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느낌 담긴 ‘전, 란’… ‘헤어질 결심’의 향기가

이호재 기자 2024. 10. 15. 03:0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짙은 안개가 가득한 바닷가.

두 사람이 서로를 쫓고 쫓는다.

11일 공개 직후 전 세계 넷플릭스 3위(영화 부문·플릭스패트롤 기준)에 오른 영화 '전, 란'에서 관군을 이끄는 종려(박정민)와 의병의 대장인 천영(강동원)이 안개 속에서 정면승부를 벌이는 장면이다.

어쩐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박해일)이 자신이 사랑하던 서래(탕웨이)를 쫓아 안개 가득한 바닷가로 달려가는 장면과 닮았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찬욱, 각본가-제작자로 참여해… 직접 촬영현장서 연기지도까지
‘올드보이’의 두남자 이야기에, 백성 학살은 ‘복수는 나의 것’
색감 활용에선 ‘아가씨’ 연상… 김상만 감독 ‘액션 활극’ 돋보여
박찬욱 감독이 각본, 제작에 참여한 영화 ‘전, 란’에서 관군을 이끄는 종려(박정민)가 안개가 가득한 바닷가에서 결투를 벌이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짙은 안개가 가득한 바닷가. 두 사람이 서로를 쫓고 쫓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비좁은 시야 때문에 상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 모래사장을 밟는 사각사각 소리만이 허공을 가득 채운다.

11일 공개 직후 전 세계 넷플릭스 3위(영화 부문·플릭스패트롤 기준)에 오른 영화 ‘전, 란’에서 관군을 이끄는 종려(박정민)와 의병의 대장인 천영(강동원)이 안개 속에서 정면승부를 벌이는 장면이다. 어쩐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박해일)이 자신이 사랑하던 서래(탕웨이)를 쫓아 안개 가득한 바닷가로 달려가는 장면과 닮았다. 죽은 종려를 안고 울부짖는 천영의 모습은 서래를 찾지 못해 해변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소리치는 해준을 생각나게 하는 것. 이지혜 영화평론가는 “결투를 한 폭의 풍경처럼 그려내는 해무 대결 장면을 보다 보면 마치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라 착각할 것 같다”고 했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쫓아 해무 속을 서성이는 해준(박해일)의 모습. CJ ENM 제공
‘전, 란’은 박 감독 작품인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에서 미술감독, ‘친절한 금자씨’(2005년),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년)에서는 광고디자인을 맡은 김상만 감독 작품이다. 박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진 않았지만, 각본가와 제작자로 참여했다.

박 감독은 각색에 참여하고 직접 촬영 현장에 와서 배우들의 연기까지 지도했다. 판소리의 요소를 끌어들인 장면도 박 감독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2일 기자간담회에서 “시나리오를 일일이 봐주시고 조언해줬다”(김 감독), “촬영 현장에 오신 첫날 발음을 듣고 직접 정정해줬다”(강동원)는 말이 나왔을 만큼 이 작품이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으로 선정된 데엔 박 감독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영화는 조선의 권세 높은 집안 자제 종려와 그의 몸종 천영이 서로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그린다. 종려는 천영이 자신의 가족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천영은 종려가 자신이 노예 신분을 벗는 과정을 막았다고 오해한다. 복수를 다뤘다는 점에서 ‘친절한 금자씨’를, 두 남자의 이야기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올드보이’(2003년)를 떠올리게 한다. 붉은색 군복(종려)과 푸른색 도포(천영)의 색감 활용에선 흑백 대비를 주로 썼던 ‘아가씨’(2016년)가 생각나는 등 미장센도 돋보인다.

계급 갈등을 다뤘다는 점도 눈길이 간다. 예를 들어 선조(차승원)처럼 무능한 지배계급은 가난에 찌든 백성이나 자신들이 지배하는 노예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천영처럼 재능 있는 피지배계급은 신분제도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지배계급을 증오한다. 조재휘 영화평론가는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종려가 결국 지배계급의 편에 서서 백성들을 학살하는 모습은 ‘복수는 나의 것’(2002년)에서 중소기업 사장 박동진(송강호)이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라는 대사를 생각나게 한다”고 했다.

조선 의병과 왜군이 싸우는 장면에서 선보이는 시원한 액션 활극에선 김 감독 특유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듯 촬영하는 ‘부감 숏’, 피사체를 저속 촬영해 잔상을 만드는 ‘스텝프린팅’ 등 기법을 활용했다. 김 감독은 “박 감독이 연출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지켜봐 줬다”며 “액션을 위한 액션이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칼싸움도 캐릭터의 감정이 서로 부딪치는 장면으로 연출했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