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차’ 소설가 김탁환이 영화제 준비하는 이유
김탁환 소설가는 2021년 1월에 전남 곡성으로 이주했다. 2018년 3월 곡성의 ‘밥cafe 반하다’에서 이동현 농업회사법인(주) 미실란 대표를 우연히 만난 게 계기가 되었다. 이 대표는 유기농 발아현미를 연구하며 농사를 짓는 ‘농부 과학자’다. 그때 ‘밥맛이 무척 좋다’는 말로 시작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후 여러 차례 만났다. 그 이야기로 책(〈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도 쓰고 아예 작업실을 곡성으로 옮겼다. 폐교를 활용한 미실란 2층 작업실에서 소설을 쓰고, 농사도 짓는다. 미실란 앞의 논농사를 거들고, 집 앞 텃밭에서 감자, 상추, 대파, 토마토, 고추, 옥수수 등을 기른다. ‘농사 일은 어떤가’ 하고 묻자, 김탁환 소설가는 “의외로 잘한다는 말을 듣는다. 농사가 소설 쓰는 것과 비슷하다.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걸 잘하는데, 그래서인지 농사가 나에게 잘 맞는다”라고 말했다.
9월4일 곡성에서 김탁환 소설가를 만났다. 9월 말에 열리는 섬진강마을영화제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그가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이 영화제는 ‘환경·생태·마을·공동체’를 주제로 삼는다. 올해로 3회째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과 함께 섬진강가를 걷고, 마을 속으로 들어간다. 올해 영화제의 부제는 ‘늦었다고 말하는 당신에게’다. 생태·공동체의 위기를 알면서도 ‘뭘 한다고 되겠어, 이미 늦었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골랐다고 한다.
인구 2만6000여 명인 곡성. 이곳에서 29년 차 소설가가 왜 영화제를 하게 되었을까. ‘마을소설가’를 자임하는 작가는 섬진강과 마을, 그리고 곡성 이주와 생태적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실란 주변을 안내하면서 “구름이 참 아름답지 않아요?”라고 했다. 몇 년 전 곡성 곳곳을 소개면서 이동현 대표가 작가에게 반복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름답지요, 정말?”이라는 말.
여행 중에 식당에 밥 먹으러 갔다가, 몇 년 후에 아예 곡성으로 왔다고?
대학 친구들과 구례에 여행 갔다가 미실란에서 운영하는 밥cafe ‘반하다’에 들렀다. 그때 이동현 대표를 처음 만났는데, 옆에서 친구들이 놀린 거다. ‘이 사람, 소설가인데 모르냐’ 하면서. 이 대표는 20년 동안 소설은 한 권도 안 읽었다고 답했다. 그러다 KBS 드라마 원작인 내 소설 이야기(〈불멸의 이순신〉)가 나왔다. 이 대표가 ‘일본 유학 시절에 힘들 때 그 드라마를 봤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그러면서 함께 사진도 찍고, 페이스북 친구가 되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식당 주인’과 처음 만나 이후 자주 만났다?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이 대표의 페북을 보는데, 새벽 일출 사진 올리고 하루에 4개씩 글을 올리더라. 그런데 비문·오문에 이름도 막 틀려 있고. 내가 약간 직업병이 있다. ‘이 사람은 왜 퇴고도 안 하고 이렇게 막 올리나’ 싶었다(웃음). 한 달 정도 이동현 대표의 페북 글을 봤는데, 그가 곡성에서 이 일 저 일 따지면 12가지 정도 일을 하고 있더라. 한 가지 일을 마치고 나면 다른 일을 하려고 이동하면서 그렇게 페북 글을 쓴 거더라. 한마디로 ‘과잉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잉된 삶’에 왜 관심을 가지나?
‘과잉된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면 다시 보게 된다. 내 소설의 주인공들도 다 과잉된 인간들이다. 이순신, 황진이, 실학자 박지원 등 남들이 ‘또라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가 발전해 어떤 일을 하고 당대의 한계를 돌파한 사람들이다.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뭘까’ 생각하게 된다. 이동현 대표의 경우도 그랬다. 페북에 올린 글이 진짜라면 왜 이렇게 사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싶었다.
곡성을 자주 오가게 되었나?
광주나 남원에 강연할 일이 있으면 괜히 곡성을 들렀다. ‘반하다’에서 밥 먹고 가고, 그가 하는 일을 훔쳐보고 가고(웃음). 6~7개월, 그랬다. 오가다가 이동현 대표도 간간이 만났다. 이야기를 해보니 페북에 올린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더라.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를 썼다.
그래서 곡성으로 이주까지 했는데.
이동현 대표를 만난 게 결정적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전부터 ‘생태적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2016~2017년 세월호 관련 활동으로 광화문광장에 나가보면, 한구석에 적은 인원이 있는 게 보였다. ‘메르스 피해자’였다. 이분들은 지금도 조직이 없다. 메르스 피해자 가운데 절반은 사는 곳을 옮겼다. 메르스 환자의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면 왕따 당하고 2차 피해를 입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서 지금이야 인구 100만명 이상의 도시의 삶이 얼마나 취약한지, 생태적인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졌지만 메르스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여태까지 내 삶이 대도시의 삶이더라. 메르스 피해를 다룬 소설(〈살아야겠다〉)을 쓰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생태적 삶을 사는 곳으로 가야겠다 마음먹었고 지역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마침 이동현 대표와 곡성이 ‘얻어걸린’ 거다.
생태 책방 ‘들녘의 마음’도 열었다.
곡성에 와서 만나는 분들에게 ‘나한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글을 써보고 싶다는 분이 많아 글쓰기 학교를 열었다. 7기까지 하고 8기를 준비 중이다. 교사들을 만났더니, 곡성이 ‘책방 소멸 지역’이라 매 학기 아이들과 책방 견학하러 차를 빌려서 광주·순천으로 간다고 했다. 책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동현 대표와 생태 책방을 여기 미실란에 열었다. 사실 곡성에 오면서 ‘책을 멀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웃음). 역사소설을 쓰면서 책과 자료 보는 게 일이었다. ‘활자중독’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십몇 년을 너무 책에만 치여 사는 것 같아서, 서울에서 읽던 분량의 절반만 읽자 결심하고 왔다. 농사짓고 몸을 쓰니까 무척 좋았고, 드디어 책을 조금 보게 되었다고 좋아했는데(웃음), 여기 마을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책방을 열게 되었다. 어느새 내가 7~8가지 일을 하게 되더라. 여기 사람이 적으니까. 농사 짓고, 책방 하고, 이야기학교(글쓰기 강의) 하고, 마을 영화제 준비하고, 생태 체험 교사 하고, 소설 쓰고, 지금은 안 하는데 판소리 축제 일도 하고. 무척 바쁘다(웃음).
곡성에 와보니 어떤가?
세 가지가 좋다. 첫째, 생태적인 곳이다. 면적이 서울의 10분의 9가량 되는데, 인구는 2만7000명이 안 된다. 사람이 적은 만큼 생물종 다양성이 풍부해 생태적 삶을 살기에 좋다. 둘째, 이야기가 많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역이기도 하고, 섬진강을 중심으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무척 많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계산해보니 내가 40년 정도 쓸 이야깃거리가 있더라. 셋째, 마을 활동가들이 무척 많다.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던 분들이 최소한 10년, 20년 이곳에 살면서 활동하고 있다. 섬진강마을영화제 공동운영위원장을 하고, 죽곡농민열린도서관장 하면서 농사짓는 박진숙씨도 그중 한 명으로, 농민 활동가의 ‘대모’다. 그분들이 내 또래다. 농사지으면서 활동도 많이 하고. 정말 일을 잘한다.
섬진강마을영화제는 왜 하게 되었나?
마을 활동가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태 책방이 좋긴 한데, 젊은 농부나 어린이·학생들이 주 대상이고, 책을 읽지 않는 60대 이상 지역 분들이 참가할 수 있는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영화제 같은 걸 하면 좋겠다는 거다.
영화제 일이 전문 영역일 텐데 실무는 누가 하나?
영화제를 하자고는 했는데, 우리는 그 방면 ‘선수’가 아니다(웃음). 재미있는 게, 이쪽 섬진강 라인에 다큐멘터리 일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생태·환경 촬영을 위해 내려왔거나, 다큐 관련 활동을 하다가 귀촌한 ‘선수’들이 있는 거다. 그 선수들이 섬진강마을영화제 일에 합류했다. 이분들이 여러 영화제를 다니면서 어울릴 만한 영화를 찾았다. 이번 영화제에서 〈연습〉이라는 극영화를 상영한다. 비행기를 타지 않는 한 음악가가 오디션에 참석하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상황을 담은 영화다. ‘메이’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가 박진숙씨와 마을에서 같이 활동한다. 그가 노르웨이 감독에게 우리 영화제를 소개하는 메일과 영상을 보내고,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 ‘가난한 영화제’라고 했더니 비용도 적절한 선에서 가능했다. 그 감독도 생태적 삶을 사는 이라, 일이 쉽게 풀렸다.
1·2회 영화제 때의 반응은 어땠나?
연인원으로 따지면, 1회 때 500명, 2회 때 1500명가량 왔다. 외지인 비중이 절반 정도다. 보통 영화제는 한군데에서 영화를 보게 하는데, 우리는 관객들이 섬진강과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는 게 목표다. 마을을 함께 걷고 마을을 직접 보여주는 영화제가 이전에 없어서인지 반응이 좋았다. 올해도 영화제 둘째 날에 내가 곡성역으로 마중을 갈 거다. 강가와 마을을 함께 걷고 중간에 도시락도 같이 먹고. 미실란에 2시쯤 도착하면 곡성과 구례의 아이들이 만든 단편영화 두 편을 같이 보려 한다. 잘 만들었고, 엄청 웃긴다. 그 배우·출연진이 선생님과 같이 오기로 했다. 또 밤에는 작곡가 김희갑 선생을 다룬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을 야외에서 보고, 양희 감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마을 사람들과 같이 영화를 보고 공연도 하고 같이 음식을 먹고 싸돌아다니는 게 영화제의 원초적인 어떤 본질이지 않을까. 그런 게 잘 구현되었다고 본다. 관에서 지원을 많이 받고, 영화제를 키우고 그런 거에는 사실 관심이 없다. 오히려 영화제의 규모가 커지는 걸 경계한다.
자체 평가는 어땠는지?
곡성이 곡성읍권·석곡권·옥과권 등 세 권역으로 나뉘는데, 영화제가 읍 중심으로 이루어져 올해는 면까지 확장해보자는 말이 나왔다. 매달 공동체 상영을 하고 그 힘을 모아 영화제에 집중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래서 5월부터 〈수카바티〉 〈길 위에 김대중〉 같은 영화를 면 단위에서 공동체 상영을 했다. 또 섬진강 인근에 사는 이들이 만든 영화를 틀자는 목표도 있다. 이 인근에 있는 다큐 감독들의 영화는 내년쯤에는 상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사이 새 장편소설 〈참 좋았더라:이중섭의 화양연화〉를 냈더라. 책 출간하면 보통 작가들이 출간 관련 행사로 바쁘던데.
오른쪽 뇌는 영화제 일, 왼쪽 뇌는 책 일로 바쁘다(웃음). 이중섭 화가가 태어나고 죽은 해가 9월이라 시기를 맞추어 출간했다. 이 책은 4년 전에 계약했다. 출판사(남해의봄날)가 4년을 기다려주었다. 해군 장교로 군복무를 할 때 퇴근하면 진해의 흑백다방이라는 곳에서 〈불멸의 이순신〉을 썼다. 흑백다방을 운영하던 유택열 화가가 예전에 이중섭과 인연이 있었다. 흑백다방을 드나들면서 ‘이중섭에 대해서는 다른 작가와 다르게 쓸 수 있겠다’ 싶었다.
곡성에 와서 농사짓고 책방 하고 영화제 일 하고, 무척 바빠 보이는데. 서울에서만큼 글을 쓰는지?
서울에서는 사람들 만나고 술도 마시고 하는데, 여기는 그런 게 거의 없다. 곡성에서 1년에 3000장 정도 쓴다(200자 원고지 기준). 나는 매일 일기를 쓰고, 하루에 얼마나 글을 썼는지 기록한다. 그렇게 한 지 20년 됐다. 장편 작가는 짧으면 2년, 길면 5~6년 동안 글을 쓴다. 몸 상태가 어떤지 점검 안 하고 막 달려간다. 젊어서는 밤새워 글을 쓰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몸에 무리가 왔다. 헤밍웨이에게 배운 게 있다.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매일 타자 친 숫자를 적어두었다고 하더라.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매일 일기를 쓰며 하루에 몇 장을 썼는지 기록하며 몸과 마음을 체크했다. 1년에 (200자 원고지) 3000~4000장을 쓰면 안 아픈데, 5000장이 넘어가면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농사로 바쁜 농번기 때는 두 달가량 글을 안 쓴다. 그래도 몸을 쓰니 좋고, 서울에서만큼 글을 쓴다.
※섬진강마을영화제는 9월27일부터 9월29일까지 열린다. 영화제 블로그(blog.naver.com/sjff2022)에서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곡성·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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