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옥편’, 대둔산 유격대를 이끌다
빨치산 연구를 처음 개척한 김남식은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렬의 존재에 주목했다. 6·25 전쟁 당시 충남의 유격대는 바로 그의 지휘 아래 조직됐다고 한다. 김남식의 기록을 살펴보자. 1950년 9월 하순, 인민군 후퇴기가 되자 “충남의 여러 도당위원회, 도인민위원회 및 도당 빨치산 등은 대둔산으로 이동했다.”1
그를 지휘한 자는 도당위원장 ‘남충렬’(본명 박우헌·朴宇憲)이었다. 남충렬은 사령부 밑에 백두산부대, 가야산부대 등 전투부대 7개를 편성했고, 1천 명이 넘는 유격대 병력을 거느렸다. 근거지는 대둔산이었다. 남한의 다른 도들과는 달리 험준한 산악지대가 적은 충남 지역에서는 대둔산이 빨치산 운동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대둔산은 충남 논산⋅금산과 전북 완주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879m의 험산이었고, 금산 지방을 거쳐서 소백산맥 주능선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도청 소재지 대전에서 가까웠다. 서남쪽 방향으로 35㎞ 지점에 있었다. 동학농민전쟁 때는 1895년 2월 산중에서 농성하던 잔존 농민군 김석순 등 30여 명이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이기도 했다.
일제는 왜 ‘남삼군’에 노심초사했나
김남식의 조사에 따르면, 남충렬은 가명이고 박우헌이 본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부정확한 정보임이 판명됐다. 남충렬의 본명은 박우헌이 아니라 ‘박우현’이었다. 1948년 39살의 다소 늦은 나이에 모스크바 중앙당학교 유학생으로 선발됐을 때 자필로 작성한 ‘자서전’이 있는데, 거기에는 ‘박우현’이라고 똑똑히 적혀 있다. 또 1939년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 작성된 수감자 관리카드에는 ‘朴于賢’이라고 명기돼 있다. 어조사 우 자, 어질 현 자를 써서 ‘박우현’이 그의 본명임이 틀림없다.
‘남삼군’(南三郡)이라는 말이 있다. 함경북도 남쪽에 있는 명천군, 길주군, 성진군을 합쳐 부르는 용어다. 세 지역이 통칭되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이동과 통신이 원활해 주민들 사이에 동류의식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세 지역이 1930년대에 거세게 일어난 함경도 반일 농민운동의 한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농민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대규모 검거 사건이 빈발했다. 검찰에 송치된 인원을 보면 성진군에서는 1931년 146명, 1933년 77명, 1936년 269명, 명천군에서는 1935년 213명, 1936년 578명, 1937년 229명, 길주군에서는 1936년 111명, 1937년 27명 등이었다. 경무국 보안과장을 지낸 경찰 고위간부의 표현에 따르면, “사상이 온건하지 못하여 조선 전 지역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곳”이었다.2 조선총독부는 이곳의 반일 농민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남삼군 사상정화공작’이라는 특별한 치안 대책까지 마련해야만 했다.3
박우현은 바로 남삼군 반일 농민운동의 열렬한 투사였다. 출생지부터가 그곳이었다. 길주군 동해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금성리 전통 서당에서 5년간 한학을 배웠고, 창촌동의 공립보통학교에서 6년간 수학했다. 또래 중에서 특출나게 총명했던 것 같다. 서당 시절에는 ‘신동’이라고 불렸다. 또 한자 사전을 뜻하는 ‘옥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한문을 읽고 쓰는 능력에 큰 성취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보통학교 시절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 당시 성적이 1등이었다고 한다. 수석 졸업생이었던 것이다.
중등학교 진학차 객지로 유학까지 갔다. 북간도 용정에 있는 영신중학교에 입학해 2년 반 수학했으나, 학자금 곤란으로 졸업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20년대 용정의 학생계에는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돼 있었다. 박우현은 재학 중에 사회의식에 눈떴다. 사회과학연구회라는 학생단체에 출입했고, 사회주의 책자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스무 살에 시작된 파란만장한 생애
유학을 중단하고 고향에 되돌아온 1929년, 그의 나이 20살이었다. 이때부터 파란만장한 그의 혁명운동 경력이 시작됐다. 길주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동해면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것을 필두로, 합법 위상의 길주군농민조합 설립을 추진하는 역할도 맡았고, 그와 나란히 비밀결사에도 참여했다. 비합법 위상의 길주군 전위그룹에 들어가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확장에 노력했다.
일본 경찰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었다. 박우현은 “1년에 10회 이상 검거”를 당했고, 그중 4~5회는 경찰서 유치장 구금으로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가혹한 취조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등사판 절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았을 때와 길주 전위조직사건 가담 혐의를 받았을 때가 특히 힘들었다. 박우현의 진술에 따르면, 10여 일 밤낮으로 계속되는 고문으로 “몇 번 죽었다가 살아났던” 경험을 했다고 한다.4
결국 첫 번째 징역을 살았다. 친일 면서기 안방헌이란 자 때문이었다. 그자는 마을 소년회가 개최한 비공식 토론회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경찰 주재소에 밀고함으로써 청소년 수십 명을 체포·취조당하게 만들었다.5 22살의 원기 왕성한 청년 박우현은 면서기 안방헌을 추궁했고, 결국 격투가 벌어졌다. 이 사안 때문에 박우현은 폭행죄로 송치돼, 청진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해야만 했다.
출옥 이후 박우현은 어떻게 살았을까? 연이은 취조와 고문, 징역살이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는 경찰이 바라는 바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활동 범위를 넓혔다. 길주군 농민운동에서 벗어나 이웃한 명천군과 성진군 일대로 무대를 확장했다. 1933년 4월에는 명천군 하고면 토원동으로 아예 주거지를 이전했는데, ‘남삼군’을 대상으로 하는 광역 농민운동가로 진출하려는 의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박우현은 3군의 농민조합 운동에 뛰어들었다. 직업적인 농민운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박우현의 자필 ‘자서전’에 그 정황이 반영돼 있다. 거기에는 1929년부터 1934년 3월까지 농사를 지었다고 적혀 있다.6 달리 말하면 1934년부터는 농사짓는 대신 농민운동을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생활로 들어간 것이다.
먼저 비합법 농민조합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적색농민조합이라거나 좌익농민조합이라고 부르는 비밀단체였다. 명천군 하고면 지역에서 비밀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면 단위 책임자로 취임했다. 하고면은 명천군 내 10개 면 가운데서 인구가 셋째로 많은 핵심 지역이었다. 또 자신의 원래 연고지인 길주군에서도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했다. 그 조직 일부가 경찰의 일제 검거로 무너지자, 제2차 농민조합, 제3차 농민조합 재건운동을 이끌었다. 그뿐인가. 성진군에도 진출해 적색농민조합을 지도했다. 요컨대 명천·길주·성진의 비합법 농민조합 운동을 지하에서 연계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동료와 함께 수갑 찬 채 경찰서 탈출
위험을 수반하는 거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3군 반백색테러투쟁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책임자가 됐다. 백색테러란 식민지 통치권력이 반일운동 참가자에게 가하는 폭력행위를 뜻했다. 백색테러 반대투쟁이란 밀정과 밀고자에 맞서서 그들을 응징하는 일, 경찰의 지원하에 농민조합 반대운동을 행하는 자위단에 대처하는 일, 경찰대의 습격과 체포에 맞서서 조합원의 안전을 꾀하는 일 등을 가리켰다.
박우현은 키 173㎝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큰 키였다. 백색테러에 맞서서 농민운동 참가자와 지지자들을 보호하는 투쟁을 지휘할 만한 체력과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담대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25살 되던 1934년 3월 불행하게도 명천군 하고면 주재소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명천경찰서로 이송됐으며 그곳에서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2인 1조로 수갑을 찬 채 유치장에 수용돼 있었다. 한식날인 4월6일이었다. 그는 수갑을 함께 차고 있던 동료와 명천경찰서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탈출 이후 박우현은 줄곧 비합법 상황에 처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중 망명’ 생활을 했다. 산중 망명이란 산속에 은밀히 아지트를 설비하여 숨어 지내는 것을 말한다. 그는 소극적으로 숨어 지내는 데 머물러 있지 않았다. 산중 아지트를 근거로 하여 적극적으로 명천, 길주, 성진 3개 군의 백색테러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이때 초보적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그의 산중 투쟁은 2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27살 되던 해 겨울에 가서야 끝났다. 그는 1936년 12월6일 길주군 동해면 용동에서 길주경찰서 경찰대에 체포됐다. 체포 정황은 격렬했다. 박우현은 7~8명 대오를 지어 이동 중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경찰대의 습격을 받았다. 격전 끝에 박우현은 몸에 7발의 탄환을 맞았고, 그를 보위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동료 김택룡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 밖에 6~7명의 동료가 부상당한 채 체포됐다.7
‘전국구’ 수감생활 끝에 맞은 해방
두 번째 징역은 첫 번째와 달랐다. 무엇보다도 형기가 길었다. 첫 번째는 6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죄목도 무겁고 다양했다. 그에게 들씌워진 죄목은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에다가 공무집행 방해죄, 상해죄 등이 중첩됐다. 감옥도 여러 곳을 전전했다. 청진형무소를 기점으로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광주형무소, 전주형무소 등으로 이감을 다녔다.
박우현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은 1945년 8월15일 해방 때였다. 전주형무소에서 출감했다. 20살에 시작해 36살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계속돼온 그의 민족해방운동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그의 자서전 표현에 따르면, “민족적 해방과 같이 나의 정치적, 육체적 해방도 전취되었던 것”이다.8
출감하면서 그가 느꼈을 기쁨과 감격이 은근히 드러나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김남식, ‘남로당연구’, 돌베개, 1984, 459쪽.
2. 미즈노 나오키, ‘식민지 조선의 사상정화공작과 향약⋅자위단’, ‘공존의 인간학’ 2, 전주대학교, 10쪽, 34쪽.
3. 청진지방법원 검사정, ‘남삼군(南三郡) 사상정화공작 개황’, ‘사상휘보’ 11호, 1937년 6월, 146~170쪽.
4. 박우현, ‘자서전’, 1948년 8월7일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20 л.11-15об.
5. ‘면서기의 고소와 소년회원의 피검’, 조선일보 1931년 2월4일, 7면.
6. 박우현, ‘자서전’, 1~2쪽.
7. 박우현, ‘간부리력서’, 1948년 8월7일,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20 л.9-10об.
8. 박우현, ‘자서전’,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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