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영재교육 갈림길]① “영재교육 사라지고 대학입시만 남았다”

이종현 기자 2024. 10. 30. 0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과학·영재고 28개, 추가 설립도 예정돼
“영재교육 붕괴, 입시 통로로 추락
학교 줄이고, 교육 과정에 자율성 줘야”

경기도가 20년 만에 과학고등학교 신규 지정에 나서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들썩이고 있다. 과학고 유치를 희망하는 여러 지자체가 지역 유치를 위한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시민설명회도 열고 있다. 과학고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은 경기도교육청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영재고등학교 유치전도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27년 과학영재학교 2곳을 추가로 설립하기로 하자 여러 지자체에서 영재학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울산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과학고와 영재학교의 난립이 과학영재교육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달 27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과학영재교육연구원은 ‘과학영재교육 재도약을 위한 발전 전략 모색’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전문가들은 “과학·영재고가 과학영재 교육이 아니라 대학입시의 통로로 전락했다”고 밝혔다.

서울 종로구 과학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뉴스1

과학영재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과학고와 영재학교가 머지 않아 30개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과학고 20개, 영재학교 8개이다. 2023년 기준으로 과학고와 영재학교 학생 수는 6906명으로 전체 고등학교 학생 127만8269명 중 0.54%이다. 과학고와 영재학교 추가로 신설되는 2027년이면 이 비율은 더 높아진다.

대전과학고 출신인 김용현 KAIST 입학처장은 과학영재교육연구원 포럼에서 “1980년대 말 한 반에 60명이 수업을 듣던 시절에 과학고는 한 반이 30명이었다”며 “일반적인 수·물·화·생 과목을 배웠지만 미국 교과서를 교육과정을 채택했고, 일반고에서는 접근하기 힘든 최첨단 실험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처장이 대전과학고에 입학한 1988년은 과학고가 전국에 5개뿐이었다. 하지만 1998년 초중등교육법 제정으로 조기진급과 조기졸업 제도가 도입되고, 2002년 영재교육진흥법 제정으로 과학고와 영재학교가 늘어나면서 소수만을 위한 영재교육이라는 과학고·영재학교의 처음 취지가 무력화됐다고 분석했다.

김 처장은 “과학고와 영재학교가 설립 취지를 벗어나 의대와 명문대 진학 루트로 활용되고 있다”며 “과학고와 영재학교에서도 대입을 위한 내신 경쟁이 퍼지면서 학생들이 학원을 가기 위해 외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학, 과학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한 학원의 전경을 찍은 사진을 발표 중간에 슬라이드에 띄웠다. 이 학원은 ‘미래형 이공계 인재 양성 교육기관’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었다. 김 처장은 “KAIST가 지향하는 바를 학원이 내세우고 있다”며 “과학영재교육과 대학 입시를 분리하지 못하다 보니 학생들이 과학고와 영재고를 대입을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일대에서 학생들이 오가고 있다./뉴스1

경기과학고를 나온 홍승범 KAIST 교무처장 겸 과학영재교육연구원장은 “우리 동기 90명 중 82명이 KAIST에 갔고 나머지 8명은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갔다”며 “당시에는 학생들에게 대입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고, 대입에 대한 걱정이 없다 보니 국제과학올림피아드처럼 과학 마니아들이 할 법한 일에도 시간을 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과학고와 영재고가 늘어나면서 과학 영재라고 해서 KAIST나 포항공대(포스텍), 서울대에 마음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했다.

김주아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은 영재고도 마찬가지라고 동의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2003년에 1개로 시작한 영재학교가 2008년 3개, 2012년 4개교가 추가로 지정되면서 대폭 늘었다”며 “이제는 영재학교가 특수 영재교육기관의 성격보다는 명문대 진학에 유리한 루트 중의 하나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영재학교가 희소성이 있을 때는 대부분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이제는 내신 성적에서 일정 비율 안에 들어야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영재학교의 정체성에 혼란이 생겼다는 것이다.

과학영재교육을 살리려면 과학고와 영재고를 늘리는 정책을 중단하고 오히려 숫자를 확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는 지난해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주최한 한림원탁토론회에 참석해 “8개의 과학영재학교만 남기고 전국 과학고는 모두 일반고로 전환해야 한다”며 “과학고와 영재학교 숫자를 제한하고, 과학 인재를 집중 양성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송 교수는 “현재 과학영재학교와 과학고 상당수는 영재교육 전반에 대한 철학이나 명확한 교육에 대한 비전과 사명감보다는 당시 상황에 따라 탄생했다”며 “이는 한국 초·중학생의 과다한 사교육과 학습을 초래하고 영재학교와 과학고 간 격차 유발, 영재교육기관으로의 기능을 상실한 과학고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이정익 KAIST 원자력및양자공학과 교수도 “과학고나 영재고의 숫자를 줄여서 이런 교육에 필요한 충분한 자원이 진짜 창의적인 영재들에게만 제공돼야 한다”며 “그래야 미래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고가 영재고처럼 커리큘럼(교육과정)을 보다 자율적으로 짤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전국과학고교장단협의회는 교육부에 ‘과학고를 영재학교로 전환해 달라’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영재학교가 국가 교육과정과 상관없이 자유로운 학생 모집과 학사 운영이 가능한 반면 과학고는 교육과정과 교원 임용, 학생 모집방식 등에 제한이 많다. 과학고는 초중등교육법을 따르고 영재학교는 영재교육진흥법을 따른다.

허우석 울산과학고 교장은 “이공계 분야 우수 인재를 선발 목적에 맞게 양성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등에 대한 자율성 강화가 중요한 요소”라며 “과학고가 과학기술 우수 인력 양성을 위한 학교가 되도록 교육과정 자율성 보장과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른 영재학교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