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융프라우 21년 만에 재회하다 [융프라우 묀히요흐산장·아이거 워크]
머리가 핑 돌았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어림없다.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듯한 고산병에 변덕스러운 날씨. 웅장하다는 융프라우의 산봉우리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실내의 얼음궁전에서 인증샷 한 장만 겨우 찍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그때 융프라우는 마치 '산을 대하는 자세부터 다시 배워라'라고 호통 치듯 나를 가르쳤다.
그로부터 딱 21년이 흘렀다. 월간<산> 창간 55주년 기념 독자 초청 프로그램에 당첨되어 스위스 융프라우를 다시 찾았다. 이번 이벤트는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우 특별하다. 베른 고원지대Berner Oberland의 3봉峯, 아이거Eiger(3,970m), 묀히Mönch(4,110m), 융프라우Jungfrau(4,158m)를 가깝게 볼 수 있는 만년설 하이킹과 융프라우 아이거 워크 하이킹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융프라우에 21년 전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이번에는 준비를 철저히 했다. 고산병 약은 물론, 주말마다 산행하며 체력을 길렀다.
융프라우 만년설 산행 당일, 월간<산> 기자 2명과 독자 5명으로 구성된 우리 하이킹 팀은 베테랑 가이드 마틴을 만났다. 스위스 군대의 리더처럼 근엄한 모습이다. 초면의 어색함을 풀기 위해 한국에서 준비해 온 스위스-한국 국기 배지를 건네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틴은 '스위스 산 사나이'였다. 여름에는 나무를 만지는 목수로, 겨울에는 스키장에서 스키강사, 눈사태를 예방하는 스노 패트롤로 알프스와 함께했다. 올해 초 은퇴했지만, 산이 그리워 알프스 산행 가이드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했을 법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다니 우리의 가이드로 더할 나위 없었다. 우리는 마틴과 함께 융프라우로 출발했다.
유럽의 지붕을 향한 순탄한 여정
융프라우로 가는 여정은 예전보다 훨씬 편리해졌다. 최첨단 케이블카 아이거익스프레스Eiger Express를 타고 15분 만에 아이거글레처Eigergletscher역에 도착했다. 케이블카가 미끄러지듯 오르자 우리는 큰 새의 등에 올라 타고 하늘을 나는 듯했다.
청명한 하늘과 뭉게구름,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 그리고 수많은 등반 이야기를 품은 아이거 북벽까지. 어느 장면 하나 빠짐없이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우리는 호화로운 밥상을 앞에 두고 무엇을 먼저 맛봐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손님 같았다.
마틴을 따라 아이거글레처역에서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역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아이거와 묀히의 몸통을 관통한 동굴을 달렸다. 동굴 속 전망 포인트인 아이스미어Eismeer(3,159m)역에서 5분간 정차했다. 마틴이 보여 줄 것이 있다며 기차에서 내려 따라오라고 한다.
아이거 동서쪽의 얼음의 바다역의 창 밖, 아이거와 그로스 피셔호른Grosses Fiescherhorn(4,049m) 사이에 아이스슈미어 빙하Ischmeer glacier와 순백의 만년설이 가득했다. 베른의 최고봉, 슈렉호른Shreckhorn(4,078m)은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 세상은 내 발 아래 있다는 듯 위엄을 자랑한다. 우리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영원한 겨울왕국에 도착한 것이다.
스위스 알프스의 진정한 겨울왕국
아이스미어역에서 짧은 정차 후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융프라우요흐역에 도착했다. 이곳은 63빌딩 14개를 쌓아올린 높이라고 한다. 융프라우와 묀히 사이의 고갯길에 있어 융프라우요흐(융프라우고개)라고 한다. 융프라우 정상 등반이 아닌 이상 일반인이 융프라우를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지점이다.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위봉우리 꼭대기 전망대Plateau에 도착하니 겨울왕국의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이 한여름 속 겨울을 즐기고 있다. 대범한 사람은 집라인을 타며 환호성을 지르고, 남들보다 호기심이 더 많은 사람은 헬리콥터를 타고 알프스의 풍경을 살펴본다.
빨간 스위스 국기가 펄럭이는 포토존에서 인생사진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생겼다. 자신의 마지막 사진인양 수십 장을 찍는 사람들에게 마틴이 "빠르게 사진 찍지 않으면 걸려 있는 스위기 국기를 가지고 도망 가 버린다"고 농담을 던졌다. 그의 재치 덕분인지, 사람들은 서둘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도 이번에는 SNS에 올리면 모두의 부러움을 받을 만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전망대에서 인증샷만 찍고 내려가면 융프라우 매력 중 아주 일부만 본 것이다.
알레취빙하를 옆에 두고 묀히요흐산장까지
우리는 진정한 융프라우를 경험하기 위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묀히요흐산장(3,658m)까지 왕복 3.45km의 만년설을 걷기로 했다. 산행 후 산장에서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인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이다.
제설차가 다져놓은 눈길을 따라 융프라우를 뒤로하고 묀히 능선의 산장으로 향했다. 햇볕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우리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 눈이 셔벗처럼 사각사각 부서졌다. 공기는 너무나 청량해 산소가 부족한 고산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하지만 방심하면 고산병 증세가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천천히 걸으니 자연스럽게 풍경에 눈길이 갔다. 길가의 눈 무더기는 알프스의 산맥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틴이 설명했다.
"자세히 보면 눈 위에 모래가 있죠? 사하라 사막에서 시로코Sirocco 바람을 타고 5,000km를 날아온 모래입니다. 모래가 쌓인 부분은 더 빨리 녹아요."
9시간 떨어진 사막의 모래가 알프스의 만년설을 녹인다니, 세계는 넓으면서도 한없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편, 유럽에서 가장 긴 알레취빙하Aletsch Glacier 위를 사람들이 걷고 있다. 길이 23km로 한강의 동작대교에서 팔당대교까지 이르는 거리이다. 곳곳에는 크레바스Crevasse가 하얀 입을 벌리고 있다. 햇살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고요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깊이를 감추고 있었다.
반대쪽에는 묀히(4,107m)가 보인다. 융프라우를 지키는 보디가드의 얼굴이 궁금해 가까이 가려니 암벽을 장식하는 버스만 한 거대한 만년설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수도사의 장난에 깜짝 놀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처음부터 지켜 본 트루베이크Trugberg(3,932 m)산이 웃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나른한 햇빛에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는지, 그로스 피셔호른Gross Fiescherhorn(4,049m), 힌터 피셔호른Hinter Fiescherhorn(4,025m) 봉우리들이 구름 사이를 뚫고 멀리서 온 이방인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죽음의 북벽을 마주하다
1시간 정도의 만년설 산행으로 가볍게 몸을 풀었으니 융프라우 아이거 워크를 추가로 걷기로 했다. 융프라우 철도 개통 100주년을 기념으로 만든 이 편안한 하이킹 코스는 아이거글레처역에서 출발해 폴보덴Fallbodensee 호수를 거쳐 클라이네 샤이텍Kleine Scheidegg까지 이어진다. 베른 고원지대의 3봉,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를 옆에 두고 2.5km를 하산하는 코스라 전날 18km가 넘는 산행을 마친 우리에게 반가운 휴식이 되었다.
하산길은 아이거글레처역에서 시작했다. 왠지 모를 압도감에 뒤를 돌아보니 아이거의 거대한 북벽이 도도하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벽은 생명력을 가진 거대한 괴물 같았다. 검은 표면은 깊게 파인 오래된 흉터가 있었고, 바위틈의 얼음은 날카로운 이빨처럼 번뜩였다. "감히 나를 넘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보내듯, 검고 거친 암벽은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우리 일행 중 김찬일님은 북벽의 오랜 역사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어 저기 보이네! 저기가 헤크마이어 루트Heckmair Route입니다.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 팀이 처음으로 이 북벽을 등반한 경로죠."
헤크마이어 루트는 북벽을 대담하게 가로지르는 약 1,800m 경로이다. 당시, 네 명의 등반가들은 살아남았지만 지금까지 최소 64명의 목숨이 북벽에 묻혀 '살인벽Mordwand'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마틴에 따르면 최근 지구 온난화로 낙석과 낙빙이 더 빈번해져 이곳을 등반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한다.
아이거 옆으로 묀히와 융프라우의 봉우리는 하늘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융프라우에서 이어진 산맥 중, 만년설로 덮인 하얀 송곳니 같은 실버호른Silberhorn(3,704m)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들의 고요한 자태는 아이거의 흉포함과 대비되었다.
하산 길, 인공호수라고 믿을 수 없는 에메랄드빛 폴보덴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맑은 햇살이 비친 호수의 표면에 아이거가 반사되었다. 이 호수는 아이거의 거울이었다. 스위스인들은 인공 구조물을 자연에 녹여내는 데 전문가였다.
클라이네 샤이텍,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길목
라우버호른Lauberhorn(2,472m)과 추겐Tschuggen(2,521m)의 푸른 초원과 부드러운 능선이 클라이네 샤이텍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늦은 오후, 고요한 산악 마을에 빨간 기차가 지나가자, 마을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활기를 띠었다. 늦여름의 따스함이 남아 있는 들판에는 다채로운 야생화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늦은 오후, 소들은 여전히 들판에서 종소리를 딸랑거리며 풀을 뜯고 있었다. 마치 집으로 돌아갈 시간조차 잊은 듯 여유로웠다.
우리 숙소인 클라이네 샤이텍 산장에서 망원경으로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면, 등반가들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인류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이 결실을 맺은 지 86년이 흘렀지만, 이 길과 장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해가 서서히 지며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갔다.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봉우리를 타고 흐르는 마지막 햇살이 봉우리들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잠재웠다. 아쉬움에 함께한 일행도 그 광경에 매료되어 어스름 속으로 서서히 숨겨지는 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융프라우는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온난화로 변해 가는 알프스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알프스의 스키장은 인공눈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고, 알레취빙하도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프라우는 그 변화를 묵묵히 견디며 여전히 깊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산맥, 그 사이로 부드럽게 흐르는 바람, 눈 덮인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카메라에 반도 담을 수 없었다. 융프라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이날의 공기와 햇살, 바람, 그리고 초원과 산은 오래도록 내 삶에 큰 힘이 될 것이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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