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화를 ‘예술’로…한국계 ‘파티나’ 아티스트 필립 양

파리/정철환 특파원 2024. 9. 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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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영국 파티나 세계 대회에서 우승
한국계 최초 ‘코르테’의 파티나 장인
세계적 수제화 브랜드 프랑스 코르테(Corthay)의 파니타 아티스트인 필립 양(35). 지난해 세계 파티나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한 켤레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남성 수제화(手製靴) 중엔 이른바 ‘파티나(Patina)’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있다. 파티나는 원래 금속 표면에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녹청(綠靑)을 뜻하는 용어. 하지만 구두 제작에서는 수제화의 표면에 특수 염료를 사용, 독특한 색감과 질감을 주는 작업을 일컫는다. 매번 새로 색을 배합하기 때문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오직 그 구두 한 켤레만을 위한 색이 만들어진다. 구두마다 고유한 개성을, 또 독특한 깊이감을 준다.

벨루티(Berluti)와 코르테(Corthay) 등 유명 프랑스 수제화 브랜드가 파티나 기법의 구두로 유명하다. 벨루티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회장이, 코르테는 세계적 보이그룹 BTS 멤버들이 신으면서 대중에도 알려졌다. 파티나는 특히 단순한 ‘염색’을 넘어 예술의 영역을 넘나든다는 평가도 받는다. 염료의 배합부터 구두에 칠하고 마무리하는 과정 전체가 장인의 손으로 이뤄진다. 익히기는 물론이고, 능숙하게 해내기는 더욱 어렵다. 그만큼 소수의 특별한 장인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파티나 작업. 프랑스에도 파티나 아티스트는 손으로 꼽을 수준이다.

코르테의 경우 단 3명 뿐인 파티나 아티스트 중 한 사람이 한국계 필립 양(35·양영하)씨다. 프랑스 교민 2세로,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파티나 세계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코르테에서 일한지는 올해로 2년째. 이전에는 벨루티와 루부탱(Louboutin), 세티엠 라르제르 등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는 “루부탱에서는 신발 제작을 처음부터 배워가며 장인 정신을 익혔고, 벨루티에서 파티나 작업에 대해 본격적으로 접하게 됐다”고 했다. 구두 디자인과 맞춤형 제작에 대한 기술과 경험을 충분히 쌓은 다음, 파티나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었던 셈이다.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파티나 세계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필립 양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필립 양 제공

필립 양은 “파티나의 전과정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며 “그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장인이 직접 신발 표면에 염료를 바르고, 이를 다양한 기술로 처리해 원하는 색상과 질감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브러시, 스펀지, 심지어 손을 사용하여 색을 부드럽게 섞거나 층층이 쌓아가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 덕분에 절대 똑같은 구두가 만들어지지 않아요. 같은 스타일의 신발이라도, 각각의 파티나 구두는 그 자체로 독특한 작품이 됩니다.”

소재는 송아지 가죽이나 악어 가죽, 스웨이드 등 최고급품을 쓴다. 그는 “이들 소재는 색상과 질감의 변화를 잘 흡수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연스럽고 멋진 모습을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파티나 작업은 구두의 내구성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그는 “염료와 광택을 층층이 쌓아가는 과정에서 가죽의 표면이 더 강해지고, 시간과 마모에 더 잘 견딜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색에 변화가 생긴다. “구두를 신으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마모나 빛바램이 신발의 역사와 개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줍니다. 이는 기성품 신발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특성이죠.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색감과 질감은 단순한 낡음이 아니라, 신발에 담긴 고유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는 본래 대학(베르사이유 미술학교)에서 그래픽 아트를 전공했다. 하지만 추상적인 그림보다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예술 작업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고, 결국 수제화 장인 학교를 향했다. 그는 “구두가 단순히 ‘신는 물건’을 넘어서, 사람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빠졌다”고 했다. 특히 파티나 작업을 통해 각 신발이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이 된다는 점에서 더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파티나는 단순한 염색이 아니라, 예술적 감각과 기술, 그리고 인내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구두의 형태와 구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신발의 외관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파티나 아티스트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죠.”

필립 양이 구두의 수제 염색(파티나) 작업 중인 모습. 염료의 배합과 칠하기 등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필립 양 제공

이 분야의 최고 브랜드로 꼽히는 벨루티와 코르테 등을 모두 경험한 이는 드물다. 그는 두 회사 간에 ‘얼마나 대중성을 추구하느냐’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코르테는 단순한 패션 아이템을 넘어서, 여전히 장인 정신을 고집하는 브랜드 같아요. 구두 제작 방식도 매우 전통적이죠. 그에 비해 벨루티는 LVMH 그룹의 일부가 되면서 패션 트렌드에도 중점을 두는 회사로 변모한 것 같습니다. 벨루티는 좀 더 유명하고, 여러 패션 컬렉션을 통해 매년 새로운 모델을 선보이죠.”

필립 양이 만드는 구두의 가격은 기본 1500유로(약 220만원)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악어 가죽, 상어 가죽 등 특별한 소재를 사용하면 가격이 4000유로(약 590만원)를 넘을 수도 있다. ’너무 비싼 것 아니냐’고 하니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맞춤 제작과 파티나 작업의 복잡성, 재료의 가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며 “결국 그 가치를 이해해주는 소수를 대상으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수제화의 특성상 구두 제작자는 고객들을 직접 만나게 된다. 그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이들이 있지만, 밝힐 수는 없다”고 했다. 고객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것이 불문율이란 것이다.

필립 양이 좋아하는 색깔은 파란색과 갈색 계열이다. 세계 파티나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만든 구두의 색깔도 녹색과 파란색 계열이었다. 그는 “구두는 내 캔버스이자, 조형물”이라며 “누구에게나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구두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한국에서의 활동을 늘려갈 계획이다. “더 많은 한국인들에게 파티나 구두의 세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가기 위해 제 프랑스인 아내도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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