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대학가요제 대상 정오차의 '바윗돌'
"5.18때 친구의 묘비"..금지곡 당해
김원중의 바위섬도 '고립된 광주' 은유
작사자 미상인 '오월의 노래'
이선희, 나훈아 등도 5.18 추모곡
올해 5월 18일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44주년이 되는 날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한때 신군부나 언론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광주폭동’ 등으로 지칭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주로 ‘광주민중항쟁’, ‘광주시민항쟁’, ‘광주항쟁’, ‘광주의거’, ‘5·18의거’ 등으로 불린다. 5·18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면서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택시운전사, 화려한 휴가, 아들의 이름으로, 김군, 꽃잎, 오래된 정원, 26년, 스카우트 등의 영화들이 5·18을 담았다. 그러나 5·18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는 그리 많지 않다.

"친구의 묘비"... 방송 금지된 '바윗돌'
1981년 MBC 창사 20주년 기념으로 성대하게 열렸던 제5회 대학가요제. 당시 한양대 경영학과 1학년 정오차는 자신이 작곡·작사한 ‘바윗돌’로 당당히 대상을 수상했다. 광주 출신인 그는 광주일고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복학생이었다.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 눈 맞으며 아픈 맘 달래는 바윗돌
세상만사 야속 타고 주저앉아 있을소냐
어이 타고 이내 청춘 세월속에 묻힐소냐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한 맺힌 내 가슴 부서지고 부서져도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저 하늘 끝에서 만 세상 웃어보자
정오차의 '바위돌'
뭔가 답답하고 우울했던 젊은 세대의 마음을 대변하듯 시원하고 파워풀한 가창력이 압권이었던 그의 노래는 꽉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 청량제 같았다. 하지만 이 노래는 대학가요제 사상 최초로 시대적 상황 때문에 금지곡이 된 불행한 노래로 기록되어 있다.
정오차가 부른 ‘바윗돌’은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후 한 달 정도 방송에 줄기차게 나오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 후 한 순간에 사라진 방송 금지곡이다. 당시 진행을 맡았던 아나운서가 ‘바윗돌’이란 노래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냐고 묻자 정오차는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이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엄혹했던 시절, 방송이 나간 후 정보기관과 방송국에서 난리가 났다. 다음날 이 노래는 ‘불온사상 내포’란 이유로 곧바로 방송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시대의 아픔을 은유적 가사와 우렁찬 창법으로 노래했던 ‘바윗돌’은 대중들에게 잊혀져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KB국민은행에 입사해 지점장을 지내는 등 금융인으로 변신한 정오차는 직장행사 등에서 노래를 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는 몇년 전 은행을 퇴직한 후에도 가끔 무대에 오르며 음악의 꿈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5·18 광주처럼 고립된 섬 ‘바위섬’
‘5·18’을 노래한 가요는 ‘바윗돌’ 말고도 또 있다. 바로 김원중이 부른 ‘바위섬’이다. 1980년 5월 18일 당시 김원중은 전남대 2학년이었다. ‘운동권’은 아니었다. 공부보다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게 좋았다. 그의 말대로 ‘속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김원중이 5·18 현장에 있었다. 그는 “그 상황을 눈으로 봤다면 누구나 동조했을 것이다”고 말한다.
김원중은 지역 선후배들과 만든 그룹사운드 ‘로터스’에서 활동했다. 5·18이 지나고 군을 제대한 그는 복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날 함께 어울리던 조선대생 배창희가 ‘바위섬’이라는 노래를 들고 왔다. 배창희는 전남 고흥 소록도에 갔다가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고립된 섬의 모습이 마치 5·18 당시 광주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 당시 계엄군은 외부로부터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키는 작전을 폈다. 광주에서 나갈 수도, 광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김원중은 이 음반에 막내로 참가해 ‘바위섬’을 불렀다.
김원중도 배창희의 말에 공감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만 해도 서울이 아니면 음반을 만들기 어려웠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음반에 관한 모든 것은 서울로 통했다. 김원중과 그의 동료들은 광주에서 음반을 만들기로 했다. ‘왜 지방에서는 음반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1984년 김원중을 비롯해 광주에서 ‘노래 좀 한다’는 이들이 모여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음반을 냈다. LP판 표지까지 자신들의 손으로 그렸다. 지역에서 만든 최초의 음반이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김원중의 바위섬
그는 처음부터 가수가 되려고 한 건 아니다. 대학가요제 무대에 오른 적도 없다. 그저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끼리 모여 우리 힘으로 음반 한번 내보자는 거였다. 일종의 기념음반이다. 그런데 ‘바위섬’은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졌다. 김원중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며 방송에 출연하는 등 ‘대학생 스타 가수’가 됐다.
김원중은 방송에서 ‘바위섬’이 ‘5·18 광주’를 의미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방송에서 처음부터 내놓고 바위섬의 의미를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방송에 나갈 때마다 ‘나는 광주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대신 김원중은 방송이 아닌 개인 공연 무대에서 ‘바위섬’의 의미를 소개했다.
박인희 '사랑의 추억'과 '오월의 노래'
‘오월의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5·18을 대표하는 운동가요 중 하나다. 심지어 해태 타이거즈의 야구경기 중에 불린 적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노랫말은 은유적이지 않고 직선적이다. 마치 사진기로 현장을 촬영하듯 1980년 '오월 광주'의 참상을 그대로 묘사한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 개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의 노래'
그런데 4절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 노랫말의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5·18에 참여한 시민이거나 1980년대 대학가에서 만들었다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멜로디는 1971년 프랑스 가수 미셸 폴나레프가 작곡한 '누가 할머니를 죽였는가?(Qui A Tue Grand'maman?)'에서 빌려왔다. 미셸 폴나레프는 이 노래를 방송국 프로듀서였던 루시엥 모리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74년 가수 박인희가 ‘사랑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 발표한 바 있다. 가사는 제목처럼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박인희의 사랑 노래가 10여 년이 지난 후 '오월 광주'의 참상을 묘사하는 노래로 바뀌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인자 울지 마시요" 나훈아의 '엄니'
'오월 광주'를 배경으로 한 노래는 이외에도 몇곡이 더 있다. 1989년 이선희의 5집 음반에 수록된 ‘오월의 햇살’과 ‘한바탕 웃음으로’도 5·18과 관련이 있는 노래다.
어두운 밤 함께하던 젊은 소리가
허공에 흩어져 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노래하자던
내 친구 어디로 갔나
머물다 간 순간들
남겨진 너의 그 목소리
오월의 햇살 가득한 날
우리 마음 따스하리
이런 가사의 ‘오월의 햇살’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것이고, ‘한바탕 웃음으로’는 5·18 과정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나훈아가 1987년 6월항쟁 무렵에 광주 젊은이들의 죽음이 안타까워 만든 ‘엄니’도 있다.
엄니 엄니 무등산에 꽃 피거든
한 아름 망월동에 심어 주소
들리지라우 엄니 들리지라우 엄니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나훈아는 1987년 '엄니'를 쓴 다음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참배했다. 그리고 '엄니' 테이프 2000개를 광주 MBC 방송국을 통해 제작한 후 5·18 유족들에게 배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엄니' 테이프 배포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 노래는 2020년에야 비로소 정식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노래를 만든 후 발표하기까지 꼬박 33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셈이다. 시대가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스산한 5월, 봄날은 이렇게 또 간다.
※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