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정부의 왕이 된 승화후 왕온

- 삼별초, 진도에 정부를 세우다 -
삼별초는 처음 무신집권자였던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유래한 군사 집단이다. 야별초는 1219년(고종 6) 최우가 권력 유지를 위해 조직한 사병이었는데, 몽골(원나라)의 침략 이후 몽골군을 막아내는 정규군으로 재편된다.
야별초는 이후 좌별초·우별초로 나뉘었다가,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탈출한 자들로 이뤄진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로 불렸다.
삼별초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다. 몽골의 거듭된 침략으로 고려의 정규군이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을 때, 삼별초는 기동성을 발휘해 적진을 기습하거나 매복, 정탐 등의 활동을 벌이며 몽골군에 대항했다. 무신 집권자들이 사병으로 길러낸 부대가 고려의 대몽 항전의 최후 보루가 됐던 셈이다.
고려 정부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고 40년을 버틴다. 그러나 원에서 귀국한 원종은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한다. 개경으로의 환도는 몽골에 대한 굴복이었다.
마지막 무신 집권자였던 임유무가 이에 저항하자, 원종은 삼별초를 회유해 임유무를 암살한다.
개경 환도가 임박하자 몽골과 싸웠던 삼별초는 크게 반발했다. 특히,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병사들로 구성된 신의군의 반발이 격렬했다.
1270년(원종 11), 개경 환도를 발표한 후, 원종은 장군 김지저를 강화도에 보내 삼별초를 혁파하고, 그 명단을 가져오게 했다.
이 명부가 몽골군의 수중에 넘어가면 삼별초는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해 6월, 삼별초 지도자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대몽 항전을 결정한다. 이때 배중손 등은 “몽골군이 대거 와서 인민을 살육할 것이니, 무릇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격구장(毬庭)으로 모여라”라고 호소했다.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을 추대해 왕으로 삼는다.
‘고려사’ 승화후 왕온 열전에는 “배중손 등이 위협(핍박)해서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삼고 대장군 유존혁을 상서좌승으로,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임명한다. 고려에 또 하나의 조정, 삼별초 정부가 생겨난 것이다.
왕온은 강화도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태운 천여 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이끌고 전남 진도로 이동했다.
‘고려사’의 배중손 열전에는 “강화도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선박과 군함을 모아 공사의 재물과 자녀들을 모두 싣고서 남쪽으로 내려가니 구포에서 항파강까지 고물과 뱃머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무려 천여 척이었다”라고 서술돼 있다.
삼별초가 항전의 근거지로 택한 진도는 물산이 풍부하고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의 조운로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몽골이 꺼렸던 일본, 중국의 남송과 통교하는데 유리한 장소이기도 했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금사사’(金沙寺)라는 절을 임시 궁궐로 삼는다. 그리고 금사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운다. 진도 삼별초 정부는 전라도 남해안 일대는 물론, 동으로는 부산·김해·마산까지, 북으로는 전주까지 출병해 진압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친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제주도까지 점령하는 등 진압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개경 조정을 위협했다. 의기충천한 삼별초 정부는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는 등 독자적인 외교 활동도 펼친다.
- 왕온, 삼별초 정부의 왕이 되다 -
‘고려사’의 배중손 열전에 의하면 승화후 왕온을 핍박해 국왕으로 삼은 장소가 강화도 저잣거리의 행랑(行廊)이었다.
행랑에서 왕온이 급하게 왕에 오른 것은 추대에 의해서였는지, 핍박에 의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국왕으로 추대된 왕온은 배중손 등과 함께 진도로 이동, 고려 정부에 맞선다.
왕온은 고려 현종의 아들인 평양공 왕기의 8세손으로, 청화후 왕경의 맏아들이다. 동생으로는 영녕공 왕준과 사공 왕정이 있다. 그리고 아들은 수사도 왕환이다. 정1품인 사공과 사도는 공(公)·후(侯)·백(伯)의 아들과 사위에게 봉작 대신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왕온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진도의 용장성이 함락되던 1271년(원종 12) 여·몽 연합군에게 삼별초가 패한 뒤 피살된다.

여·몽 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할 때 왕온의 조카였던 왕희와 왕옹이 여·몽 연합군의 좌군을 홍다구와 함께 이끌고 있었다.
왕희와 왕옹은 승화후 왕온의 아우였던 영녕공 왕준의 아들이니, 왕온에게는 조카가 된다. 왕준은 여·몽 연합군으로 출병하는 두 아들을 불러 큰형님(왕온)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고 특별히 당부한다. 그 내용이 ‘고려사절요’에 “(왕준이) 왕희와 왕옹을 불러서 말하였다. 만약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마땅히 형(왕온)의 죽음을 구하여야 한다”고 나온다.
왕준의 특별한 당부가 있었지만, 왕온의 목숨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왕준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원나라 장수 홍다구가 지휘하는 군대가 먼저 들어가 금갑포구로 향하던 승화후 왕온과 왕온의 아들 왕환을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인근에서 무참히 살해했기 때문이다.
- 진도·제주도가 함락당하다 -
삼별초군에 연전연패를 당하던 고려 정부군은 몽골군과 연합한 후, 삼군(三軍)을 편성해 진도의 삼별초군을 총공격했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을 이끌고 벽파진으로, 왕희·왕옹 및 홍다구는 좌군을 이끌고 장항으로, 대장군 김석과 만호 고을마는 우군을 이끌고 동면으로 들어갔는데, 만여 명의 병력을 태운 전함이 100여 척이었다. 이때가 1271년(원종 12) 5월이었다.
고려 정부군이 공격하자 삼별초군은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김방경과 흔도의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다. 좌군을 이끄는 홍다구가 먼저 올라 불을 지르고 협공하자, 삼별초군은 우군 쪽을 공격했고, 놀란 우군이 중군 쪽으로 도망가려 하자 삼별초군은 전함 2척을 포획하는 등 잠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삼별초군의 승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몽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혼란에 빠진 삼별초군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삼별초 정권이 진도에 수립된 지 9개월 만이었다. 삼별초군을 이끌었던 장군 배중손은 진도 최후의 전투인 남도진성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미 언급한 삼별초 정부의 국왕인 승화후 왕온도 아들 환과 함께 홍다구에게 살해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김통정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탐라(제주도)로 들어간다. 이때 남해현에 웅거하고 있던 삼별초 장군 유존혁은 김통정이 제주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배 80여 척을 이끌고 제주도의 김통정 군에 합류한다.
여·몽 연합군은 김통정의 조카인 낭장 김찬 등 5인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회유했지만 실패하자,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이때 동원된 여몽 연합군은 김방경과 흔도 등이 이끈 만여 명의 병력과 전함 160여 척이었다.
끝까지 맞서 싸운 김통정은 세가 불리해지자 무리 70여 인을 이끌고 산속으로 도피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삼별초 정부의 근거지였던 진도와 최후의 보루지 제주도마저 함락당하면서, 삼별초 항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 삼별초, 오키나와에서 부활하다-
‘고려사’ 등의 사서는 “배중손이 이끄는 진도의 삼별초군이 1271년(원종 12) 고려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제주도로 옮겨간 김통정의 잔여 세력도 2년 뒤 소탕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별초는 삼별초군이 주둔했던 항파두리성이 함락된 2년 후, ‘고려사’의 기록대로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1994년 오키나와를 지배한 옛 류큐(琉球) 왕국의 왕궁인 슈리성과 우라소에(浦添)시의 요도레(왕실 무덤)에서 다량의 기와가 발굴된다.
그 중 눈길을 끈 것은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키와였다.
‘계유년에 고려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암키와가 이역만리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것이다. 또 다량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는 놀랍게도 제작 기법과 형태가 진도 용장성에서 출토된 13세기 수막새와 동일했다.
‘계유년고려와장조’가 새겨진 암키와의 출토는 오키나와가 삼별초와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 장인이 오키나와에 언제 진출했는지를 알려주는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점이었다.
고려 시기 계유년에 해당하는 연대로는 1153년, 1213년, 1273년, 1333년, 1393년이 있다. 최근 일본 고고학계는 기와와 함께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계유년은 제주도의 항파두리성이 함락된 1273년(원종 14)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들 기와는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고려인들이 오키나와 류큐 왕국(15-19세기)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하기도 했다.
750여 년 전 삼별초 정부가 존립했던 진도에는 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진도 용장성과 승화후 왕온 무덤, 배중손 사당과 동상 등이 대표적이다.


진도 용장성은 삼별초가 1270년(원종 11) 진도로 내려와 쌓은 성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성안에 웅장한 석축과 행궁 터, 20여 채 이상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용장성 앞에는 조그마한 기념관과 ‘고려항몽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최근 남도진성 부근에 있던 배중손 장군의 동상과 사당 ‘정충사’도 이전돼 서 있다.

진도군 의신면에는 ‘전(傳) 왕온 묘’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승화후 왕온이 홍다구에 의해 살해되자, 진도 군민들이 그 자리에 시신을 수습하여 묻었다고 한다. ‘전 왕온묘’가 있는 지역은 삼별초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진설리’(陳設里)라 불렸고 진도읍에서 운림산방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왕 무덤재(王墳峙)’로 불리고 있다. ‘전 왕온’ 묘 20m 아래에는 묘 하나가 더 있는데, 왕온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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