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만화일 뿐... ‘도널드덕’ 잡아먹는 ‘미키마우스’ [수요동물원]
’쥐의 제국’ 설치류, 가공할 적응력으로 세계 곳곳에서 번성
수달 등 포식자 없는 곳에서 스스로 포식자가 돼 사냥꾼으로 군림
가엾은 오리의 삶은 여기까지였어요. 갈퀴가 달린 발과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깃털로 한가롭게 물질을 하다가 벼락처럼 덮친 포식자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허연 배를 수면에 내놓고 두 발을 허공에 휘저으며 최후의 저항을 해보지만 전세를 뒤집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 몸짓은 숨통이 끊기기 직전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자취가 되겠죠. 호주 국립공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자연환경보호단체인 National Parks Association-ACT가 최근 수도 캔버라 부근에 있는 제라봄베라 습지 자연보호구역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캐릭터만 다를 뿐 지금도 지구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포식현장 중 하나입니다.
잔혹해보이긴 해도 특별할 것 없을 줄 알았습니다. 오리 몸뚱이를 짓누르고 있는 포식자의 털로 덮인 얼굴을 보니 영락없는 족제비·수달류였거든요. 하지만 같은 현장을 다른 각도와 시각에서 촬영한 다른 사진을 보는 순간 이 포식현장은 뜻밖의 반전을 선사합니다. 혼신을 다해 살아있는 오리를 날오리고기로 만들려는 포식자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꼬리를 수면 밖으로 쳐듭니다. 저 꼬리, 낯설지가 않습니다. 지금도 이 도시 어딘가를 활보하고 있을 쥐의 그것과 흡사합니다. 이 꼬리를 통해 오리를 사냥한 놈은 족제비가 아닌 쥐의 제국 설치류의 일원임이 드러납니다. 다람쥐·햄스터·기니피그랑 같은 집안이라는 말입니다.
극단적 비유이지만 이 상황은 미키마우스(쥐)가 도널드덕(오리)를 잡아먹은 셈이 됐어요. 만화적 상상력이 때로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진 속에서 오리의 혼을 빼앗은 놈은 호주물쥐라고도 불리는 ‘라칼리’입니다. 몸길이는 40㎝에 이르는 비교적 대형 설치류죠. 통상 설치류는 잡식성으로 알려져있어요. 하지만 엄연히 초식 기반 잡식성으로 인식돼왔죠. 이를테면 나무열매·곡식·풀잎 등을 주식으로 삼되 간간이 지렁이나 새알 따위를 곁들이면서 영양을 보충하는 거죠. 그리고 도시로 몰려들어 기반을 잡은 경우에는 사람이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에 연명하기 때문에 잡식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 라칼리라는 놈은 이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엎습니다. 설치류 중 보기 드물게 ‘사냥에 의한 육식’으로 연명하거든요. 놈의 식단표를 살펴볼까요? 수서곤충·물고기·갑각류·조개를 기본으로 하되 개구리와 거북까지 즐겨 먹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오리·논병아리·물닭 등 유순한 물새들까지 곧잘 사냥합니다. 간간이 물풀을 뜯기는 하지만 샐러드 수준의 사이드 반찬에 불과해요. 쥐의 탈을 쓴 수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놈의 별칭 중 하나가 ‘호주수달’일 정도니까요. ‘라칼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환경 적응력으로 지구를 자신들의 터전으로 만든 쥐 제국, 설치류의 파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만만하고 찌질한 동물의 대명사이자 온갖 혐오의 정서가 응축된 존재 쥐의 제국, 설치류! 그러나 이들이 이룬 제국의 창대함은 결코 인간에 못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를 완벽히 압도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설치류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앞니가 죽을 때까지 계속 자라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쏠아서 닳아없어지게 해야 하는 무리들. 이런 좁은 정의 때문에 언뜻 떠오르는 설치류들의 모습은 제한적입니다. 생쥐(mouse)와 시궁쥐(rat), 또는 다람쥐나 햄스터·기니피그예요. 하지만 이 놈들은 설치류 제국의 아주 극단적인 일부일 뿐입니다.
설치류의 시조인 고대 포유류 파라미스의 모습을 화석 등을 통해 추정해보면 제 몸통만큼 기다란 꼬리에 몸통 구조는 너구리와 비슷했고, 머리는 현존하는 카비바라·아구티에 가까운 모습이었어요. 주로 땅에 굴을 파고 살았지만 그 후손들은 나무 위·물가·정글·사막·고산지대 등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그에 맞게 몸의 형태와 식습성을 다변화했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크기도 생김새도 서식형태도 극단적으로 다변화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렇게 다양한 놈들이 ‘쥐 제국’의 일원이 됩니다. 몸을 쫙 펴고 활공하는 날다람쥐와 하늘다람쥐, 집단자살로 알려진 폭주 습성으로 유명한 레밍, 길고 튼튼한 뒷다리로 꼬리를 균형추 삼아 폴짝 폴짝 잘도 뛰어다니는 캥거루쥐와 튐토끼, 기괴하기 짝이 없는 생김새이지만 땅속에서 30년을 장수하는 벌거숭이두더지쥐가 모두 설치류입니다.
뿐만 아니예요. 사슴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몸집으로 아마존 습지를 어슬렁거리는 카비바라와 아구티, 인간의 실수로 원산지 남미를 빠져나와 한국을 비롯한 유라시아 곳곳에서 번성하며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는 뉴트리아, 온몸을 뒤덮은 가시를 삼지창처럼 휘두르며 때로는 표범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실상의 맹수 산미치광이(호저)까지 모두 설치류에 속합니다. 초식에 기반하던 식성도 변하게 됩니다. 지렁이나 곤충, 새알이나 어린 새를 단백질원으로 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라칼리처럼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다른 짐승을 사냥해 잡아먹는 포식자 설치류까지 등장하기에 이른 거예요.
흥미로운 사실은 라칼리가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호주는 전세계에서 드물게 수달이 살지 않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온갖 포식자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환경에서 놈은 식성과 습성을 공세적으로 바꿔가며 사실상 수달과 같은 하천 생태계 포식자의 위치에 오른 것입니다. 이런 가공할 환경적응력을 가진 설치류앞에서 사람이 관련 ‘만물의 영장’임을 자임할 수 있을까요? 뉴욕 등 대도시에서 들려오는 ‘쥐와의 전쟁’ 뉴스는 어쩌면 설치류가 지구상 최강자로 등극하는 한 과정의 단면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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