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마을 곳곳 명절 선물 배달…3대 집배원 가족은 '추석 산타'
안동 3대 집배원 가족의 한가위 맞이
“지금부터 뛰어, 앞만 보고 뛰어~.”
음정·박자 다 틀려도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제법 신명이 났다. 경북 안동시 북후면의 논밭을 우체국 오토바이 한 대가 가로질러 달리더니 어느 시골집 앞에 멈춰섰다. 진성의 ‘태클을 걸지마’를 마저 다 부른 집배원이 헬멧을 벗으며 크게 외쳤다. “어머니, 편지요 편지~!” 집안에서 나이 드신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시더니 캔커피 하나와 비스킷 두 개를 건넸다. “괜찮다고 해도 매번 고맙다며 이렇게 꼭 챙겨 주신다니까요.” 안동우체국 31년차 집배원 김금화(59)씨도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되면 가장 바쁜 곳 중 한 곳이 우체국이다. 평소보다 우편 물량이 10배 이상 폭증하기 때문이다. 안동우체국도 지난해 추석 때 물량이 20배 넘게 늘면서 올해도 일찌감치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힘들지 않냐’고 묻자 김씨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답했다. “무슨 말씀을요.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동네 어르신 모두 이젠 한 가족이 됐거든요. 특히 홀로 지내는 분들이 많다 보니 매일 안부를 물으며 말벗이 돼드리는 게 일상이 됐죠.”
A : 심성호=“아버지가 퇴직할 때쯤 제가 입사했으니 아버지와는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어요. 같이 근무해도 집배 구역이 달라 만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내가 입사했을 때는 제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어요. 비 오는 날 오토바이 타고 나가도 걱정되고, 늦게 와도 걱정되고. 그런 모습만 눈에 아른거리더라고요.”
A : 심보욱=“저는 아버지를 뵈었을 때 너무 반가웠어요. 오히려 자주 못 본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배달하다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보리차 한잔을 했는데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할 만하냐. 나중에 다 도움된다’고 한마디 해주신 게 잊히질 않습니다. 다니다 보면 ‘아버지 반만 해라’는 응원도 자주 듣습니다.”
A : 김금화=“자정이 다 돼서 귀가하고 또 다음날 아침 7시면 출근하니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죠. 자연스레 집배원 가족들끼리 서로 돕는 모임을 만들게 됐어요. 이름도 집배원을 상징하는 비둘기회로 정했죠. 1971년에 만들었으니 벌써 53년이나 됐네요. 시아버님도 창단 멤버 중 한 분이셨고요.”
심성호=“어릴 적 아버지께 도시락 갖다 드리는 담당이라 매일 우체국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엔 관공서 출입이 자유롭지 않을 때였는데 덕분에 우체국 구경은 실컷 했죠(웃음). 집에서와는 달리 늘 진지하게 업무를 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가 집배원이 되면서 다짐했던 것도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지 말자’였죠.”
고 심목섭씨는 40년 가까운 집배원 경력에 각종 상도 수차례 수상했다. 1986년 제3회 체신봉사상을 받았을 때는 이런 공적 기록이 적혔다. “우편배달에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을 만큼 정확해 동료들로부터 ‘심 독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웃 돕기에도 늘 앞장서 주민들로부터 ‘고마운 아저씨’로 불리고 있다.” 일찍이 이런 심씨를 눈여겨본 박수암 전 안동우체국장은 자신의 딸을 소개하며 심씨를 사위로 삼았다. 박씨까지 합하면 4대 집배원 집안인 셈이다.
A : 김금화=“처음엔 ‘남자들 직장 다 빼앗는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었습니다. 이래 봬도 제가 여군 출신이거든요. 숨이 턱 막힐 때까지 유격 훈련도 받았는데 설마 죽기야 하겠냐는 마음으로 버텼죠. 그런데 정작 응원해줄 거라 믿었던 남편은 반대하더라고요. 너무 위험하다면서요. 그래서 ‘딜’을 했죠. 집안일은 무조건 제가 다 하겠다고요.”
심보욱=“평소에도 부모님께 전화가 엄청 왔어요. TV가 고장 났으니 빨리 와서 고쳐 달라. 리모컨 작동이 안 된다 등등. 어르신들이 잘 모르시니까 문제가 생기면 일단 매일 배달 가시는 부모님께 부탁하는 거였죠. 제가 어렸을 때는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느냐’며 투덜대기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제가 그 일을 하고 있네요(웃음).”
“예전엔 공과금도 대신 납부해 드렸죠”
추석 연휴가 다가올수록 시골 마을엔 명절 선물 배달이 급증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자녀들의 직접 방문이 그만큼 줄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심성호씨는 “추석 때 배달을 가면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씀이 ‘설 때도 보냈는데 뭣 하러 추석 때 또 보내노. 우리 아들이 이렇다니까’라는 자식 자랑이었다”며 “자녀들과 손주들은 못 보지만 우편물만 받아도 기뻐하시는 모습에 저희 집배원들이라도 더 챙겨 드리자고 다짐하곤 했다”고 전했다.
Q : 연휴 때 배달하는 게 힘들진 않았나요.
A : 김금화=“산더미 같은 우편물을 모두 배달하고 밤늦게 귀가하면 늘 시어머님 눈치가 보였죠. 명절 음식도 같이 준비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었지만 항상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어요.”
Q : 그래도 보람 또한 적잖았을 것 같아요.
심성호=“예전엔 시골에 버스도 잘 다니지 않아 공과금도 대신 납부해 드리곤 했어요. 그러면 복숭아도 주시고, 상추 뜯어 챙겨 주시고, 밥 먹고 가라고 하시고. 가족이다 싶을 정도로 정도 많이 들었죠. 그런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전엔 다들 대문도 활짝 열어 놨는데 요즘은 도어락이 늘면서 그냥 문 앞에 놓고 가라는 분도 적잖아요. 그래도 독거노인분들은 꼭 찾아뵙곤 했죠.”
A : 김금화=“3년 전 편지 한 통이 왔어요. 손주를 보러 갔다 코로나에 걸린 분이 119구급차에 실려 안동의료원에 이송됐는데 생필품이 안동병원으로 잘못 배달된 거예요.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질 못해 전전긍긍하신다길래 제가 어렵사리 찾아내 배송해 드렸더니 감사 편지를 직접 손으로 써서 보내오셨어요. 집배원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때였죠.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밤 10시. 김씨 방이 컴퓨터 모니터 불빛으로 훤하다. 사이버대 노인복지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씨가 늦은 시간 강의를 듣느라 여념이 없었다. “올 초 퇴직한 남편에 이어 저도 1년밖에 안 남았는데, 되돌아보니 집배원 하면서 어르신들을 챙겨드릴 수 있었던 게 참으로 감사한 일이더라고요. 퇴직 후에도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려고 이렇게 준비 중입니다.” 잠시 펜을 내려놓은 김씨가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욱아, 이젠 너만 믿는다.” 어머니의 응원에 아들이 웃으며 답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집배원 핏줄은 속일 수가 없다니까요.”
안동=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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