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바람의 아들.’ 가문을 처음 일으킨 인물이다. 그의 프로 첫인상이다. 그때만 해도 팀 이름은 해태였다.
“입단했는데, 그냥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 그런 생각이었다. 김성한, 한대화, 선동열, 장채근, 박철우, 이건열…. 뭐 이렇게 있었으니까.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멤버였다. 나이 차이가 12년, 10년, 8년씩 났다.”
한마디로 “너무 무서운” 팀이었다. “프로 가면 안 맞을 줄 알았더니. 웬걸, 걸핏하면….” 그다음은 말 줄임표가 필요하다.
“사우나 끝나고 이강철 선배가 몸을 말리면서,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오더니 뒤통수를 세게 갈기더라. ‘어린 녀석이 무슨 멋을 그렇게 부리냐.’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런 시대였다. 그렇게 엄한 팀이었다. 자신의 첫 홈런에 대한 추억도 새롭다.
“잠실이었다. 넘어간 줄도 몰랐다. 워낙 야구장이 크지 않나. 그냥 열심히 달렸다. 아마 홈까지 들어오는데 18초도 안 걸렸던 것 같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혼자서 마음껏 (세리머니) 신바람을 냈다.”
여기서 잠시 ‘아차’ 했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다. 둘러보니 선배들이 멀뚱히 쳐다본다. 다들 홈런을 엄청 많이 친 분들이 죽~ 앉아 있다.
“야단은 안 맞았는데, 점잖게 한마디 하시더라. ‘아야, 적당히 해라. 그러다가 볼(빈볼) 맞는다.’ 무지하게 뻘쭘했다.”
동양 예절 수업
그 피가 어디 가겠나. 그의 아들, 그러니까 ‘바람의 손자’도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유튜브 채널 <썸타임즈> 중의 내용이다. 이영미 기자의 ‘스캠라이브’ 코너에 흥미로운 장면이 포착됐다.
경기 중 덕아웃이다. 동양의 예절 수업이 펼쳐진다. 수강생은 제라르 엔카나시온이다. 도미니카 출신 외야수에게 깍듯한 목례를 가르친다. 단정한 차렷 자세, 허리는 공손히 숙인다. 90도에 가까울수록 지극함이 드러난다.
여기서 외지인들이 헷갈리는 지점이 있다. 자신들의 문화와는 다르다. 상대와 눈을 마주치면 곤란하다. 시선은 아래를 향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예법이다.
산만한 덩치(193cm, 113kg)가 제법 잘 따라 한다. 거의 완벽한 자세를 표현해 낸다. 어깨를 툭툭. 스승의 칭찬을 받는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러나 웃긴 장면이다.
하지만 여기서 함정이 있다. 제자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은 1997년생이고, 스승은 1998년생이다. 가장 두렵고, 까마득하다는 한 살 차이다. 동양의 오뉴월 하루 볕이 얼마나 무서운 지. 그건 심화 학습이 필요한 내용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프로는 실력이 곧 서열이다. 연봉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엔카나시온은 지난해 마이너리그 계약으로 이적했다. 올해는 최저 연봉에 가까운 80만 달러를 받는다.)
푸이그를 군기반장으로
사실 그의 아카데미는 평판이 자자하다. 이미 KBO 시절부터 실적이 있다.
야시엘 푸이그가 고척돔으로 수입된 2022년이다. 워낙 유별나고, 유명한 성격 아닌가. 천방지축 야생마 같은 캐릭터의 소유자다. 팀에서도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 다들 멀찍이 거리를 둔다. 바라만 보며, 쭈뼛거릴 뿐이다.
그래서 그런가. 초반 적응력이 영 시원치 않다. 느린 변화구에 당황하고, 허둥대기 일쑤다. 타율은 2할을 지키기 바쁘다. 4번에서 출발한 타순도 오락가락이다. 어느 날은 8번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상태는 점점 심각해진다. 심지어 중도 교체설까지 돌 정도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람의 손자다.
“가장 친한 동료는 정후다. 그와 어울리며, 팀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동료가) 홈런을 치면, 서로 먼저 달려 나가는 경쟁을 한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고척돔 외야 수비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의 조언이 힘이 됐다.”
그러다 보니 팀에서 위치도 달라진다. 어느 틈에 ‘푸이그 선배’로 승격했다. 신입 선수들 상견례 때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헤이, 루키들. 대가리 박아.” 유창한 한국어로 좌중을 빵 터트린다.
군기 반장 역할을 밀어준 사람이 있다. 역시 절친이다. “정후가 시켰다. 군대에서 쓰는 말이라고 하더라. 함께 웃을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물론 루키들에게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덕분에 쿠바 출신의 한국 생활은 궤도에 안착했다. 7월 이후로는 월간 타율이 꼬박꼬박 3할을 넘겼다. 환상의 짝꿍 덕에 팀은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리더십과 친화력
장난스러움만 남긴 것이 아니다. 인상적인 장면도 있다. 그때(2022년) 한국시리즈의 기억이다.
마지막 경기는 6차전이었다. 또다시 역전패로 대권에서 멀어졌다. 그라운드는 SSG 랜더스의 환호로 뒤덮였다. 반면 3루 쪽 덕아웃은 참담한 분위기다.
그중 한 명이 유독 고개를 들지 못한다. 실책을 범한 김휘집이다. 머리를 푹 숙이고, 자책한다. 눈물을 흘리는 듯 소매가 자꾸 눈가로 간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사람이 있다. 겨우 24살짜리 리더다. 한참 어깨를 토닥인다.
“괜찮다. 너 때문에 진 게 아니다. 나도 잘못이 있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여기까지 열심히 잘 싸웠다.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다음에 더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면 된다.”
이 장면을 본 한 ML 스카우트(한국인)는 훗날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한국이나 일본 출신의 투수들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사례는 많다. 반면 타자들은 쉽지 않다. 그건 포지션 플레이어들의 특성 탓이다. 투수처럼 혼자 하는 게 아니고, 그만큼 클럽하우스의 케미스트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정후 정도라면 잘 해낼 것이라고 본다.”
리더십, 그리고 친화력.
바람의 가문을 관통하는 2개의 키워드다. 그런 점에서 바람의 손자는 별로 손색이 없다. 아직은 낯선 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