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부터 톱기어였습니다. 최민정은 몬트리올 링크에 서자마자 “내가 왜 간판인지”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증명했습니다. 여자 1000m 예선에서 1분 31초 587로 조 1위를 찍고, 곧장 여자 3000m 계주와 혼성 2000m 계주 준준결승에서도 각각 조 1위로 통과했습니다. 하루에 개인·단체 세 종목을 모두 1위로 끝낸 셈입니다. 기록과 순위만 놓고 봐도 훌륭하지만, 더 인상적인 지점은 경기 운영입니다. 불필요하게 힘을 쓰지 않고 필요한 순간만 힘을 꺼내는 그 특유의 ‘여유 있는 스케이팅’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초반엔 바깥 라인에서 흐름을 읽고, 중반엔 인코스 찬스를 한 번에 파고들고, 막판엔 스트레이트에서 속도를 덧붙여 추격의 싹을 미리 자르는 방식입니다. 링크 위에 그려지는 이 루틴은 최민정의 오랜 강점이며, 이날도 그대로 통했습니다.

이번 2차 대회 첫날을 보기 전, 많은 팬들이 살짝 걱정했던 대목이 있습니다. 1차 대회에서 개인전 메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자 3000m 계주 금메달로 존재감은 충분히 보여줬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최민정이라면 개인전에서도 포디움을 밟는 장면이 익숙하니까요. 그런데 최민정은 조급함 없이 순서를 밟고 있습니다. 1차 대회에서 몸을 열고 팀 리듬을 맞췄고, 2차 대회 첫날부터 개인·단체 모두 톤을 끌어올렸습니다. 무엇보다 1000m 예선 레이스가 담담했습니다. 불필요한 몸싸움을 피하고 라인 컨트롤로 상대의 추월 시도를 지우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고, 코너 진입각과 가속 타이밍이 아주 깨끗했습니다. 실수를 초대하지 않는 스케이팅이죠.
계주에서도 최민정의 존재감은 여전합니다. 이 선수는 바통을 주고받는 순간에도 고개를 자주 돌리지 않습니다. 호흡과 러프 타이밍이 몸에 배어 있어 한 번의 손짓이면 충분합니다. 교대 직전 반 바퀴 앞부터 속도를 미리 올리고, 터치 순간에 팀 속도를 잃지 않게 만드는 작고 정확한 디테일이 승부를 가릅니다. 이날 여자 3000m 계주와 혼성 2000m 계주 모두 조 1위를 만든 배경에는 이런 디테일이 깔려 있습니다. 계주는 기록보다 팀 템포가 중요하고, 팀 템포는 리더의 안정감에서 시작됩니다. 최민정은 그 부분에서 변함없는 기준점입니다.

최민정의 강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선수는 ‘속도와 공간’을 같이 씁니다. 앞선이 빨라질수록 코너 안쪽은 좁아지고 바깥은 길어집니다. 많은 선수들이 그 틈에서 부딪히거나, 라인을 잃어버립니다. 최민정은 속도를 유지한 채 반 바퀴 먼저 공간을 예약하듯 움직입니다. 그래서 같은 속도로도 덜 힘들어 보이고, 같은 어깨 접촉에도 덜 흔들립니다. 기술적으로는 코너 진입 전 두 걸음에서 엣지를 조금 더 깊게 세우는 습관, 그리고 코너 탈출 구간에서 짧은 스텝으로 피벗을 끊어주는 리듬 덕을 봅니다. 이게 랩이 쌓일수록 체력 손실을 줄여 주고, 막판 라스트 랩에서 힘을 한 번 더 꺼낼 수 있는 여지를 만듭니다.
멘탈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선이라도 한국 간판이 출전하면 링크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선두를 달리면 쫓기는 부담, 중간에서 기다리면 앞의 간격이 거슬립니다. 그런데 최민정은 속도를 올릴 때와 참을 때를 정말 잘 가릅니다. 상대가 라인을 무리하게 찌르면 굳이 같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다음 코너에서 인코스를 열어두고, 역으로 바깥 가속으로 제압하는 장면을 많이 보여줍니다. 그래서 ‘깨끗이 1위’가 많습니다. 반칙 시비를 부르는 장면을 줄이고, 심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큰 자산입니다.

2차 대회는 이제 시작입니다. 1000m는 레이스가 촘촘해 변수가 많고, 1500m는 체력 관리가 핵심이며, 500m는 스타트 하나가 판을 뒤집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전통적으로 500m에서 애를 먹어 왔고, 이번에도 남자부에서 고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최민정의 긴 거리 페이스는 팀 전체의 안전장치 같은 역할을 합니다. 팀이 힘들 때 점수판에 ‘1’을 먼저 켜 주는 사람, 그게 에이스입니다. 여자 대표팀이 1차 대회에서 계주 금메달을 들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첫 바퀴의 안정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차 대회에서도 그 역할은 변하지 않습니다.
최민정의 커리어는 이미 찬란합니다. 그럼에도 해마다 발전 포인트를 만들어 옵니다. 요즘 눈에 띄는 변화는 스퍼트의 ‘길이’입니다. 예전보다 라스트 두 바퀴를 길게 가져가고, 그 안에서도 한 번 더 변속합니다. 한 바퀴 반 지점에서 살짝 올렸다가, 마지막 반 바퀴에서 한 번 더 올리는 두 단계 스퍼트입니다. 이 패턴은 뒤에서 추격하는 선수들에게는 정말 괴롭습니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올라타면, 마지막에 한 번 더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1000m 예선에서도 그 리듬이 선명했습니다.

무엇을 기대해도 좋을까요. 개인전에선 1000m와 1500m에서 결승 라운드 진출을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선 첫날의 감각이라면 충분합니다. 계주에선 여전히 한국이 강합니다. 포메이션이 단단하고, 교대 실수가 적습니다. 최민정이 끌고, 김길리·노도희·심석희가 받치는 그림이 안정적입니다. 혼성 계주는 남자 주자의 컨디션에 따라 흔들릴 수 있지만, 여자의 첫 바퀴를 최민정이 깔끔하게 열어 주면 레이스 전체가 편해집니다. 결국 큰 그림은 같습니다. 최민정이 흐름을 만들고, 팀이 그 흐름을 탑니다.
마지막으로, 최민정의 경기를 볼 때 작은 포인트를 하나 권합니다. 중계 카메라가 넓게 잡힐 때, 최민정이 코너 외곽을 크게 그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단지 거리를 더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코너 인코스를 미리 잡기 위한 ‘준비 동선’입니다. 그 작은 준비가 한두 번 쌓이면, 마지막 랩에서 추월 각도가 열립니다. 오늘 같은 예선에서 이미 그 예고편이 나왔습니다. 결승 라운드로 갈수록 그 장면은 더 뚜렷해질 것입니다.
정리하면, 2차 월드투어 첫날의 최민정은 기록보다 내용이 좋았고, 내용보다 분위기가 더 좋았습니다. 1차 대회에서 개인전 메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굳이 변명하지 않았고, 대신 링크에서 해답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에이스의 방식입니다. 이제 남은 건 마침표를 어디에 찍느냐입니다. 우리가 아는 최민정이라면, 그 마침표는 결승선 바로 위, 전광판의 가장 높은 자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도 아마 표정은 오늘처럼 담담할 것입니다. “할 일을 했다”는 표정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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