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서서 잘까, 누워서 잘까? [수상한 말수의사]

저기요. 말이 죽은 것 같아요.

“저기요. 말이 죽은 것 같아요. 누워서 안 일어나요.” 전화선을 타고 들리는 관광객의 목소리는 급박했다. 말 전문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나는 전화를 받고, 병원 옆 구석 울타리에 있는 말을 살펴보러 달려나갔다. 말은 누워서 안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의 배는 규칙적으로 쌜룩거리고 있었다. 쫑긋거리는 귀는 분명 내 걸음과 움직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사진 : Unsplash의 Anny Spratt

조금 더 내가 시끄럽게 하니 말은 슬쩍 목을 들어 상황을 파악했고, 곧 몸을 털며 일어났다. 간단한 신체검사상 특이점이 없었다. “말이 잠을 자고 있었나봐요.” 라고 말했다. “네? 말은 서서 자는게 아닌가요?” 관광객이 되물었다.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라고 대답했다. 말 수의사로 일하면서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말은 잠잘 때 서서 자나요?” 다.

말은 초식동물이다. 그래서 야생에서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항상 주위를 의식하면서 깨어 있어야 살아남는다. 그래서 하루에 약 18-19시간을 주위를 의식하면서 깨 있도록 진화했다. 그래도 매일 24시간 내내 긴장 속에서 잠을 전혀 못 자는 것은 아니다. 말은 하루에 2시간 정도는 꾸벅꾸벅 졸고, 3~4시간 정도는 잠을 잔다.

잠의 깊이는 약간 다르다. 2~3시간 정도는 깊은 수면 (SWS, slow wave sleep)을 하고, 1시간 이하는 얕은 수면 (REM 수면, rapid eye movement sleep)을 한다. 사람과 비교하면 하루 두세시간만 깊은 잠을 자며 산다니, 참으로 고단한 생활이 아닐 수 없다.

말이 서서 잘 수 있는 이유

그렇다면 말은 깊은 수면 시간 동안에도 서서 잠을 잘 수 있을까? 정답은 ‘예’ 이다. 사실 말은 서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특이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말의 뒷다리에는 잠금장치가 있다. 그래서 인대가 자물쇠 역할을 하서 관절을 고정시켜 준다. 그래서 관절이 꺾이지 않고, 큰 엉덩이 근육이 쉬면서, 서서 잠을 잘 수 있다. 이 역시 포식자의 움직임에 재빨리 도망치기 위하여 만들어진 생명의 신비한 구조이다.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내가 밤새 놀다가 출근시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며 서서 졸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머리를 꾸벅거리며 졸다가 순간 깊은 잠이 들어버렸다. 그 때 다리에 힘이 풀리며 지하철 바닥에 바로 드러누울 뻔 했다. 내가 말이라면 재빨리 도망치기라도 했을텐데, 잠금장치가 없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졸음과 또다시 싸워야 한다.

사진 : Unsplash의 Bruno neurath-wilson
저는 사람처럼 다리가 풀리지 않습니다. (사진 : Unsplash의 Soledad Lorieto)

간혹 누워서도 잡니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말도 사실 자기가 안전하다고 생각이 드는 환경에서는 누워서도 곧잘 잔다. 특히 마방 안에서 오래 생활한 말들, 또는 오랜 시간 드넓은 울타리가 둘러진 풀밭에서 살아온 말들은 이미 야생이 아니다. 그런 말들은 대낮에도 대자로 누워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가도 하며 잘 자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어쩔 때는 꿈을 꾸는지 다리를 살살 움직이기도 한다.

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

나이와 성격에 따라서도 다르다. 제 아무리 말이라 해도,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노령말들은 자극에 굼뜰 수밖에 없다. 또, 성격 자체가 느긋한 말 역시 외부의 소리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또한 잠이 많은 망아지들은 엄마 옆에서 곧잘 누워 잔다. 따라서, 어떤 말이 송장처럼 누워 있는데 숨이 고르고, 눈과 귀는 나를 의식하며, 고통스러운 듯한 움직임이 안보인다면, 어쩌면 ‘숙면’ 중이라고 여겨볼 수도 있다.

친구들 나 좀 잘께

진귀한 네잎클로버

제주도에서 말수의사로 지내고 있는 나는, 야외 울타리 주위를 걷다가, 넓은 초지에 대자로 드러 누워서 숙면 중인 녀석들을 가끔 본다. 그럴 때 내가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네 팔자가 상팔자구나‘ 이다. 서서 잠들기 신공도 펴기 귀찮을 정도로 안전하고, 편안한 현재의 너의 환경이 일단 부럽다. 그리고 얼마 안되는 소중한 너의 숙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더욱 숨죽이며 녀석을 지나친다.

그 날 관광객을 놀래킨 그 말은 여전히 상팔자로 살고 있다. 그래도 말은 우리보다 훨씬 덜 자고, 하루 대부분을 깨어 있는 친구들이다. 그러니, 어느날 제주 여행 중 문득 누워서 자는 말을 보게 된다면, 그건 네잎 클로버같은 희귀한 행운의 장면으로 기억하면 된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의 짧은 숙면을 조력해주면 말님들이 은근히 감사해하며 행운을 넘겨줄 것 같다.

꿈꾸고 있는 입원 망아지, 찾았다! 네잎클로버!

* 글쓴이 - 김아람

제주도에서 말을 치료하며 느끼는 수의사의 속마음과 재미있는 말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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