즈
계속 언급했듯 현대 바롤로는 ‘와인의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바롤로는 이탈리아의 평균적인 와인으로 취급받지도 못했습니다. 자연스레 네비올로 포도에 대해 아는 사람 역시 거의 없었죠.

이랬던 바롤로가 1980년대에 들어 이른바 바롤로 보이즈(Barolo boys)가 등장하면서 바뀌기 시작합니다. 엘리오 알타레(Elio Altare), 루카 쿠란도(Luca Currado), 파올로 스카비노(Paolo Scavino), 마르코 디 그라치아(Marco de Grazia) 등으로 알려진 이들이죠.

이들은 부모로부터 당시만 하더라도 별 볼일 없던 바롤로 마을 일대의 포도밭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보티(Botti)라 불리는 큰 오크통에 10년 이상씩 와인을 숙성하는 전통 방식을 고수하던 부모 세대와 달리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던 보르도 방식을 도입합니다.

작은 프랑스산 오크 배럴(바리크)을 사용한 것인데, 이는 와인을 보다 빠르게 숙성하고, 와인의 과일 향이 강조되고 타닌이 부드러워지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비로소 현대의 소비 스타일에 맞는 와인이 양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스테인레스통 발효조 등을 동원한 온도조절 발효 등 현대적인 기술도 도입합니다. 와인의 신선도와 과일 맛의 극대화를 통해 전통적인 바롤로보다 더 접근하기 쉬운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이죠.

바롤로 보이즈 공개 당시 홍보 이미지.
클래식 vs. 모던
바롤로 보이즈는 이러한 혁신들을 통해 바롤로 와인을 국제 와인 시장에서 성공시켰습니다만, 정작 바롤로 산지에서는 엄청난 논란에 휩싸입니다.

바로 전통 방식을 고수해오던 생산자들의 반발입니다. 당장 바롤로 전통주의자들은 이들의 방식이 바롤로의 고유한 특성과 오랜 역사를 훼손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모던 스타일 양조 초기 대부분 클래식 스타일 바롤로 양조자들은 모던 스타일로 양조된 바롤로에게 ‘바롤로’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도 주장하죠.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모든 손해를 감수해가며 바롤로의 전통 방식을 고집해왔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현재는 클래식 스타일과 전통 스타일 모두 ‘바롤로’라는 이름을 붙이고 생산·판매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접근 방식이 점점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공존하게 된 것입니다.

클래식 바롤로는 오랜 시간 대형 오크 배럴에서 숙성했기 때문에 복잡한 향과 강한 타닌, 오랜 숙성 잠재력을 지닌 와인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하지만 제대로 풍미를 발현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아울러 와인을 충분히 경험하고 탐구하는 전문가나 경험자 레벨에서는 훌륭하다고 느끼더라도, 와인을 가볍게 접하고 싶은 최근의 소비자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반면 모던 바롤로는 작은 오크 배럴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숙성합니다. 덕분에 과일 향이 강조되고 부드러운 탄닌을 지닌 와인이 됩니다. 향은 물론 입에서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전통 방식의 바롤로에 비해 비교적 단조롭고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바롤로 와인 역사는 2014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바롤로 보이즈: 이탈리아 와인의 이야기(Barolo Boys: The Story of a Revolution)에서 더 자세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롤로 포도밭 풍경.
극단적인 세분화…떼루아만 181개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바롤로 밭의 구분 입니다. 바롤로는 그리 크지 않은 마을입니다. 포도밭 면적은 약 2000헥타르(㏊) 정도인데, 프랑스 보르도(12만㏊)나 부르고뉴(3만㏊)는 물론 미국 내파 밸리(1만8000㏊)보다도 작은 면적이죠.

그런데 그 안에서 포도밭을 떼루아에 따라 181개로 세분화했습니다. 프랑스의 클리마(Climat) 혹은 크뤼(Cru) 개념과 유사한데요. 이를 현지에서는 MGA(Menzione Geografica Aggiuntiva)라고 부릅니다.

이는 현대 와인 세계에서 성공 공식으로 간주된 부르고뉴의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부르고뉴는 지방을 지역 단위로, 지역을 마을 단위로, 마을을 밭 단위로 쪼개고 또 쪼개는 세분화를 통해 포도밭의 차별성을 강조했습니다. 바롤로 역시 이를 벤치마킹해 프리미엄화를 통한 가치의 비약적인 상승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위대한 첫발을 뗀 사람이 바로 체레토(Cereto) 와이너리의 브루노(Bruno)와 마르첼로(Marcello) 형제였습니다. 체레토 와이너리는 리카르도(Riccardo) 체레토에 의해 1937년 설립됐습니다.

브루노와 마르첼로는 리카르도의 아들이죠. 이들은 와이너리를 물려받기 전 젊은 나이에 부르고뉴를 여행하면서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의 노력은 바롤로가 1980년 7월 이탈리아 대통령령으로 DOCG(지리적 원산지 표시)로 승인되면서 인정 받았습니다. 이들의 혁신을 인정해 1986년 저명한 미국 와인 잡지인 ‘The Wine Spectator’는 두 형제의 사진을 표지에 실으며 바롤로 형제(Barolo Brothers)라고 명명하기에 이릅니다.

현재 체레토 와이너리는 1999년 브루노와 마르첼로의 자식들이 합류하면서 3세 경영 체제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난 2010년 떼루아의 순수하고도 탁월한 표현을 위해 소유한 모든 포도밭(약 160㏊)을 유기농 재배로 전환하는 등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바롤로 MGA 맵.
클래식과 모던의 융합
한편 200년 이후 바롤로는 또 다른 변화를 맞이 합니다. 클래식도, 모던도 아닌 오묘한 스타일의 바롤로가 생산되면서 입니다. 두 스타일 모두 나름대로 캐릭터와 인기를 얻고 있으니, 두 스타일의 장점만을 잘 버무려 낸 셈인데요.

대표적인 게 현재 다비데 로쏘(Davide Rosso)가 이끌고 있는 지오반니 로쏘(Giovanni Rosso) 와이너리 입니다. 다비데 로쏘는 창업자인 지오반니 로쏘의 4대손이죠.

지오반니 로쏘는 바롤로 내에서도 최고의 떼루아로 인정받는 세라룽가 달바(Serralunga d’Alba)에서 1890년대부터 주요 이탈리아 양조자들에게 포도를 공급해온 카날레(Canale) 가문의 사위였습니다.

포도 공급만을 해오던 카날레 가문은 지오반니 로쏘를 사위로 들인 이후 직접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뛰어난 양조자였던 그의 실력과, 완벽한 가문의 포도밭이 합쳐진 와인은 곧 애호가들의 입소문을 타게 됩니다.

급기야 최근에는 ‘완벽한 떼루아의 분신’, ‘럭셔리, 우아한 스타일과 클래스의 결정제’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데요. 이러한 영향에는 4대손인 다비데 로쏘의 활약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비데 로쏘는 현재 자타공인 최고의 생산지로 꼽히는 부르고뉴에서 양조학을 공부했습니다. 20대던 2001년 와이너리를 이어받아 모든 포도밭을 유기농으로 재배하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우아한 부르고뉴 스타일의 고품질 와인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세라룽가 달바(오른쪽)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의 모습.
재밌는 것은, 기존에 사용하던 작은 오크통(바리끄) 대신 큰 오크통을 쓰되, 전통적으로 바롤로 지역에서 사용하던 슬라보니안(슬로베니안과는 다릅니다) 오크가 아닌 프렌치 오크를 사용해 양조한다는 점 입니다. 여기엔 부르고뉴에서 양조를 공부한 다비데의 경험이 담겨있습니다.

다비데는 “네비올로 품종 자체가 민감하고 섬세하다”며 “산화가 천천히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빅배럴만 사용한다”고 강조합니다. 프렌치 오크를 고집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격에서는 차이가 없고, 오로지 오크의 성질 때문”이라며 “프렌치 오크가 좀 더 중성적(Neutral)이고, 부드럽기 때문에 네비올로와 잘 맞는다”고 말합니다.

클래식 바롤로가 그러하듯 큰 오크통을 쓰되,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오크통 대신 새로운 성질의 오크통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단순하게 보면 클래식과 모던 스타일이 적절히 섞인 셈입니다.

다비데는 최근 바롤로 와인의 추세와 관련해서도 “클래식 스타일과 모던 스타일이 얽히면서 혁명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한계가 정해진 인간의 수명과 달리, 무한한 떼루아를 어떻게 지키고 보존해 나갈 것인가가 앞으로 바롤로 와이너리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지난 7월 한국을 방문한 지오반니 로쏘의 4대손, 다비데 로쏘.
가을 밤을 즐기는 탁월한 선택, 바롤로
와인의 왕으로 불린 바롤로는 와인 이름 자체는 오래됐지만, 현대 스타일을 갖춘 지금의 모습은 19세기 무렵에야 완성됐습니다. 부르고뉴의 방식을 따라 MGA를 만든 후 크게 성공했고, 이제는 전통과 현대를 혼합해 새 스타일을 창조하는 단계에 들어선 상황이죠.

변화를 통해 성장하고, 수많은 애호가들의 마음을 훔친 바롤로가 시도하고 있는 또 다른 변화를 눈여겨보는 것도 재밌는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입니다.

무엇보다 바롤로는 이제 막 여름을 지나 기분 좋은 서늘함이 느껴지는 가을 밤과 잘 어울리는 와인 입니다. 한 모금 털어넣었을 때 느껴지는 강한 타닌과 산도, 묵직하고 풍성한 구조감은 버섯 구이나 리조또, 구운 고기 등과 완벽한 조화를 보입니다.

체리, 자두와 같은 붉은 과일 향과 말린 장미, 가죽, 타르, 스파이스 등 깊고 복합적인 향은 서늘하고 쌀쌀한 느낌에도 따뜻하고 풍부한 느낌을 제공해주죠. 깊어가는 가을 밤, 바롤로와 함께하는 낭만적인 여유를 즐겨보시길 기대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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