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자동차 업계를 놀라게 한 기아의 끈기로 탄생한 차 '스포티지'

'도심형 SUV'라는 개념조차 완전히 잡히지 않은 시기에 터프함에 치중했던 당시 SUV는 여러모로 불편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운전자를 지켜줄 것 같은 든든함은 있었지만 운전자에게 상냥한 차는 아니었던 거죠. 오프로드에 중점을 두다 보니 승차감이나 주행 편의성 또한 세단에 비하면 좋지 못했습니다.

1세대 스포티지는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차였습니다. 당시 SUV들이 모두 깍두기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을 때 세단처럼 유려한 곡선으로 디자인된 스포티지는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죠. 지금 보면 투박해 보이는 실내도 당시에는 도시 감각이 물씬 느껴지는 디자인이었습니다.

오프로더 록스타의 후륜구동 보디 온 프레임 차체를 변형해 만들었지만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한 설계로 낮은 지상고와 안정적인 시트 포지션을 구현했습니다. 덕분에 SUV를 부담스러워했던 여성분들도 큰 불편 없이 운전이 가능했죠.

기존에 있었던 2.0L 가솔린 및 2.2L 디젤 엔진과 5단 수동 및 4단 자동 변속기를 그대로 사용했지만 작은 차체, 가벼운 무게로 날렵하고 경쾌한 움직임을 선사했습니다. 후에 개선된 엔진을 새롭게 추가해 동력 성능을 끌어올리기도 했어요.

또 도심형 SUV 컨셉이었지만, SUV의 필수 덕목이었던 4륜구동을 갖춰 웬만한 SUV 못지않은 험로주파 능력도 갖췄죠. 기술력 부족으로 보디 온 프레임 구조를 사용한 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고 덕분에 오프로드 매니아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스포티지가 탄생한 데는 당시 기아와 제휴를 맺고 있던 포드와의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초창기 기아는 마쯔다의 차를 조립 생산하면서 많은 노하우를 쌓았는데, 이를 통해 기아가 고품질의 생산능력을 갖춘 것에 주목한 포드가 마쯔다와 함께 월드카 프로젝트를 기아에게 제안하면서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게 되죠.

마쯔다가 설계를, 기아가 생산을 맡았고 포드가 판매를 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나온 차가 바로 '1세대 프라이드'죠. 미국에서는 '포드 페스티바'라는 이름으로 판매됐고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 기아의 능력을 인정한 포드는 두 번째 월드카 계획을 꺼내들었고 당시 고민하고 있던 컨셉을 기아에게 제안합니다. 풀사이즈 SUV보다 작고 가벼우면서 패밀리카로도 활용할 수 있는 컴팩트 SUV였죠. 자신감에 차있던 기아는 초기에 긍정적으로 포드와 공동 개발을 추진했지만 포드가 슬슬 선을 넘기 시작하면서 개발이 중간에 멈추게 됩니다.

포드가 내민 조건은 연간 생산량의 절반인 10만 대를 기아가 맡는 대신 기아의 지분 50%를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산업 규모를 비춰보면 혹할 만한 조건이었지만 50%의 지분 요구는 경영에 간섭하겠다는 검은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제안이었죠. 마쯔다도 동일한 방식으로 포드에게 지분을 잠식당한 것을 알고 있던 당시 기아의 김선홍 회장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고 포드가 손을 떼면서 두 번째 월드카 계획은 무산됩니다.

공룡기업 포드의 제안을 호기롭게 거절했지만 독자적으로 신차를 개발할 노하우와 능력이 부족했던 기아는 마쯔다 등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브랜드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기아는 포기를 몰랐죠. 수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기아 기술진과 경영진의 열정으로 개발에 성공했고 1991년 일본차의 홈그라운드 도쿄 모터쇼에서 '스포티지'를 내놓게 됩니다.

포드를 비롯한 전 세계 자동차 업체들은 그야말로 '깜놀'했는데요. 현재까지 스포티지와 세계무대를 함께하는 다양한 컴팩트 SUV들이 등장하는 데 상당한 자극이 됐습니다. 얼떨결에 후발주자가 된 포드 역시 기아에 제시했던 컨셉으로 차를 개발해야 했고, 그 차가 바로 컴팩트 SUV '이스케이프'죠.

1세대 스포티지는 다양한 파생 모델도 함께 준비했는데요. 기본형인 5-도어 숏바디 모델을 시작으로 트렁크 공간을 키워 차체를 300mm 가까이 늘린 롱바디 '그랜드' 모델과 그랜드를 기반으로 한 2인승 상용밴 '빅밴'도 등장했습니다. 저 역시 초기형 그랜드 모델과 어린 시절을 함께한 기억이 있는데 아버지의 텐트와 낚시 가방이 세로로 실릴 정도로 트렁크가 꽤 넓었죠.

당시 유행에 발맞춰 3-도어 소프트탑 및 하드탑을 모델도 준비했지만 안전 문제로 아쉽게도 국내 출시되지 못했고 전량 북미에만 수출됐죠.

98년에는 범퍼와 그릴, 실내 디자인을 살짝 손봐 세련미를 더한 페이스리프트 모델 '아멕스'를 출시했고 2002년 국내 시장에서 단종됐습니다.

2004년 2세대 스포티지가 출시될 때까지 2년의 공백이 있었는데 록스타의 후속 모델이었던 '레토나'가 빈자리를 대신 맡았죠.

1세대 스포티지는 91년, 남들보다 앞서 선보여졌지만 실제 양산 되어 출시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판매망 문제로 수출이 늦어지면서 94년 출시된 도요타의 'RAV4', 이어 등장한 혼다의 'CR-V'에게 북미시장을 선점 당하게 되죠.

그럼에도 단종 직전까지 총 54만 대가 판매됐고, 그중에서 45만 대가 수출됐을 정도로 해외에서 크게 선전했습니다. 전 세계에 '기아 스포티지'를 각인시켰고 현재까지 수출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당초 1세대 스포티지 후속으로 개발되던 차는 1세대 '소렌토'였습니다. 1세대 스포티지와 마찬가지로 보디 온 프레임과 후륜구동 설계를 적용한 것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죠. 하지만 컴팩트 SUV를 지향했던 스포티지와는 달리 더욱 커진 차체에 다양한 고급 장비를 적용했고, 결국 '소렌토'라는 이름을 붙여 스포티지보다 한 체급 위인 중형 SUV로 출시했습니다.

이대로 스포티지가 가진 좋은 브랜드 밸류를 사장시킬 수 없었던 기아는 현대가 북미 시장을 겨냥해 개발하던 컴팩트 SUV '투싼'의 플랫폼을 공유해 부랴부랴 2세대 '뉴 스포티지'를 내놓게 됩니다. 이때부터 철저한 도심형 SUV로 노선을 잡게 되면서 1세대의 오프로더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됐죠. 이웃집 코란도처럼요.

무거운 프레임을 내려놓고 당시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한 모노코크 바디와 전륜구동계를 채용해 훨씬 나은 승차감과 세련된 디자인, 높은 연료 효율로 무장했습니다. 볼륨감이 돋보이는 범퍼와 듀얼 머플러로 멋을 낸 외관은 신형으로 거듭난 경쟁차에 밀리지 않았고, 실내 역시 도시적이면서도 견고해 보이는 디자인과 모노코크의 장점을 살린 넓은 공간이 돋보였죠.

뒷좌석 시트 방석이 낮아지면서 풀플랫 적재 공간을 제공했던 것도 좋았고요. 최근 신형 투싼 출시하면서 따로 광고까지 했던 기능이죠.

2.0L 가솔린과 디젤 엔진, 5단 수동 및 4단 자동 변속기가 탑재돼 무난한 성능을 제공했습니다. 2006년 2.0L 디젤은 VGT 사양으로 변경돼 출력이 30마력이나 상승했죠.

2007년 한 차례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좀 더 도심형 SUV에 가까워졌습니다. 앞뒤 범퍼 디자인이 단순해지면서 마치 면도를 한 듯 인상이 한결 깔끔해졌는데 세련된 이미지의 드라마 스타 이선균과 배두나를 모델로 프랑스 파리에서 찍은 CF를 보면 도시적인 느낌을 강조했다는 게 잘 드러나죠.

저렴한 DMB 순정 내비게이션을 도입했고 몇몇 편의장비와 출력 개선을 통해 상품성을 높이면서 인기를 이어갔습니다.

안타깝게도 전작이 개척해 놓은 컴팩트 SUV 시장은 강력한 후발주자에게 빼앗긴 후였지만, 2세대 스포티지 역시 국산차 특유의 가성비와 대세를 충실히 따른 상품성이 이름값을 하면서 국내외에서 적잖이 성공했습니다. 형제차 투싼과 비교하면 껍데기만 다른 같은 차였지만, 이미 익숙한 스포티지 브랜드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많았죠. 한때 판매량에서 수천 대 차이를 내면서 투싼을 압도하기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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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커먼레일 엔진을 장착한 일부 초기형 모델은 배출가스 5등급에 해당해 운행 제한 조치가 내려졌지만, 지금도 도로 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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