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영광을 위해 뛴다? 인기 얻고 연금 받으려면 모든 것 쏟으라 말해

정영재 2024. 4. 20.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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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근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
장재근 진천선수촌장은 “파리 올림픽 메달 유망주 20여명에겐 주치의와 전담 물리치료사를 배정하는 등 집중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2024 파리 올림픽 개막(7월 26일)이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1회 올림픽 개최지 파리에서 100년 만에 다시 열리는 지구촌 축제다. 그러나 대한민국 선수단은 축제를 즐길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기록한 종합 16위(금6, 은4, 동10)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가장 낮은 성적이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파리에서는 종합 20위 아래로 떨어질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선수단 규모도 몬트리올 이후 가장 적은 170~180명 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의 총체적 위기다. 인구 급감으로 운동선수 풀이 크게 줄었고, ‘올림픽 금메달=국위선양’이라는 도식도 빛이 바래고 있다. 장재근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은 속이 타고 마음이 급하다. 그는 “충무공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임하고 있다. 선수들의 컨디션과 경기력을 0.01%라도 올릴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이라고 했다. 지난 18일 진천선수촌에서 장 촌장을 만났다.

Q : 메달 전망이 썩 밝지 않습니다.
A : “양궁에서 금메달 3개 정도를 보고 있습니다. 펜싱과 배드민턴, 태권도에서 한 개씩 잡으면 6개가 됩니다. 이건 마지노선이고요. 사격 여자 공기소총, 남자 체조가 다크호스입니다. 수영 황선우·김우민(이상 남자 자유형), 남자 계영 800m 중 하나에서 깜짝 금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Q : 현지에 사전 훈련캠프도 설치하네요.
A : “저희 선수단 규모가 170명 선밖에 안 됩니다. 선수가 줄면 현지에 갈 수 있는 지도자도 줄어요. 펜싱은 현재 지도자가 10명인데 올림픽에는 3명밖에 못 갑니다. 그래서 파리에서 80㎞ 정도 떨어진 퐁텐블로에 캠프를 설치하는 겁니다. 지도자들이 데일리 패스를 끊어 경기장을 오가면서 전력 분석도 하고 선수들에게 간식도 전달하도록 할 겁니다.”

Q : “메달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 경기를 즐겨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A : “우리나라 축구가 결승에서 일본을 만났다고 칩시다. 금메달 따면 황홀하겠죠. 은메달 따면 서운해 하지 않을까요. 금메달을 기대했던 선수들이 줄줄이 탈락하면 ‘우리나라 체육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엘리트 체육이 아직 안 죽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저희는 죽을힘을 다하는 겁니다. 대신 선수들에겐 ‘조국의 영광을 위해 뛴다’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유명해지고 연금 많이 받기 위해, 네 인생의 최고 목표니까 후회 없이 자신을 쏟아 부으라고 합니다. 왜? 네가 대한민국이니까. 손흥민이 대한민국이고 안세영이 대한민국이니까.”

Q : 그렇다면 엘리트 스포츠의 존재 이유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A : “풍요로울 때보다 국민들이 지치고 힘들 때 조금이라도 웃음을 주고 단 몇 초라도 행복감을 줄 수 있는 게 엘리트 스포츠 아닐까요. 안세영이 통쾌한 스매싱으로 금메달을 따고, 양궁이 퍼펙트 골드로 금 사냥을 하는 순간 치맥을 먹으면서 ‘역시 대단해. 우리에겐 안세영이 있어. 양궁은 한국을 아무도 못 이겨’ 하면서 엔돌핀이 솟구치는 거죠.”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육상 200m에서 우승할 당시의 장 촌장. [중앙포토]
1982년과 86년 아시안게임 육상 200m 2연패를 달성한 독보적인 스프린터 장재근은 은퇴 후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다.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현 KIA)에 적을 두기도 했고, 에어로빅 강사, 홈 쇼핑과 방송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좀 가벼운 이미지 때문에 선수촌장을 맡았을 때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선수촌을 ‘훈련에만 전념하는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새벽운동 의무화, 격주 산악구보, 심야시간 와이파이 차단 등이 그가 밀어붙인 일이다.
은퇴 후 에어로빅 강사로 변신한 장재근이 TV에 출연해 에어로빅을 지도하고 있다. [중앙포토]

Q : 선수 자율성을 무시한다는 비판도 있죠.
A : “태릉선수촌에서 진천선수촌으로 옮기면서 선수들에게 너무 큰 자율권을 준 게 문제라고 봤습니다. 육상 단거리 선수들이 한 번 뛰고 나서는 전부 퍼질러 앉아 휴대폰을 봅니다. 1인1실 방에 암막커튼을 쳐 놓고 거의 게임방 수준으로 새벽까지 게임을 하는 선수들도 있었어요. 저는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나가라’고 합니다.”

Q : 산악구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A : “2주에 한 번씩 산악훈련을 하는 건 함께 모이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이름이 뭔지, 뭘 하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함께 모여서 서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시키면 말문이 트이고 금방 친해지게 됩니다. 산악훈련은 뛰어도 되고 걸어도 됩니다. 지난번에도 절반 이상이 걸어서 갔어요.”
장 촌장은 “저희가 대표선수 할 때는 ‘태릉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엄청났어요. 저는 진천선수촌을 운동선수라면 일생에 한 번은 1년 이상 지내다 오는 게 꿈이 되는 곳, 대한민국 스포츠의 성지(聖地)로 만들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장 촌장은 방송인 출신답게 달변이었다. 올림픽을 맞는 각오를 물으니 평소 지론을 술술 풀어냈다. “운동하는 사람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크로스핏 같은 극한 스포츠에도 도전합니다. 그분들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이 선망의 대상이자 목표입니다. 또 이분들이 만든 저변이 엘리트 선수들의 산실이 되기도 하지요. 우리도 일본처럼 생활체육과 엘리트 스포츠가 공존하고 발전하는 모델로 가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파리 올림픽을 죽을힘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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