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K문학’이란 범주에 가두지 말자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한국 문학 전문가들이 이번 수상의 의미를 짚고 이를 계기로 한국 문학의 나아갈 바를 진단하는 연쇄 특별기고를 싣는다.
2015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저널리스트’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다음해 수상자는 미국 민권운동의 상징인 포크록 ‘가수’ 밥 딜런이었다. 최근 수년간 노벨 문학상 수상자·수상작의 변화는 인종과 젠더 외에도 기존의 전형성을 벗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평론가 오혜진의 지적대로, 문학 역시 일종의 담론장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순수문학은 가능하지 않으며, 문학은 정치경제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한강의 수상은 기쁜 일이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한국 남성 문화에서 ‘자체 호명’되던 이들이 아니라 더욱 반갑다. 한편 서구 근대 문명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노벨상에 대한 그간 한국 사회의 염원과 당대의 열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종이 신문이 쇼트폼 영상으로 대체되고, 인문사회 서적이 거의 읽히지 않는 상황에서 한강 소설 100만부 판매라는 노벨상 현상의 저변에는 “우리도 이제 서구가 인정한 문명국가”라는 의식이 없지 않다. 노벨상 수상을 ‘케이(K) 문화의 세계화’의 출발이자 완성의 일단락으로 보는 것이다.
한국이 글로벌 경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면서 모든 분야에 ‘케이’가 붙기 시작했다. 케이콘텐츠, 케이팝, 케이라면, 케이성형, 케이뷰티, 케이고속철…. 이제 한국에서 생산된 거의 모든 것은 내외부를 막론하고 ‘케이’가 수식한다. 심지어 ‘케이 문학’(Korean literature)은 다른 ‘케이~’와 달리 고유명사인데도, 왜 우리는 스스로를 ‘케이’로 특수화하면서 이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식민주의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모든 상황을 보편과 특수로 나누고 서구는 보편, 우리는 특수라고 자임하면서, 특수도 서구가 인정하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사실 한국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관념이다. 그것은 서구가 자신과 한국의 차이를 명명한 서구의 시선이자, 한국의 내부를 균질화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주의이다. 즉 한국적인 것은 주권 독립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 서구의 관점을 내면화한 후기(포스트) 식민주의다.
보편과 특수는 현상을 위계화하는 주된 방식이다. 본디 ‘보편과 특수’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진정 보편적인 것이 가능하다면, 특수는 있을 수 없다. 특수는 보편의 입장에서 명명된 것이다. 보편이 자신과 양립할 수 없을 것을 배제한, 나머지 것들(the others)이 특수다. 그러므로 보편의 상대어는 특수가 아니라 차이이고, 예술과 사회운동은 기존의 차이를 문제 삼으면서 보편을 해체하고 경계를 재구획하는 행위다.
한때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슬로건이 유행했지만, 이는 곧바로 비판받았다.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은 누가 나누는가? 서구는 글로벌이고 비서구는 로컬인가? 그래서 ‘글로컬’이라는 협상어가 등장했지만, 이 역시 글로벌과 로컬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간 우리에게 ‘세계 문학’은 영어·불어·독어로 쓰인 것이었다. 그 외 문학은 ‘제3세계 문학’으로 분류되어왔다. 비슷한 맥락에서, 서구 문학은 작가와 국적을 분리한다. 헤밍웨이의 문학은 그 자체로 세계 문학이지 “유에스(US) 문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카뮈에게는 카뮈만의 문학 세계가 있다고 간주된다. 누구도 카뮈를 프랑스 문학 일반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미국 대중가요는 팝송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케이팝, 제이(J)팝으로 불리는 이치와 같다.
지금 한국 사회의 노벨상 열풍의 근저에는, 한강의 수상은 곧 ‘케이 문학’의 성취라는 인식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강의 작품은 한국 문학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노벨상을 받은 백인 남성들처럼 한강의 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이다. 한강을 한국 문학이든 여성 문학이든, 특정한 범주에 가둘 필요가 없다.
이제 한국인들의 오랜 근대화 욕망은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를 넘어 ‘케이’의 이름으로 ‘케이 방산’(케이 살상)까지 세계 최고를 꿈꾸고 있다. 이 꿈은 말할 것도 없이 식민 콤플렉스이다. 추격 발전주의를 넘어 ‘맨 앞에 섰다’는 자부심이 한강의 문학을 ‘케이 문학’으로 한정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강의 문학 세계도 다양하며, 한국 문학 내부도 동일하지 않다. 한강은 ‘케이 문학’을 대표하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 자체가 이미 한국 문화를 넘어섰다는 의미이기에 기쁜 것이다. 문학은 국경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케이 문학’은 예술을 국민주의에 봉사시키는 행위다. 벌써부터 한강이 “노벨상 상금을 독도에 기부한다”는 가짜 뉴스가 그 징조다. 한국 사회가 이번 노벨상 수상을 의미화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케이 문학’을 해체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어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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