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로 씨, 여고생 상대로 너무 심한 거 아니오?

TBS 홈페이지

7회 2사에 깨진 노히트노런

7회 초가 시작된다. 스코어 3-0이다. 이미 승부는 기울었다. (8월 31일 나고야 반테린돔, 일본 여자고교 선발 – 고베 치벤)

여고생 팀의 반격이다. 타순이 좋다. 선두가 2번 타자다.

하지만 카운트가 몰린다. 1-2에서 4구째가 결정구다. 슬라이더(122㎞)가 날카롭게 휘어진다. 배트가 속절없이 끌려 나간다. 헛스윙, 삼진이다.

다음 타자도 비슷하다. 카운트 2-2에서 고비가 찾아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면 승부다. 131㎞짜리 묵직한 직구다. 가장 멀고, 낮은 쪽에 완벽하게 꽂힌다. 역시 헛스윙 삼진이다.

관중석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된다. 이제 남은 아웃은 7개다. 그런데 (여고생 선발) 원정 팀은 여전히 안타가 없다. 이러다가 대형 사고가 날 것 같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중계팀도, 팬들도. 설레발은 절대 금지다.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그런 와중이다. 4번 타자의 차례다. 도중 교체된 포수 모리 유카(기후제일고)가 왼쪽 타석에 들어선다.

초구는 직구(130㎞)였다. 가운데 약간 높았다. 거침없는 스윙을 돌린다. 땅볼 타구가 투수 옆을 스친다. 그리고 유격수를 벗어나, 중견수 앞까지 구른다.

여고 선발팀의 첫 안타다. 주인공이 1루에서 활짝 웃는다.

TBS 중계 화면

“기록이 깨져서 너무 억울해”

하지만 투수는 아니다. 아차 하는 얼굴이다.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경기 후 인터뷰 때다. 누군가 그 순간을 묻는다. 아쉬웠냐고.

에이, 무슨 그런 질문이 있나.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시라. 정식 경기도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까마득하다. 30살 넘게 차이나는 여고생들이다. 설마 기록에 신경이나 쓰겠나. 하물며 깨졌다고 섭섭하다고 하겠나. 체면이 있지, 그런 말이 나오겠나.

그런데 의외다. 대답은 “그렇다”였다.

기자 : 노히트노런을 의식했나.

이치로 :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은 꽤 많이 의식했다.

기자 : 기록이 깨질 때 아쉬웠나.

이치로 : 너무 억울했다. 역시 기록은 의식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배우게 됐다.

(이 경기를 중계한 TBS 해설진은 7회가 끝난 뒤, 이치로가 덕아웃에 돌아가 동료들에게 “노히트 노런을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깝게 됐다”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웃기는 일이다. 나이가 51세다. 반백이 넘었다. 머리도 하얗게 셌다. 얼굴에는 주름이 점점 깊어진다.

커리어를 생각하면 더 기가 막힌다. 그야말로 레전드 중의 레전드다. 일본 역사상 최고의 선수다. 메이저리그까지 평정했다. 동양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것도 1표 빠진 만장일치였다.

그런 전설이, 여고생에게 안타 하나 맞았다고, 아.쉬.워.한.다.

참고로, 이날 스코어는 8-0이다. 여고생 팀의 완패다. 선발 투수 이치로가 1안타 완봉승을 거뒀다. 삼진은 14개를 뽑았다. 투구수 111개, 최고 구속은 135㎞를 찍었다. (여고생 투수들은 대략 110~120㎞ 가량의 스피드였다.)

고베 치벤에는 메이저리그 출신만 4명이다. 이치로 외에도 마쓰이 히데키, 마쓰이 가즈오,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포진했다. 마쓰이 히데키는 결승 3점 홈런(3회)을 터트렸다. 첫 출장한 마쓰이 가즈오 역시 맹타(3안타)를 휘둘렀다.

타자 이치로는 5타수 1안타에 그쳤다.

경기를 홍보하는 포스터. TBS 홈페이지

2주 전 어깨 통증…등판 강행

사실 이날 등판은 직전까지 불투명했다. 갑작스러운 어깨 통증 때문이다.

약 2주 전이다. 훈련 중 뻐근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수 시절부터 겪던 고질적 증상이 재발한 것이다. 이후로 열흘 넘도록 공을 잡지 못했다.

당연히 훈련은 전면 중단됐다. 시애틀에 다녀올 일정도 취소시켰다. 그리고는 오로지 치료와 회복에만 전념했다. 여기저기 용하다는 곳을 모두 찾아다녔다. 마치 일본시리즈나, 월드시리즈 등판을 앞둔 투수 같은 초조한 날들을 보내야 했다.

물론 대역이 없는 건 아니다. 대투수 마쓰자카가 있다. 고교시절 명문 PL학원의 에이스였던 마쓰이 가즈오도 있다.

하지만 철칙이 우선이다. 반드시 본인이 던져야 한다. 그것도 9회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올해가 벌써 5년째다. 한 번도 그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다리가 아파서 쓰러지면서도, 종아리가 욱신거려 절뚝이면서도, 손끝에 피가 몰려 찌릿찌릿해도, 어깨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괴롭혀도.

그는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100개가 넘는 공을 다 던져야 했다. 27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고 나서야 마운드를 내려왔다.

◇ 5년간 이치로 완투 기록

2025년 = 1안타 0실점 14K 투구 111개
2024년 = 10안타 3실점 10K 투구 141개
2023년 = 5안타 0실점 9K 투구 116개
2022년 = 2안타 1실점 14K 투구 131개
2021년 = 4안타 0실점 17K 투구 147개

이날 경기에 앞서 일본 야구의 전당 헌액식이 진행됐다. TBS 중계화면

8초의 침묵

이날 경기가 끝난 직후다. 현장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기자 : 오늘도 끝까지 던졌다.

이치로 : 2주 전에 어깨에 통증이 생겼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에 좋아져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기자 : 강행한 이유는.

이치로 : 내게 있는 책임감이다. 여고 선발팀은 ‘투수 이치로’와 대결을 위해 오랜 시간 준비했을 것이다. 그 목표 의식에 방해가 될 수는 없었다.

기자 : 왜 여고 선발팀인가.

이치로 : 아무래도 남자 선수들과는 다르다. 야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어렵다. 그런 상황을 이겨내는 게 대견하다. 그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런 이벤트를 시작했다.

기자 : 단지 그것 때문인가.

이치로 : 우리 남자들은 좀 거친 구석이 있다. 예컨대 연습 경기라도 심판의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표정이나 눈빛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친구들은 그런 게 없다. 모든 플레이에 경의가 담겼다. 그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야구하는 게 보인다. 그런 자세는 본받아야 한다. 우리 팀의 모토로 하고 싶다.

기자 : 언제까지 이런 경기가 가능한가.
이치로 : 어차피 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이 대목에서 8~9초간 침묵이 흘렀다.) 그때까지는 가능한 한 앞에 있고 싶다(그라운드에서 뛰고 싶다).

몇몇 일본 매체는 이 침묵을 ‘울컥했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런 게 아니다.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됐다. 그냥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TBS 중계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