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간 이어진 긴 싸움이 끝났습니다. 네 번이나 유찰되며 파행을 거듭했던 조기경보기 2차 사업에서 한국 정부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보잉사는 자신들이 1차 사업을 수주했고, 미 공군도 자사 제품을 선택할 것이라는 이유로 "우리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9월 30일, 아직 실체조차 없는 L-3해리스사의 제안을 선택하면서 보잉에게 냉정한 퇴장을 통보했습니다.
올해 초 아파치 공격헬기 사업에 이어 또다시 한국 시장에서 쓴맛을 본 보잉사,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4번의 유찰, 보잉의 몽니가 부른 참사
조기경보기 2차 사업은 2020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1차 사업에서 이스라엘제 피스아이(Phalcon) 레이더를 탑재한 보잉 737 기반 조기경보기 4대를 도입했던 한국군은, 추가로 4대를 더 확보하려 했습니다.

당연히 보잉사는 자신들이 다시 선정될 것이라고 믿었죠. 하지만 문제는 가격이었습니다.
보잉사는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요구했습니다. 1차 때와 동일한 기종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어차피 우리 제품을 쓰고 있으니 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사업은 1차, 2차, 3차 유찰을 거듭했습니다.
보잉사는 4차 입찰에서는 아예 참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업비가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였죠.
하지만 보잉사는 내심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4차 사업마저 유찰되면 한국 정부가 결국 사업비를 올려서 자신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오만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보잉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실체도 없는데?" L-3해리스 선택의 배경
9월 30일 제171회 방위사업추진위원회가 개최되었고, 그 자리에서 L-3해리스사가 최종 선정되었습니다.
가장 유력했던 보잉사는 불참했고, 스웨덴 사브사와 L-3해리스만이 경쟁에 참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전문가들은 L-3해리스 선정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L-3해리스가 제안한 조기경보기는 아직 실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웨덴 사브사의 경우 이미 검증된 조기경보기를 운용하고 있었고, 보잉사 역시 여러 국가에 납품한 실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L-3해리스는 달랐습니다.
캐나다 봄바르디어사가 개발한 글로벌 6500 대형 비즈니스 제트기를 기체로 제안했고, 여기에 이스라엘이 개발한 장거리 다중대역 탐지 레이더를 통합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전체적인 시스템 통합은 L-3해리스가 담당하지만, 완성품이 아닌 '청사진'에 가까웠던 것이죠.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왜 이런 모험적인 선택을 한 걸까요? 답은 '기술 이전'과 '자주국방'에 있었습니다.
L-3해리스는 단순히 완성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방산업체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제시했습니다.
LIG넥스원과 대한항공 등 국내 업체들이 조기경보기 개발 사업에 참가해 기술을 배우고, 초기 2대는 협력 생산, 나머지 2대는 국내에서 완성하는 방안이었습니다.
보잉의 오만함, 아파치에 이어 또 실패
올해 초 보잉사는 이미 한 번 뼈아픈 교훈을 얻었어야 했습니다.
한국군이 1차 사업에서 아파치 공격헬기 36대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 도입 시에도 자신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죠.

그러나 한국 정부는 사업 전체를 취소해버렸습니다.
보잉사는 부랴부랴 한국에 임원을 파견해 한국 정부를 달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양측이 주장하는 사업비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아파치 추가 도입은 포기되었고, 한국군은 다른 대안으로 항공 전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보잉사가 이렇게 강경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기경보기 시장에서의 독점적 위치가 있었습니다.
경쟁자인 이스라엘과 스웨덴보다 더 큰 항공기에 최신 레이더를 통합했기 때문에 성능 면에서 자신들을 따라올 수 없다는 자신감이었죠.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결국 독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아직 실체도 없는 L-3해리스의 제안을 선택하면서 보잉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유지비 폭탄과 부품 부족, 보잉과 결별하는 이유
한국 정부가 보잉사와 결별을 결심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천문학적인 유지비용과 낮은 가동률이었습니다.
2013년부터 운영에 들어간 피스아이 조기경보기는 7년 동안 무려 3500억 원 이상의 유지비용이 추가로 들어갔습니다.

이는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죠.
더 큰 문제는 한국군이 미 공군이 운영하지 않는 상업 구매 방식으로 도입했기 때문에, 보잉사가 요구하는 대로 자금을 지불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부품 공급도 원활하지 않아 가동률이 크게 떨어졌고, 개량 사업 비용도 높게 책정되어 데이터 링크와 피아식별 장치를 교체하는 수준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더 이상 보잉사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기 위한 결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잉사는 계속해서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고, 방위사업청은 사업을 질질 끌면서도 계속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미 공군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기존 구형 조기경보기 수십 대를 보잉의 E-7 기종으로 교체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대량 생산으로 가격이 낮아져 FMS(대외군사판매) 방식으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죠.
하지만 최근 미 공군도 보잉사가 터무니없는 비용을 제시하자 E-7 도입을 포기하고 대형 민항기를 조기경보기로 개량하는 방안으로 선회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보잉사는 가장 큰 고객인 미 공군에게도 외면받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L-3해리스의 승부수, 기술 이전과 공동 개발
L-3해리스가 한국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가격만이 아니었습니다.
L-3해리스는 기술이전과 절충교역에서 매우 충실한 제안을 했습니다.
보잉사가 불성실한 제안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죠.
더 중요한 것은 L-3해리스가 제시한 비전이었습니다.

단순히 조기경보기 4대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협력해서 조기경보기를 포함한 다양한 공중 지원기를 함께 개발하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합동지상표적감시기, 전자전 기체, 정보수집기 등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방안까지 제시했죠.
이스라엘이 개발한 조기경보용 레이더는 450km까지 탐지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 보잉사의 조기경보기와 비슷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항공기뿐 아니라 탄도미사일까지 추적할 수 있는 다양한 모드를 가지고 있어 수출 시장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제품입니다.
한국군이 지상에서 운영하는 그린파인 장거리 레이더의 공중형 버전이라고 할 수 있어, 보잉사보다 더 진보된 기술이 적용될 수 있다는 평가입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이 통합 기술을 확보하면 향후 국내에서 개발된 새로운 레이더로 교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통합 기술뿐 아니라 유지보수와 개량 사업에서도 한국이 주도권을 가질 수 있어, L-3해리스 선정이 장기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독자 개발도 가능했지만... 현실적 선택
사실 한국은 조기경보기를 독자 개발할 수 있는 기술 기반을 상당 부분 갖추고 있습니다.
이미 백두와 금강 정찰기를 자체 기술로 완성했고, 프랑스 다쏘사의 팰컨 항공기를 도입해 국산 전자전 장비를 통합해 전력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화시스템은 전투기에 들어가는 AESA 레이더를 개발했고, KF-21에 탑재될 신형 레이더도 설계했습니다.
LIG넥스원은 장거리 조기경보기용 지상 레이더를 완성해 공군에 배치했으며, 거의 모든 종류의 레이더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독자 개발하지 않고 L-3해리스와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을까요? 핵심은 '시스템 통합 기술'에 있습니다.
공중에서 운영되는 대형 레이더를 항공기에 통합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입니다.
아무리 고성능 시스템을 개발해도 다양한 전자 장비를 제대로 통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죠.
조기경보기는 다양한 대역대의 레이더가 함께 통합되며, 전방과 측방, 후방에 레이더를 장착해 운영합니다.
이를 하나의 통합 감시 체계로 만드는 기술을 한국이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입니다.
전투기에 장착되는 레이더보다 수백 배 큰 대형 레이더를 운영하면서 전방과 측후방 레이더를 추가하고, 이를 완벽하게 통합할 수 있는 기술은 미국에서도 보잉과 레이시온, L-3해리스 정도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L-3해리스와의 협력을 통해 이러한 노하우를 습득하고, 향후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조기경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전략입니다.
보잉사에서 도입한 피스아이 조기경보기는 최대한 장기 운영한 후 개량 없이 퇴역시키고, L-3해리스와의 협력으로 얻은 기술을 바탕으로 완전한 국산 조기경보기 시대를 열겠다는 구상입니다.
F-15K부터 아파치까지, 무너지는 보잉 왕국
5년 동안 몽니를 부렸던 보잉사가 예상하지 못한 결정에 직면하면서 한국 시장에서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F-15K 전투기, 조기경보기, 아파치, 치누크 헬기 등 한국 방산 시장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보잉사의 전성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죠.
보잉사가 빠진 4차 사업에서도 유찰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최종적으로 L-3해리스를 선정하면서 보잉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오만한 태도로는 더 이상 한국 시장에서 장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L-3해리스사는 그동안 우주, 항공, 미사일, 통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광학 장비에서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했지만, 보잉사가 독점하던 조기경보기 시장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 공군도 E-7 사업을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추진하면서 시장 판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장 중 하나인 한국에서 선택받으면서 L-3해리스는 자신들도 대형 항공기 시스템 통합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 시장에 증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도 사브사가 개발한 조기경보기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보잉사의 시장 점유율은 앞으로 더욱 하락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때 F-15K로 한국 전투기 시장을 평정했고, 조기경보기와 공격헬기까지 독식하던 보잉 왕국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과연 보잉사는 이번 교훈을 통해 태도를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면 계속해서 오만함으로 더 많은 시장을 잃게 될까요?
한국의 선택이 세계 방산 시장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