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사랑과 파국: ‘악처’로 불린 소피아와의 48년 결혼 전쟁사!

[홍성광 번역가]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쾌락주의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에 이어 세 번째 악처 이야기의 주인공은 레프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다.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 1828∼1910)는 위대한 소설가이자 사상가일 뿐 아니라, 복잡하고 격렬한 감정의 인간이기도 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톨스토이는 이모의 손에서 양육됐다. 젊은 시절의 톨스토이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쾌락주의자였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였으며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명으로 꼽힌다. 버지니아 울프는 톨스토이를 “모든 소설가 중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려 했다. 톨스토이의 문학 세계에서는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내는 자기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즉, 자신의 관념을 통해, 또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해 절대적 자각자로서의 자기완성에 이르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농민의 소박한 삶에 대해 공감하면서 “재산은 죄를 부르고, 부의 축적은 인간을 타락시킨다. 오직 단순한 노동만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툴라 지역의 야스나야 폴랴나라는 영지에 위치한 톨스토이의 생가.

아내 소피아 이전의 방탕한 사랑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와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라는 두 얼굴의 톨스토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세계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분열된 자아가 계속해서 싸운다. 생의 후기로 갈수록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는 시인’에서 ‘인생의 교사’이자 ‘삶의 재판관’이 되기를 갈망했다.

톨스토이는 결혼 전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매춘부와 하녀, 농노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그중 알리오나(Alyona)라는 농노 여인에게서는 아이까지 가졌다. 톨스토이는 후일 섹스를 죄악시하며 금욕을 이상으로 여겼지만, 젊은 시절엔 성적으로 매우 방탕했다.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나는 오늘도 농노 소녀를 욕망했고, 나 자신을 혐오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시 내일 그것을 반복할 것이다.”

톨스토이와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Sophia Andreevna Behrs, 1844∼1919)의 결혼 생활은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정서적으로나 철학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은 관계였다. 톨스토이에게 소피아는 아내이자 동지, 그리고 적이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가장 비극적인 관계로 정의되는 이들 부부의 결혼생활. 이들의 관계는 사랑과 갈등, 이상과 현실, 감정적인 충돌로 특징지어진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48년간 지속되었지만, 비극으로 끝났다. 톨스토이의 삶에는 몇몇 사랑과 욕망, 갈등, 도피가 얽혀 있었고, 이러한 개인적 경험들은 그의 문학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젊을 땐 성욕과 죄의식이 공존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고, 결혼 후엔 아내를 동지이자 헌신적인 동반자로 대했다. 말년에는 아내를 철저히 거부하며 사랑보다는 ‘비인격적 사랑’, 아가페적 사랑(기독교적 박애)을 추구했다. 결국 그는 개인적 사랑과 가족의 갈등에서 실패한 사내이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사랑은 격렬하고도 모순적이었다. 문학적 천재성만큼이나 그의 감정 세계는 광기와 신념 사이에서 격하게 진동했다. 만약 니체가 사랑을 '초인의 시험대'라 보았다면, 톨스토이에게 사랑은 죄와 구원, 현실과 유토피아 사이에서 부단히 찢기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결혼 생활을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결혼하기 전, 방탕한 생활을 하던 시기의 레프 톨스토이(1856년 당시)

결혼 초기 - 사랑과 헌신의 시기

레프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베르스는 발트-독일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 황실 의사인 안드레이 베르스와 러시아인 아내 리우보프 이슬라비나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 중 하나였다. 소피아는 어린 시절부터 미래의 남편인 레프 톨스토이와 알고 지냈다.

1862년 9월 17일, 톨스토이는 34세의 나이로 18세의 어린 소피아와 결혼했다. 톨스토이는 소피아의 어머니와 친구였다. 톨스토이는 소피아에게 결혼을 제안하는 편지를 쓰고 일주일 후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소피아는 총명한 문학 소녀였으며, 톨스토이의 작품 세계에 깊이 관여했다. 결혼 초기 안정기를 맞이했는데, 특히 1860∼1870년대는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록된다.

작가였던 소피아는 자신의 문학적 야망을 포기하고, 결혼 전에 작성한 글과 일기를 직접 불태웠다. 반면에 톨스토이는 그녀에게 자신의 결혼 전 하녀들과 성적으로 방탕했던 삶이 담긴 일기를 읽게 했다. 이 내용은 나중에 『안나 카레니나』와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문학적으로 재현되었다. 톨스토이의 방탕한 과거를 알게 된 소피아는 큰 충격을 겪었고, 이후의 불신이 깊어졌다.

애초에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작품과 글을 깊이 이해하고 지적인 그를 감정적으로 지지했다. 톨스토이가 자기 수양과 기독교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이를 지원하려 했다. 둘은 결혼 초기에 서로의 창작과 생각을 많이 공유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필사하고 교정하는 일을 적극 도왔으며, 특히 『전쟁과 평화』를 6번이나 필사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소피아는 16번 임신했으며, 그중 3번은 유산했다. 부부의 13명의 자녀 중 8명이 어린 시절을 넘겼다. 그러나 남편이 점점 더 영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자, 소피아는 가정의 재정과 부지 관리 일까지 맡게 되었다.

아내 소피아 톨스토이

갈등의 시작 - 톨스토이의 변화와 소피아의 반발

그러다가 1870년대 후반부터 톨스토이는 기독교적 금욕주의와 사회 개혁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반면 결혼 생활에 대한 태도도 급격하게 변해 가족과의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했다.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황홀경에 빠진 톨스토이는 점차 금욕적 도덕론자로 변해갔다. 그는 그 영향으로 개인적인 욕망과 물질적 소유를 부정하는 쪽으로 옮겨갔고, 재산 포기, 채식주의, 성적 금욕 등을 주장하며 소피아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참회록』 6장에서 톨스토이는 쇼펜하우어의 책 마지막 단락인 “삶이라는 것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따라서 악이다. 무로 전환되는 것만이 삶에서 유일하게 신성한 것이다”를 인용한다. 톨스토이는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장들을 읽고 자발적 빈곤과 의지의 부정을 선택했다. 이렇게 사상적 변화를 겪자, 아내 소피아는 이를 받아들지 못했다. 특히 소피아는 남편이 가족의 생계를 무시한다고 느꼈고, 톨스토이는 아내를 ‘물질적이고 속물적’이라고 비난했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으로 받아 금욕적인 생활로 거듭나기 시작하던 시기의 톨스토이(1876년 당시)

하지만 소피아는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들과 가족을 돌보는데에 최선을 다했고, 톨스토이가 자산을 처분하거나 가정을 떠나려는 태도에 강하게 반대했다. 톨스토이가 그녀와 가족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자, 소피아는 그의 철학적 변화로 인해 자신이 점점 더 무시당한다고 느꼈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제자들이 집안에 무분별하게 드나드는 것도 싫었고 그의 이상주의적 삶의 방식도 마음에 안들었다. 오로지 가정을 돌보는데 고군분투했다. 이 시기 톨스토이는 『참회록』을 쓰며 과거의 삶을 비판했고,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하기도 했다. 소피아는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하며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철학적 이상에 따라 가정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엉거주춤했다. 그는 『참회록』에서 “결혼은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그 변신이다. 그러나 그 변신은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게 한다”라고 쓰기도 했다.

1892년 당시의 톨스토이 가족 사진.

파국 – 톨스토이의 가출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톨스토이의 제자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가 가족 관계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체르트코프는 톨스토이의 유언장을 조작해 소피아를 배제하려 했고, 소피아는 이에 극심한 불안과 분노를 느꼈다.

1910년 10월, 82세의 톨스토이는 소피아와 격렬하게 다툰 후 자기 수양의 일환으로 가족을 떠났다. 그는 소피아를 떠나면서 딸 알렉산드라와 의사 두샨 마코비치를 데리고 갔다. 그는 결혼생활을 종결짓고 떠나는 것이 자신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집을 떠나기 직전 소피아와 마지막으로 크게 다퉜는데, 소피아가 자신의 유언장을 찾고 있다는 것을 엿들은 후 화가 난 것으로 보인다. 톨스토이는 열흘 후 아스타파보 역에서 숨을 거두었고, 소피아는 임종 장소에 간신히 도착했지만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 부부의 결혼은 '성자'와 '인간'의 투쟁으로 기록된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사랑한다”였다. 그의 묘비에는 십자가나 비석 대신 “나를 기념하지 말라”는 유언이 새겨졌다. 소피아는 톨스토이가 떠나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톨스토이가 가족을 배신했다고 느꼈고, 그들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게 끝나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슬퍼했다. 톨스토이 사망 후, 소피아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조용히 살았으며 러시아 혁명 기간에도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다. 그녀는 1919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소피아 톨스토이의 많은 작품은 사후에 공개되었으며, 쓰인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출판되었다. 그녀는 레프 톨스토이를 비판하는 글을 썼기 때문에, 러시아 당국은 유명한 러시아 작가의 명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이를 출판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일부 문학 작품은 쓴 지 백 년이 넘어서야 공개되었다.

사망하기 전 1910년의 레프 톨스토이와 아내 소피아.

소피아에 대한 재평가

소피아는 오랫동안 톨스토이를 괴롭힌 ‘악처’로 알려졌지만, 최근 그녀의 일기 『소피아의 일기』가 공개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작품 저작권을 보호하고, 검열을 피하려고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는 등 남편의 문학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남편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외국 서적을 러시아어로 옮기는 등 학문적으로도 크게 기여했다. 많은 전기 작가들은 “소피아 없이는 톨스토이도 없었다”라고 평가하며, 그녀의 헌신을 높이 사고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불륜적 욕망과 이상주의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상징적이다. 카레닌 가족의 불행과 레빈-키티 부부의 갈등은 톨스토이와 소피아의 관계를 투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소피아와 톨스토이의 결혼은 문학사에서 가장 불행한 결혼의 하나로 평가된다. 자녀들은 결혼 생활의 불화를 두고 각기 다른 편을 들었다. 딸 알렉산드라는 아버지를 지지했으며, 아들 레오 주니어는 어머니를 편들었다. 소피아는 남편의 영적 집착과 가족생활의 소홀함으로 고통을 겪었다.

레프 톨스토이의 무덤.

톨스토이와 소피아의 결혼 생활은 창조와 파괴, 사랑과 증오가 공존한 관계였다. 톨스토이가 자신의 철학적 변화와 자기 수양을 추구하자 갈등이 커졌다. 그의 철학적 이상이 결혼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두 사람 간의 정서적 이격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결국 가정을 떠난 톨스토이는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해결하려 했지만, 소피아는 큰 상처를 입었다. 톨스토이가 예술과 사상의 거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소피아의 헌신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종교적·도덕적 추구는 가정을 위태롭게 했다. 두 사람의 삶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예술과 가정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