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 경매가 ‘현대판 다빈치’ 그들은…흑수저·동성애자·공대생·아랍왕자

자신만의 성조기부터 거울토끼, 운동장 캔버스 등 파격적 예술혼에 글로벌 큰손들 열광
[사진=Stockcake]

2000년대 들어 미술작품 경매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낙찰되는 작품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1000억이 넘는 가격에 팔린 작품 중 상당수는 “이게 예술인가”라는 의문 문호가 떠오르게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작가들의 ‘도전 정신’에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셈이다. 또 다른 공통점 중 하나는 작품이 공개와 동시에 즉시 가치 평가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작가의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사후에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던 과거와는 분명이 다른 모습이다. 빨라진 사회 변화 속도, 부쩍 커진 새로움에 대한 갈망 등 현대사회의 특징이 예술품의 평가 기준에도 녹아든 것으로 분석된다.

성조기·토끼 그림 경매가가 1000억, ‘월스트리트 큰 손’의 눈 사로잡은 작가의 비결

지난 2010년 미술품 경매에서 성조기가 그려진 그림이 무려 1억1000만달러(한화 약 1370억원)에 팔렸다. 작품의 정체는 미술의 미술가 재스퍼 존스가 40여 점 이상 제작한 ‘Flag’ 시리즈 중 1958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작품 구매자는 ‘월가의 큰 손’이라 불리는 해지펀드 매니저 스티븐 코헨이었다.

‘Flag’ 시리즈는 1954년 존스가 꿈에서 본 미국 국기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기 시작한 작품이다. 재스퍼 존스는 1955년 ‘흰 깃발’을 시작으로 1958년 ‘세 개의 깃발’까지 같은 주제로 각기 다른 작품을 그렸다. ‘Flag’ 작품 내용과 표현 방식에서 독특한 대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쉽게 말해 누구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미국 국기를 작가만의 표현 방식으로 재구성해 그린 것이다.

1930년 5월 15일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 태어난 존스는 부모의 이혼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부모와 함께 자랐다. 그는 다사다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유일하게 접한 미술 작품은 할머니가 그린 풍경화가 전부였을 정도로 가난했다. 또 1939년 할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어머니와 새아버지와 1년을 보냈고 이후 6년간 이모와 머레이 호수에서 생활했다.

▲ 재스퍼 존스가 40여 점 이상 제작한 ‘Flag’ 시리즈 중 1958년 작품이 미술 시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했다. 사진은 재스퍼 존스(왼쪽)와 1370억원에 판매된 1958년 작 'Flag'. [사진=Jasper jones, 기네스월드레코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47년 에드먼즈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입학해 3학기 동안 미술을 공부했다. 이후 교수들의 지원을 받아 뉴욕으로 이주해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입학했다. 1951년엔 한국전쟁에 징집돼 포트 잭슨과 일본 센다이에서 2년간 복무했다. 군 제대 후 1953년 여름 뉴욕으로 돌아온 재스퍼 존스는 출판사인 ‘마보로북스’에서 일하며 당시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던 주요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팝아트의 거장으로 익히 유명한 로버트 라우센버그와는 동성연애를 하는 동시에 예술적 동반자 관계를 맺기도 했다. 당시 존스는 라우센버그로부터 사물에 대한 접근 방식과 다양한 표현 기법 등을 전수 받았다. 1954년 존스는 자신의 기존 작품들을 모두 파기하고 국기, 지도, 과녁, 문자, 숫자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7년 첫 개인전에 전시된 작품 18점 중 16점이 팔리며 단숨에 스타작가 반열에 오르게 됐다.

당시 존스가 스타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독창성’이었다. 그는 평평한 도화지에 입체적인 요소를 가미했는데 당시 미술계에선 존스의 작품을 두고 회화와 팝아트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60년 롱아일랜드의 유니버설 리미티드 아트 에디션스(ULAE)의 설립자 타티야나 그로스만의 초청으로 판화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ULAE에서 180개 이상의 에디션을 출판하며 다양한 판화 기법으로 기존 구성을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존스의 도전적인 실험정신에 전 세계가 열광했다. 그는 1969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로부터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8년 제43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국관 전시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1990년 미국 국립예술훈장을 받았으며 2011년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받았다. 존스는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코네티컷 샤론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사후 축구장 약 96개 (170에이커, 68만7966㎡) 규모의 부지를 예술가들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계획도 밝힌 상태다.

▲ 제프쿤스의 ‘Rabbit’은 약 1184억원에 팔려 생존작가 최고가 2위를 기록했다. 사진은 제프 쿤스(왼쪽)와 1985년 제작된 Rabbit. [사진=제프 쿤스]

해지펀드 매니저 ‘스티크 코헨’이 거액을 주고 매입해 화제가 됐던 또 다른 작품은 미국의 현대 미술가 ‘제프 쿤스’의 ‘Rabbit’이다. 2019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9110만 달러(약 1184억 3000만원)에 낙찰됐다. 1986년 제작된 ‘Rabbit’은 장난감 풍선 토끼를 스테인리스 스틸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높이 104cm의 이 작품은 거울처럼 광택 나는 표면이 특징이다. 3개의 에디션과 1개의 작가 소장본이 제작됐다. 2개의 에디션은 시카고 현대미술관과 브로드 미술관에 각각 보관돼 있다. 스티브 코헨이 낙찰받은 에디션은 원래 미국 출판계의 거물 S.I. 뉴하우스의 생전 소장품이다.

현대미술 시장에서 가장 높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가로 평가되는 ‘제프 쿤스’는 1955년 1월 2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요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사업적 감각을 동시에 익혔다. 9살 때부터 아버지의 가구점 쇼윈도에 자신의 모작을 전시했고 방과 후에는 선물 포장지와 사탕을 팔았다. 메릴랜드 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시카고 예술학교로 진학한 쿤스는 이곳에서 평생의 스승이 될 미국의 유명 현대미술가인 ‘에드 파슈케’를 만났다. 1970년대 후반 파슈케의 스튜디오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

1977년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현대미술관(MoMA) 멤버십 데스크에서 근무하며 예술계의 흐름을 관찰했다. 당시 그는 우상이었던 스페인의 유명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를 따라하기 위해 붉은 머리에 연필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1980년대 초반에는 월스트리트 증권브로커로 일했고 이후 자신만의 작업장을 운영하게 됐다. 이후 그는 대중적이고 값싸며 통속적이라 여겨지던 ‘키치(kitsch)’ 문화를 고급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며 현대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 특히 사업적인 감각을 발휘해 예술작품 대량 생산 체제에도 도전했다. 한 때 120명의 조수를 뒀으며 2019년 이후에는 자동화 시스템까지 도입했다.

그는 예술계를 넘어 다른 분야에도 진출했다. 루이비통과의 협업으로 명화를 프린트한 가방을 제작했고 레이디 가가의 앨범 커버를 디자인했다. 2024년에는 SpaceX와 협력해 125개의 달 조각상을 우주로 보내는 파격적인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그의 영토 확장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뉴욕과 펜실베이니아를 오가며 작업하는 쿤스는 NFT 등 새로운 매체로의 영역 확장을 시도 중이다. 그의 작품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됐으며 주요 컬렉터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동성애’ 취향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 구현한 영국 미술의 대표주자 ‘데이비드 호크니’

▲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은 9030만 달러(약 1173억 9000만원)에 낙찰되며 생존 작가 최고가 기록 3위를 세웠다. 사진은 데이비드 호크니(왼쪽)와 1972년 제작된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사진=데이비드 호크니]

지난 201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데이비드 호크니가 1972년 제작한 대표작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이 9030만 달러(약 1173억 9000만원)에 낙찰됐다. 생존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 중엔 세 번째로 높은 금액이었다. 구매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1972년 완성된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는 호크니의 작업 방식을 집대성한 걸작으로 불린다. 수영장 가장자리에 서있는 분홍색 재킷 차림의 남성과 물속에서 수영하는 인물을 대비시킨 이 작품은 물의 표면과 깊이 빛의 반사와 굴절을 탐구한 형식적 실험이자 사랑과 이별이라는 작가의 서사를 담은 자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20-21세기 영국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불리는 호크니는 1937년 영국 요크셔주 브래드퍼드에서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회계사였던 아버지 케네스와 독실한 감리교도이자 채식주의자였던 어머니 로라 사이에서 자란 그는 브래드퍼드 예술대학과 런던 왕립예술학교 등을 거치며 일찍감치 재능을 인정받았다. 호크니는 196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팝아트와 입체주의를 접목한 독자적 화풍을 구축하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등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23세에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호크니는 동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월트 휘트먼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We Two Boys Together Clinging’(1961)은 당시 사회적 금기를 예술로 승화한 대표적 작품이다. 1964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후 그의 예술세계는 더욱 확장됐다.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살과 현대적 생활양식, 특히 수영장이라는 소재는 그의 작품 세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선명한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수영장은 ‘현대성의 상징’으로 평가 받았다.

1980년대에 호크니는 ‘조인터(jointers)’라는 독특한 사진 콜라주 기법을 개발해 다시 한 번 미술계의 조명을 받았다. 한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패치워크처럼 조합하는 이 방식은 단일 시점의 사진이 포착할 수 없는 인간 시각의 복합성을 표현하려는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호크니는 현재 노르망디에 거주하며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아이패드를 활용한 디지털 아트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또 2018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디자인하는 등 예술적 실험도 꾸준히 전개 중이다.

‘컴퓨터 전문’ 공대 출신의 디지털 예술가 ‘비플’, 작품 안파는 중동 금수저 ‘샤샤 자프리’

▲ 비플의 작품은 4만 2329이더리움, 약 6930만달러(약 901억원)에 낙찰됐다. 사진은 비플과 2007년 5월 1일부터 5000일 동안 제작한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사진=비플, 크리스티]

지난 2021년 3월 11일 크리스티 온라인 경매에서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본명 마이클 조셉 윈켈만)’의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가 4만2329이더리움, 당시 화폐 가치로 약 6930만달러(약 901억원)에 낙찰됐다. 디지털 아트 최고가이자 온라인 경매 최고가였다. 생존 작가의 전체 예술품 경매 기록에서는 4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크리스티 최초의 순수 NFT 작품 판매이자 가상 화폐인 이더리움으로 지불 가능한 첫 경매에는 약 2200만 명이 참여했다. 최종 낙찰자는 싱가포르 NFT 운용사 메타퍼스(Metapurse)의 창업자 메타코반(Metakovan)으로 밝혀졌다.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는 작가가 2007년 5월 1일부터 2021년 1월 7일까지 5000일 동안 매일 제작한 디지털 이미지들을 콜라주(이어 붙인) 작품이다. 멀리서 보면 디지털 세계의 노이즈를 연상시키는 픽셀화 된 이미지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5000개의 각기 다른 이미지로 돼 있다. 대중문화와 정치적 인물들을 활용해 풍자의 성격까지 지닌 작품은 메타버스 내 가상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1981년 6월 20일 위스콘신주 노스 폰드 뒤 락에서 태어난 비플은 전기 엔지니어 아버지와 노인복지센터에서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2003년 퍼듀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예술과는 동 떨어진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우연한 계회로 접한 디지털 드로잉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후 2017년 매일 하나씩의 작품을 완성해내는 ‘Everydays’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스케치 아티스트 ‘톰 주드’의 1년간의 드로잉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업은 디지털 드로잉 실력 향상을 위한 연습으로 시작됐으나 결혼식이나 자녀 출산 당일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강한 집념으로 발전했다.

그의 명성은 2020년 NFT의 인기와 함께 부쩍 높아졌다. 니프티게이트웨이(Nifty Gateway)를 통해 처음으로 3점의 NFT 작품을 판매했는데 4개월 만에 처음 판매가의 10배 오른 가격에 재판매 돼 화제가 됐다. 당시 판매된 작품 중 ‘POLITICS IS BULLSHIT’은 미국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가 성조기를 두르고 달러 지폐가 쏟아지는 가운데 변을 보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다. 최근에는 ‘TIME: The future of Business’가 2024년 1월 30일 소더비 경매에서 17만7800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HUMAN ONE’이라는 7피트 높이의 조각 작품은 2021년 11월 9일 크리스티 경매에서 2895만 8000달러에 팔렸다.

▲ 샤샤 자프리의 작품은 6200만 달러(약 806억원)에 낙찰돼 생존 작가 작품 중 5위를 기록했다. 사진은 샤샤 자프리(왼쪽)와 2020년 제작된 ‘Journey of Humanity’. [사진=샤샤 자프리)

2021년 두바이 자선 경매에선 영국 예술가 샤샤 자프리(Sacha Jafri)의 대표작 ‘Journey of Humanity’가 6200만 달러(약 806억원)에 낙찰됐다. 생존하는 작가의 작품 중 다섯 번째로 높은 가격이다. 초기에는 3000만 달러에 판매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두바이의 암호화폐 사업가 앙드레 아브둔이 전체 작품을 예상가의 두 배 이상의 가격에 구매했다. 경매 수익금 전액을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당시 행사의 취지 덕분이었다.

‘Journey of Humanity’는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한 2020년 1월 작가가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재연결 되도록 영감을 주고 싶다”는 취지로 시작한 프로젝트 성격의 예술 작품이다. 두바이 아틀란티스 호텔 연회장을 작업실로 삼아 70개의 천을 바닥에 깔고 매일 20시간씩 7개월 동안 작업했다. 캔버스 크기만 1만7000 평방피트(약 1600㎡)에 달해 ‘세계 최대 아트 캔버스’로 기네스에 등재되기도 했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1400갤런의 물감과 1000개 이상의 붓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영국에서 태어난 사샤 자프리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대형 회화 작품으로 전 세계의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파키스탄 외교관의 아들이자 아와드 나왑 왕가의 후손인 그는 영국의 명문 이튼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 러스킨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2000년 영국 화가상 수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를 중심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중동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발돋움했다.

그는 특히 명상 상태에서 2년에 12점 가량의 작품만 제작하고 작품 구매 요청의 99%를 거절하는 것으로 익히 유명하다. 그럼에도 전 세계 유명인들의 그의 작품에 열광하고 있다. 그의 작품 구매를 위해 약 150명 가량이 대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빌 게이츠 MS 창업주,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 유명MC 오프라 윈프리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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