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㊶LG 트윈스 신바람 우승과 LG 그룹명 변경 이야기

“선수 이름 맞히기 게임 해볼까요?”
1995년 3월 6일 저녁. 일본 오키나와의 가스가호텔 6층 식당에서 LG 트윈스 구본무 구단주가 즉흥적으로 내기게임을 자청했다.
구본무 구단주는 그해 2월 22일 LG그룹의 제3대 회장으로 공식 취임해 그룹사 업무보고를 받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몸소 LG 트윈스의 오키나와 스프링캠프까지 찾아와 선수단 휴식일인 이날 회식을 베풀며 노고를 치하했다.
소줏잔이 몇 순 배 돌고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사이, 회장님이 뜬금없이 선수 이름 맞히기 게임을 제안하는 게 아닌가.
이날 회식에 참가한 선수는 총 40명.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기에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선수 얼굴과 이름을 꿰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두 속으로 ‘몇 명이나 맞히실까?’ 궁금해하며 회장님을 주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름을 알아맞히지 못한 선수는 단 3명뿐. 모두 신인급 선수였다. 나머지 37명의 선수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니, 내 이름까지 어떻게 아시지?’
선수들은 모두 놀랐다. 입단 4년생 차명석(현 LG 트윈스 단장)도 그렇게 놀란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무명이나 백업 선수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싱글벙글했다.
그만큼 LG 트윈스에 대한 구본무 회장의 애정과 관심이 각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일화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41번째 주제는 1995년 럭키금성이 LG로 그룹명을 바꾸며 제2의 창업을 선언한 사연과 구본무 구단주의 제3대 그룹 회장 취임, 1994년에서 1995년으로 넘어가는 LG 트윈스의 과도기에 관한 이야기다.

◆럭키금성에서 LG그룹으로!
『럭키금성그룹이 새해부터 ‘LG그룹’으로 그룹 명칭을 바꾸고 제2의 경영혁신을 선포했다. 구자경 회장은 3일 그룹 시무식에서 LG로의 그룹명칭 개정을 발표하고, ‘95년을 세계 최고를 가시화해 나가는 제2 경영혁신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1995년 1월 4일자 조선일보>
1994년 LG 트윈스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뒤 이듬해인 1995년 신년 벽두부터 럭키금성 그룹은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월 1일자로 그룹 및 계열사의 명칭을 LG로 변경하고 그룹 심벌마크를 제정하는 등 새로운 CI(Coporate Identity·기업이미지 통합)를 추진키로 했다. 그리고 2월 22일 구자경 그룹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장남 구본무 부회장이 제3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LG그룹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바로 ‘LG’라는 이름은 ‘LG그룹’보다 프로야구단 ‘LG 트윈스’가 5년 먼저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90년 창단한 ‘LG 트윈스’로 인해 럭키금성 그룹명이 1995년 ‘LG그룹’으로 자연스럽게 바뀔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우리 그룹은 명칭이 여러 개로 혼용되고 있었어요. 해외 시장에서도 럭키 계열은 ‘Lucky’, 금성사는 ‘Goldstar’로 돼 있었고, 둘을 합친 럭키금성은 ‘Lucky Goldstar’로 돼 있었죠. 그룹 내부적으로 내수 시장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기 위해서라도 그룹명을 바꿔야한다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이규홍 전 LG 트윈스 사장(2019~2021년)의 말이다. 이규홍 사장은 과거 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구본무 부회장 시절부터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인물이다.
“홍콩 등 해외 시장에 나가 보면 일본의 파나소닉(Panasonic)과 함께 우리 이름이 유난히 길었어요. 간판 하나를 달아도 ‘Lucky Goldstar’는 알파벳이 13자나 되잖아요. 돈도 많이 들고 외우기도 힘들었죠. 그래서 1995년 그룹명을 LG로 바꾸게 된 겁니다.”

당시 한화그룹(종전 한국화약그룹) 등 몇몇 그룹이 명칭을 변경하기도 했지만 그룹 명칭을 영문으로 바꾼 것은 그해 LG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신선함과 함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룹명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럭키금성을 버리고 생소한 ‘LG’라는 이름으로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반발도 많았다.
하지만 구본무 회장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도 쉽게 사용될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하다”며 그룹명 변경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LG그룹의 과감한 변신 이후 1998년 선경그룹이 ‘SK’로 그룹명을 바꾸는 등 각 기업들이 세계화를 위해 영문 약자로 변경하는 유행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선경’은 영문으로 ‘Sunkyoung’으로 표기했는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데다 ‘Sunk young(젊음이 가라앉다)’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 변화를 모색한 케이스였다.

◆‘LG 트윈스’ 때문에 ‘LG그룹’으로 변경?…오해와 진실
물론 전적으로 1994년 LG 트윈스 우승으로 인해 1995년부터 그룹명이 LG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럭키금성은 그룹명 표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1984년 희성산업에서 분리독립한 광고대행사 ‘엘지(LG)애드’가 그룹 내에서 가장 먼저 ‘LG’를 사용하는 등 일부 계열사에서 LG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엔 ‘럭키금성’과 ‘LG’를 동일한 그룹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러던 상황에서 1990년 프로야구단 MBC 청룡을 인수하면서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됐다.
[엘팬알백] ③편에서 소개했듯이 당시 프로야구단 이름을 사내 공모 절차를 통해 그룹의 상징물인 여의도 쌍둥이빌딩과 연결해 ‘LG 트윈스’로 정했는데 이는 ‘신의 한 수’가 됐다.

LG 트윈스는 1990년 프로야구에 뛰어들자마자 서울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중계방송과 뉴스, 신문에서 연일 ‘LG 트윈스’를 언급했고, 팬들도 “LG! LG!”를 연호했다. 별도의 광고도 없이 ‘LG=럭키금성’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해 나갔다.
이에 고무된 그룹은 프로축구 ‘럭키금성 황소축구단’도 1991년부터 ‘LG 치타스’로 변경하는 등 그룹 스포츠단 이름을 하나씩 LG로 바꿔나갔다.
계열 광고사인 LG애드가 그룹의 이미지통합(CI)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94년 4월. 작업 시한은 그해 연말까지였다. 코카콜라, 제너럴일렉트릭(GE) 등의 CI 작업을 맡은 미국의 랜도사에 그룹을 상징하는 새 심벌마크와 로고 제작을 의뢰한 상태였다.
그러는 와중에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와 ‘신바람야구’가 1993년에 이어 1994년 빅히트를 쳤다. 2년 연속 100만 관중으로 흥행에 성공하고, 1994년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었다.

“사실 그룹명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LG로 변경된다’고 얼마나 많은 광고를 해야 일반인들의 인식이 바뀌겠습니까. 일반 소비자에게 스며들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잖아요. 그런데 LG 트윈스가 그 역할을 대신한 거죠. 신문과 방송에서 계속 ‘LG’라고 보도하고, 팬들도 계속 ‘LG’라 불러주고…. 광고도 없이 자연스럽게 럭키금성이 LG로 인식된 거죠.”
이규홍 사장의 말이다. 그는 웃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LG 트윈스 때문에 럭키금성 그룹명이 LG로 바뀐 것은 아니지만, LG 트윈스 덕분에 럭키금성이 LG그룹으로 스무스하게 넘어가게 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LG 트윈스가 1990년부터 1994년까지 LG의 그룹명 변경에 첨병 역할을 한 셈이었죠.”

◆LG 트윈스의 성공 방식을 LG그룹 경영 방식으로
앞서 설명한 대로 1995년에 그룹명만 LG로 바꾼 게 아니었다. 2월 22일 그룹 사옥인 트윈타워(쌍둥이빌딩)에서 구본무 그룹 부회장이 제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에 이어 1970년부터 제2대 회장을 맡아온 구자경 회장은 이날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LG그룹은 메이저 그룹으로는 처음으로 3세 경영체제로 들어서면서 한층 더 젊고 진취적인 기업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이는 1994년 신인 삼총사가 등장하면서 젊고 활기 넘치는 팀으로 변모한 LG 트윈스의 팀컬러와 일맥상통했다.
또한 구본무 회장은 취임사에서 ‘초우량 LG’, ‘강한 LG’, ‘고객 감동’을 강조했다. 이 역시 당시 5년 만에 2차례나 우승을 차지하며 ‘초우량 팀’으로 거듭난 LG 트윈스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었다.

구본무 회장은 취임식 직후 트윈타워 3층 이벤트홀에서 각 언론사 경제부 출입 기자단과 오찬을 겸한 기자회견을 갖고 향후 경영계획과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 이때도 야구 이야기가 등장했다.
“야구단 운영 경험이 있는데 야구단은 감독이 가장 잘 알고 야구선수들이 신바람 나야 제대로 합니다. 윗사람이 책에서 읽은 약간의 지식으로 간섭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깁니다. 현장 경영도 마찬가지로 현장에 있는 분들이 신바람 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야구단의 성공 방식을 LG그룹 경영에 그대로 대입하겠다는 뜻이었다.
LG 트윈스의 성공은 이처럼 그룹명의 변경뿐만 아니라 LG그룹 전반적인 경영 방향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심재학 1차지명과 고졸 슬러거 조현 입단…1995년을 위한 준비
LG는 1994년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으로 ‘무적 LG’ 시대를 만들었다. 투타는 물론 수비와 주루까지 완벽에 가까운 전력을 구축해 상대팀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LG는 1995년을 앞두고 아마추어 최대어들을 연이어 잡으면서 LG 왕조를 꿈꾸기 시작했다.
먼저 LG와 OB는 예년에 비해 1차지명 시기를 앞당겨 8월 29일 서울지역 1차지명 우선권을 가렸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각각 1차지명을 원하는 선수 이름을 적은 편지봉투를 교환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1994년에는 LG가 류지현, OB가 류택현으로 갈려 그대로 1차지명으로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봉투 개봉 결과 양 팀 모두 ‘심재학’의 이름을 써 넣었기 때문이다.

고려대 4학년 심재학은 서울지역 대졸 선수 중 최대어로 평가받는 좌타 슬러거. 충암고 시절 투타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고교 3학년 시절 이미 성인 국가대표 중심타자로 발탁될 정도로 천부적인 타격 재능을 발휘한 선수였다. 대학 4년 동안 3차례나 전국대회 MVP를 수상했고, 대학 통산 홈런도 24개나 됐다.
결국 최후의 수단인 ‘주사위 던지기’에 돌입했다.
LG에서는 1993년 이상훈을 잡은 ‘신의 손’ 유지홍 스카우트가 주사위 던지기 선수로 나섰다. OB에서는 새롭게 양승호 스카우트(훗날 롯데 자이언츠 감독)가 등판했다.
2개의 주사위를 3차례씩 던진 결과 20-13으로 LG의 압도적 승리. 1차 시도에서는 6대6 동점으로 긴장감을 높였지만, 2차시도에서 LG가 10-2로 앞섰고, 3차시도에서 4-5로 뒤졌지만 총점에서 LG가 여유있게 이겼다.
우선권을 잡은 LG는 곧바로 심재학을 호명했고, OB는 어쩔 수 없이 심재학과 충암고 동기인 송재용(건국대 우완투수)을 1차지명으로 선택했다.
충암고는 1990년 야구부 창단 후 최초의 2관왕(대통령배, 황금사자기 우승) 신화를 쓴 바 있다. 당시 3학년 심재학 송재용 이원식에 2학년 포수 최기문이 주축 선수였다. OB가 1차지명한 송재용 또한 기대주이긴 했지만, LG가 획득한 심재학에 비할 수는 없었다.
심재학은 당시 실업팀으로 창단한 현대 피닉스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LG는 심재학의 마음을 붙잡는 데 성공하면서 11월 3일 역대 대졸 야수 최고 계약금인 2억1000만원을 안기며 성대한 입단계약식을 했다.

LG가 기대한 건 심재학뿐만 아니었다. 초고교급 파워히터로 평가받은 신일고 우타 거포 외야수 조현도 함께 잡았다.
김재현의 신일고 1년 후배인 조현은 2학년 때인 1993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만 홈런 3방을 날리며 대회 타격상(0.667·15타수 10안타), 타점상(17), 최우수선수상 3관왕을 휩쓸었다. 2학년 때 기록한 홈런만 무려 17개. 타율 0.413을 기록해 이영민 타격상까지 수상하면서 ‘천재타자’로 일찌감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3학년 때인 1994년 타율 0.333에 홈런 4개로 전년도만 못한 성적을 올렸지만, LG는 심재학 계약 이틀 전인 11월 1일에 조현과 계약금 1억1500만 원, 연봉 2000만 원의 조건에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1년 전 김재현(9100만 원)을 넘는 고졸 신인 최고 계약금이었다.
(한 달 뒤 경북고 이승엽이 삼성과 계약금 1억3200만 원에 사인하면서 2위로 밀려났다.)
야구계는 조현의 프로 무대 성공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고졸 신인 김재현이 1994년 20-20 클럽을 세우며 프로야구 무대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LG는 1994년 우승 당시 좌익수 김재현-중견수 노찬엽-우익수 박준태로 주전 외야수를 구성했다. 최훈재와 김영직도 외야 백업요원으로 활약했다.
여기에 심재학과 조현이 가세한다면 LG는 외야 경쟁부터 그야말로 ‘박 터지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초호화 라인업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구단 역사상 최초! 이광환 감독 3년 재계약
LG는 11월 5일 이광환 감독과 3년 재계약을 했다. 계약금과 연봉 8000만 원씩, 총 3억2000만 원의 조건이었다. 이때만 해도 8개 구단 중 최고 대우였다. 며칠 후 해태 김응용 감독이 3억4000만원(계약금 1억원, 연봉 8000만원)에 3년 재계약을 하면서 이광환 감독은 2위가 됐다.
사실 LG는 전신 MBC 청룡 시절부터 감독 재계약과는 거리가 먼 구단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재계약 사례라면 1986년 말 MBC 김동엽 감독의 1년 연장 계약. 하지만 김동엽 감독은 당시 선수들을 혹독하게 다루고 각종 기행을 일삼으면서 물의를 빚어 구단에서 ‘시험기를 둔다’는 의미로 1년 연장 계약을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김동엽 감독은 별도의 계약금 없이 동결된 연봉(3500만 원)에 사인했는데 결국 한 시즌을 완주하지 못한 채 1987년 7월 중도 퇴진을 하게 됐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광환 감독의 3년 계약은 구단 역사상 온당한 평가를 받고 재계약한 사실상 최초의 사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감독은 1992시즌을 앞두고 LG 지휘봉을 잡으면서 “3년 안에 우승을 시키겠다”고 말한 바 있는데 1993년 플레이오프 진출에 이어 1994년 그 약속을 지켰다.
이 감독이 부임한 뒤 트윈스 야구는 LG그룹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과물을 도출했다. 단순히 우승을 이뤄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광환식 야구는 한국프로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창의력과 도전정신에 바탕을 둔 자율야구, ‘스타 시스템’을 통한 투수 분업화로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신인 삼총사의 과감한 기용으로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했고, 신구 조화와 다채로운 야구색깔이 어우러지는 융복합의 야구로 ‘무적 LG’ 시대를 만들었다.
야구장에 ‘오빠부대’가 진을 치는 진풍경이 펼쳐지면서 술 취한 아저씨 팬들이 점령해 온 KBO리그 관람문화에 컬처 쇼크를 던져줬다.
이런 신명나는 분위기 속에 LG 트윈스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2년 연속 100만 관중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LG그룹의 모태는 1947년 설립된 락희(樂喜)화학공업사. 사명에는 ‘고객에게 즐겁고(樂) 기쁜(喜) 경험을 주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1994년 정점을 찍은 ‘신바람 야구’는 고객인 LG 팬들에겐 최고의 즐거움이요 기쁜 경험이었다. 당시 역사의 현장을 지켜 본 LG 팬들은 그래서 최고의 황금기 1994년의 LG 야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LG로선 그룹 이미지를 격상시키고 한국프로야구에 새로운 솔루션을 제시한 이광환 감독에게 재계약과 최고 대우를 해주는 게 마땅했다.

◆1994 골든글러브 5명 수상…구단 역사상 최다
1994년 연말을 기억하자면 골든글러브 시상식도 빼놓을 수 없다. LG 구단 역사상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최다 수상자 배출의 역사를 썼기 때문이다.
LG는 12월 11일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포수 김동수부터 1루수 서용빈, 2루수 박종호, 3루수 한대화, 외야수 김재현에 이르기까지 총 5명의 주인공을 내놓았다.
‘캐넌히터’ 김재현은 KBO 고졸신인 최초 황금장갑 수상의 역사를 썼다. 유효표 207표 중 187표(득표율 91%)를 획득했다. 그해 MVP 해태 이종범에게 1표 차로 뒤져 아쉽게 최다득표 2위가 됐을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또 다른 신인 서용빈도 1루수 황금장갑을 품에 안았다. 신인 삼총사 중 유격수 유지현이 이종범이라는 큰 산에 밀려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이었다.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한 포수 김동수는 규정타석에 미달됐지만 101표를 얻어 99표의 김동기(태평양)에게 2표 차이로 앞서 최소표차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90년, 1993년에 이어 개인 3번째 수상으로 명실상부한 1990년대 KBO리그 최고의 안방마님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2루수 박종호는 KBO 역사상 최초의 스위치히터 골든글러버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해 신인 삼총사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적으로 비춰졌지만, 고졸 3년생 박종호 역시 깔끔한 외모와 공수주에 걸친 잠재력을 드러내며 LG 야수진의 세대교체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여기에 ‘미스터 LG’ 김상훈을 해태에 주고 데려온 ‘해결사’ 한대화는 6년 연속 3루수 부문 수상의 기록을 세우며 개인통산 8번째 황금장갑을 받았다.
LG는 그 이후 2001년 3명(투수 신윤호, 외야수 이병규, 지명타자 양준혁), 2023년 3명(1루수 오스틴, 유격수 오지환, 외야수 홍창기)을 배출했지만 1994년의 5명을 넘어서지 못했다. 2025년에는 우승을 하고도 1명(2루수 신민재)의 주인공만 내놓았다.
골든글러브 수상자만 보더라도 1994년 LG 트윈스의 멤버 구성과 그해 LG 야구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구본무 회장이 선수 이름을 다 외운 비결
다시 이야기를 1995년 3월초 오키나와 스프링캠프로 되돌려 보자. 구본무 LG그룹 신임회장이 오키나와 회식 자리에서 선수 40명 중 무려 37명이나 이름을 알아맞힌 그날의 후일담이다.
회식 자리에 참석한 LG스포츠 강정환 사장과 어윤태 단장은 물론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모두 깜짝 놀라는 건 당연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투수 차명석을 비롯해 회장님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감동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당시 LG 트윈스 최종준 수석부장(1995년 12월 단장으로 승진)은 이렇게 술회했다.
“회장님께서 야구를 워낙 좋아하시니 주전 선수들을 아시는 건 특별할 게 없는 일이지만, 백업 선수나 유망주들까지 얼굴만 보고도 이름을 척척 다 맞히시니 다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죠. 특히 선수들이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으면 웬만한 야구 관계자들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잖아요. 그만큼 회장님은 야구단에 애정이 크셨어요. 그날 이상훈이 기타를 치고 다른 선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분위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최종준 전 단장의 설명처럼 구본무 회장의 야구 사랑은 대단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어떻게 40명의 선수 중 37명의 이름을 다 맞힐 수 있었을까.

이규홍 전 사장은 이에 대해 “비결이 있었다”며 숨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사실 회장님께서 선수 이름 외우시느라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평소 ‘구단주가 돼 가지고 우리 선수를 몰라 되겠느냐’라면서 ‘선수와 마주칠 때 이름이라도 불러주고 싶으니 선수 카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그래서 매년 선수 얼굴, 이름, 생년월일, 키, 몸무게, 출신학교, 기록 등이 들어간 카드를 제작해 드렸죠. 선수당 3장씩 만들었어요. 하나는 회장님 집무실 책상에, 하나는 차에, 하나는 집에 두고 수시로 그걸 꺼내 보면서 선수 이름과 얼굴을 외우셨어요. 그래서 오키나와 회식 자리에서 선수 이름을 거의 다 맞히셨던 겁니다.”
구본무 회장은 회식 이후 귀국하는 길에 “다음 우승 때 이 술로 축배를 들자”며 아와모리 소주 3통을 직접 구매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1995년 가을에도 우승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항아리 술이 모진 세월을 견디며 그토록 뚜껑조차 열기 힘든 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편 LG 트윈스 선수단은 3월 12일 36일간의 오키나와 스프링캠프를 마치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1995년 시범경기 개막을 준비했다.
[엘팬알백] ㊷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