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윤혜정 서울시무용단장 “속도라는 질문에 춤으로 답하다” [권혜수의 문화텔레스코프]
한국춤의 새로운 좌표를 향한 여정
윤혜정 서울시무용단장 특집 인터뷰
세계는 지금 ‘스피드’ 전쟁 중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단 20분 만에 주파할 수 있는 초고속 열차 하이퍼튜브(HTX), 하늘을 가르는 극초음속 미사일과 하늘 위 전장을 주도하는 스텔스 전투기, 그리고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양자컴퓨터와 같은 4차 산업혁명의 최첨단 기술들. 인류는 지금 ‘속도’라는 과학에 도전하고 있다. 속도가 경쟁력을 좌우하고, 지배력을 정의하는 시대. 느림은 때로 뒤처짐을 의미한다.
하지만 바로 이 속도의 광풍 속에서, 오히려 ‘느림’과 ‘즉흥’을 통해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이가 있다. 바로 서울시무용단의 새로운 수장, 윤혜정 단장이다. 한국무용의 정중동(靜中動) 미학에 ‘속도’라는 현대적 개념을 접목하고, 기존 전통의 틀을 과감히 벗어난 창작 무대 ‘스피드’로 한국무용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다.
서울시무용단장으로서의 첫 공식 안무 작품이자, 한국무용의 정체성과 현대성에 정면으로 맞붙은 이 공연은, 단순한 공연 그 이상이다. 그것은 ‘정적인 예술’이라는 한국춤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선언이자 반론이다. 또한 전통의 궤도를 지키면서도 그 궤도를 탈피하려는 용기의 몸짓이다. ‘스피드’는 4월 24~27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한다. 정적인 한국춤에 역동적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개막 전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으로 화려하게 주목받고 있는 이 대담한 예술적 결단의 중심에는, 무용수이자 안무가, 예술감독이자 교육자인 윤혜정이 있다.
윤혜정 단장은 말한다. “속도의 시대, 한국춤이 품고 있는 고요한 속도감을 무대 위에 풀어놓고 싶었습니다. 정해진 동작이 아니라, 순간을 감응하는 몸짓 속에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담고자 했죠.” 세상이 앞다투어 빠르게 달리는 지금, 그녀는 가장 느린 언어로 가장 빠르게 세계와 대화하고 있다. 한국춤, 그 느림의 언어로 말이다.
한 명의 예술가가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며, 시대와 호흡하고, 전통과 대화를 나누는 일. 그 치열하고도 섬세한 여정은 곧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서울시무용단의 윤혜정 단장은 그러한 예술가다. 국립무용단의 주역무용수에서, 강원도립무용단의 예술감독, 그리고 지금의 서울시무용단 단장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춤 인생은 늘 ‘무대’라는 진실된 공간 안에서 시대와 관객, 그리고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해온 시간의 연속이었다.
![윤혜정 서울시무용단 단장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3/ned/20250423104519370ydcg.jpg)
“한국춤은 느림만이 아닙니다. 내면의 속도를 품고 있죠”
“한국무용은 느림과 고요의 예술이라는 인식,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습니다.”
윤 단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확신에 찬 울림이 있었다.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5살에 무용을 시작한 윤혜정 단장. 50년 전 작은 해변 도시에 생긴 첫 무용학원의 ‘1호 수강생’이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한 춤이었지만, 이내 무용은 그녀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닌 ‘삶의 이유’가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기숙사 대신 주말마다 서울을 오가며 무용 레슨에 몰두했고, 경희대 무용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뒤, 졸업과 동시에 국립무용단의 주역 무용수로 발탁되었다. 무용계에서 ‘정공법’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로지 춤으로만 지금까지의 삶을 살았다.
“춤은 저에게 질문이에요. 늘 새롭게 묻고, 몸으로 답해야 하는 질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사고가 몸을 통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죠.”
윤 단장은 ‘무용수는 몸으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철학 아래, 무대 위에서 솔직함을 가장 중요한 미학으로 삼는다. 그녀는 말한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춤은 늘 진심이어야 하죠. 제가 말로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무대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요.”
그녀의 무용 철학은 서울시무용단 정기공연 ‘스피드’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그녀의 예술관은 단지 동작의 정교함에 머물지 않는다. ‘스피드’라는 작품은 ‘속도’를 주제로 하면서도, 단순히 빠른 움직임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정해진 안무 없이, 무용수의 즉흥 독무로 채워진 5장은 그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같은 음악, 같은 무대, 같은 조명 아래에서 각 무용수는 전혀 다른 ‘속도감’을 구현해 낸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LED 무대, 미디어아트, 즉흥 솔로 등 실험적 요소를 과감히 접목해, ‘정적인 한국무용’이라는 고정관념을 깨트렸다. 공연은 개막 전,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관객들은 한국춤이 담아낸 ‘속도감의 미학’에 열광할 준비를 끝내고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시무용단 ‘스피드’ 포스터.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3/ned/20250423104519654uuef.jpg)
무대는 어두웠다. 단 하나의 빛이 무용수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숨소리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고요 속에서, 단 한 명의 무용수가 그 빛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도감 있는 손끝의 진동, 전신을 타고 흐르는 리듬, 그리고 공간을 가르는 발끝의 선율… 이렇게 예상했다. 그러나 윤혜정 단장의 신작 ‘스피드’는 다르다. 식사의 애피타이저부터 강한 희열의 입맛을 느끼게 한다. 스피드의 첫 무대는 고요와는 달리 감흥을 달구고 폭발하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다. 시작부터 달린다.
![서울시무용단 ‘스피드’ 연습실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3/ned/20250423104519943poti.jpg)
“스팽글과 부채, 그리고 사랑… 무대 위 첫발은 부모님의 손에서 시작됐다”
윤혜정 서울시무용단 단장의 어린 시절, 잊지 못할 무용 데뷔의 순간
“무대를 처음 밟은 그날, 제 옷에는 어머니의 바늘땀이, 부채에는 아버지의 먼 길이 담겨 있었어요”
윤 단장은 유치원 시절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부채춤을 배우며 동네 무용학원 발표회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50년 전 강원도 속초는 지금처럼 화려한 의상실도, 무용 소품점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기차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무용 의상을 준비하기 위해 속초에서 서울까지 무려 8시간을 버스로 오르셨죠”
서울 종로와 동대문 시장을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무대에 입을 의상을 마련한 사람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옷에 달 반짝이는 장식 하나까지 손수 고르셨고, 돌아오신 밤에는 어머니가 그 스팽글을 일일이 바느질로 꿰며 옷을 완성했다. 발표회를 앞둔 그날 밤, 윤혜정 단장의 어린 시절 옷은 온 가족의 정성과 사랑으로 수놓아졌다.
“어머니는 밤새도록 옷에 스팽글을 달아주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반짝임이 무대 조명보다 훨씬 더 따뜻했던 것 같아요”
무대에 오른 윤혜정 어린이는 손에 털이 가장 많아 잘 접히지도 않는 ‘과한 부채’를 들고, 부채춤 솔로를 췄다. 그 부채조차, 아버지의 눈물겨운 선택이었다. 제일 화려하고, 가장 빛나 보이길 바라는 마음에 고른 부채.
그리고 그날, 작은 윤혜정은 반짝이는 의상과 어색한 부채를 들고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그 부채는 정말 잘 접히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걸 들고 춤을 췄던 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부모님의 사랑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죠”

최근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무쇠 관식이’의 금명처럼, 윤혜정 단장에게도 자신을 향한 무한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쳐준 부모님이 계셨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지난해 7월 하늘로 떠나보냈다.
“돌아보면, 저는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여기까지 왔어요. 무대에서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건, 무대 뒤에서 묵묵히 저를 빛나게 해주신 두 분이 계셨기 때문이죠. 아버지께 더 많은 효도를 못 해 드린 게 늘 마음에 남아요”
그녀는 오늘도 무대를 오르기 전,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버지, 오늘도 잘 보고 계시죠?”
윤혜정 단장의 첫 무대는 그렇게, 사랑으로 꿰매진 스팽글과 털 많은 부채, 그리고 부모님의 헌신으로 완성된 무대였다.
그 반짝임은 지금도, 그녀의 무대 위 춤사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예술은 감응이며, 무용은 그 감응을 가장 순수하게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서울시무용단의 수장으로서 그녀가 지향하는 리더십은, ‘자율성과 감응의 미학’이다. 모든 무용수가 고유한 신체 언어를 지닌 예술가임을 인정하고, 안무 속에서도 그들의 내면이 흐르도록 유도한다. 서울시무용단은 점점 더, ‘창작적 공동체’로 변모하고 있다.
“한국무용의 미학은 단지 ‘같은 동작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감정과 에너지, 그리고 몸의 리듬이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그 긴장감이 저는 더 매혹적이에요”
“춤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세상과 다투는 언어입니다”
윤 단장의 예술은 혼신의 시간에서 탄생했다. 대학 시절, 김백봉 선생의 신무용을 배우며 무대 미학을 배웠고, 김정학 선생과의 인연은 무용의 깊이를 재정의하게 했다. 무용수로서, 안무가로서, 교수로서, 그리고 무용단의 수장으로서 그녀가 쌓아온 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서사다.
“완벽주의자였던 제 성격은 무용수로서는 도움이 되었지만, 창작자에게는 오히려 장벽이 되더군요. 그걸 넘어서려는 노력이 저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윤 단장은 자신의 예술적 전환점을 대학교 3학년 시절, 국립무용단의 무대를 직접 보고 나서라고 말한다. 김백봉 교수의 멋진 모습에 막연히 교수의 꿈을 꾸던 시절, 무대를 본 순간 “나는 무대 위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심은 곧 현실이 되었다.
국립무용단에서 쌓은 경험은 이후 강원도립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창작자로, 그리고 서울시무용단의 단장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테크닉, 감정, 철학, 그리고 리더십. 윤혜정의 무대에는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녀는 말한다.
“춤은 정답이 아닌 감응이에요. 각자에게 주어진 ‘무대’라는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춤이 나올 수 있죠. 그 다양성이 예술의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느끼고 표현하는지는 다 다르잖아요. 저는 그 차이가 춤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전통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현재입니다”
윤 단장은 단지 창작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통의 본질을 연구하고, 그것을 시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에도 깊은 열정을 쏟고 있다. 그녀는 서울시 무형유산 제45호 한량무 이수자이다.
윤 단장은 국립무용단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전통의 정수를 체득했고, 이후 강원도립무용단 예술감독과 부리푸리무용단 대표로서 수많은 창작 작품을 통해 전통의 재해석을 시도해 왔다. 조흥동류 중부살풀이 무보집을 발간하고, 영상미디어와 무용 기록에 관한 연구논문도 발표하며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무용가이기도 하다.
“전통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누군가에 의해 춤추어지고, 변화하며, 새롭게 호흡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우리는 과거를 모방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토대로 지금의 춤을 새롭게 써 내려가야 합니다”
윤혜정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전통과 창작, 보존과 실험, 계승과 재해석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녀의 안무는 과거를 소환하되, 현재를 노래하며, 미래를 향한다.
그녀는 전통의 계승자이자 창조자다.
“박물관 안에 머무는 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움직임으로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무용은 감정의 언어이자, 시민과 나누는 공공재입니다”
윤 단장은 무용의 공공성과 시민 접근성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야외 시민공연 등 서울시무용단은 점차 시민들과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녀는 그 접점을 ‘예술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춤은 그저 무대 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의 공간으로 내려와야 해요. 학교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춤이 일상처럼 흐를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도 꽃필 수 있어요.”
또한, 그녀는 무용진흥법 제정, 국립무용원 설립, 지역 무용단 체계 정비 등 정책적 기반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특히 어린 세대의 무용 교육 확대는 그녀가 가장 절박하게 말하는 사안 중 하나다.
“이제는 무용도 정책으로 말할 때입니다. 무용진흥법은 무용가들의 권리를 지키고, 미래 세대의 감각 언어를 길러주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윤혜정 서울시무용단 단장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3/ned/20250423104521131vsqe.jpg)
한국춤, 세계를 두드리다–뉴질랜드 무대에서의 울림
윤혜정 단장은 한국무용의 국제적 확장 가능성에 대한 비전도 뚜렷하다. 특히 2025년 한-뉴질랜드 자유무역협정(FTA) 10주년을 기념해 5월 29일, 6월 3일에 열리는 국제문화교류공연 ‘아리랑, 뉴질랜드의 심장을 두드리다!’에 서울시무용단이 초청된 것은 그녀의 예술 외교 감각과 무용의 공공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전통과 창작을 아우르는 무대로 구성된 이번 공연에서 서울시무용단은 한국춤 특유의 정서와 에너지, 그리고 ‘느림 속의 속도’라는 미학적 가치를 현지 관객에게 강렬히 각인시킬 예정이다.
윤 단장은 말한다. “한국춤은 시대의 정서를 몸으로 번역하는 언어입니다. 문화는 국가 간의 교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공감의 통로이고, 춤은 그 안에서 감정과 기억을 전달하는 가장 원초적인 매체죠.” 그녀는 앞으로도 서울시무용단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 오세아니아, 미주 대륙 등 세계 주요 문화도시와의 협업 무대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 예고했다.

“무대는 생명처럼, 그날, 나는 떨어지며 날았다”
윤혜정 서울시무용단 단장, 남미 순회공연 중 잊지 못할 한 장면
“무대는 늘 예측할 수 없는 공간이에요. 그 속에서 몸과 마음이 함께 긴장하고, 또 기적처럼 반응하죠.”
윤 단장이 국립무용단 시절, 남미 순회공연에서 겪은 아찔했던 순간은 아직도 그녀의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 새 없이 현지 대사관 만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쌀쌀한 야외 날씨에 파티용 한복을 차려입고 참석한 저녁 바비큐. 하지만 체한 고기 한 점이 그녀의 밤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밤새 숙소에서 끙끙 앓다가 결국 다음 날 리허설조차 포기한 채, 현지의 한국인 한의원을 찾아 급히 침을 맞고, 간신히 공연 시간에 맞춰 무대 분장을 마쳤다. 그야말로 정신력 하나로 버틴 하루였다.
무대는 그녀에게 결코 기다려주지 않았다. 마지막 작품의 대합주 장면, 북의 상수 앞에서 퇴장한 후 장고를 맨 채 하수로 다시 등장해야 했다. 숨 돌릴 틈 없이 무대 뒤를 가로질러 달리는 그 순간—비극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이동식 무대의 일부가 내려앉은 것을 모른 채, 전속력으로 상수 옆 무대를 가로질러 달리던 윤 단장은 그대로 그 틈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다음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장고를 맨 채로 튕기듯 무대 위로 다시 올라온 그녀는, 단 1초의 지체도 없이 하수로 돌아가 정확한 타이밍에 다시 등장했다.
“그때 저는 초능력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한 거죠. 떨어지자마자 튕기듯 올라와 무대 뒤를 돌아 정확한 박자에 맞춰 등장했어요.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돌아보니, 무대 일부가 실제로 내려가 있었고, 자신이 떨어졌던 높이는 눈으로 봐도 아찔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못했던 무대의 변화, 리허설에 참여하지 못한 탓에 알지 못했던 위험이었다. 하지만 공연은 무사히 끝났고, 관객의 박수는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그녀는 그 순간을 ‘무대가 내게 준 훈장’이라 말한다.
“무대는 늘 위험과 마주하지만, 동시에 제 모든 것을 꺼내게 하는 공간이에요. 그날의 사건은 제게 두려움보다는 무대를 향한 절박함과 사랑을 다시 일깨워줬어요.”
그녀는 말한다. 춤이란 단지 움직임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그리고 그날의 아찔한 비상은, 무대 위 예술가들이 어떤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증거였다.
그녀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순간, 정말 초능력이 생겼던 걸까?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그날, 그녀는 떨어지며… 날았다.
교육자로서의 사명, 다음 세대를 위한 무용의 미래
윤혜정 단장의 또 다른 정체성은 ‘교육자’다. 서울종합예술원 전임교수, 경희대·단국대·강원대·충남대 등 여러 대학에서 오랜 시간 후학을 양성해 온 그녀는, 한국무용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선 ‘전문가의 육성’만큼이나 ‘예술에 대한 태도’를 길러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감응은 함께 겪어야 하죠. 춤은 외워서 추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서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그녀는 무용수들에게 ‘정확함’ 이전에 ‘진정성’을 요구한다. 몸의 라인이 아닌, 감정의 깊이로 관객에게 다가가는 춤. 그것이 윤혜정이 가르치는 무용이다.
인터뷰의 말미, 윤 단장에게 후배 무용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녀는 오랜 침묵 끝에 이렇게 말했다.
“무대는 정직해요. 꾸미거나 속일 수 없는 공간이죠. 그래서 자신을 감추지 말고, 오히려 드러내세요. 춤으로, 감정으로, 진심으로.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우리는 더 단단한 내면과 느림의 감각을 가져야 해요. 그게 바로 한국춤의 본질이기도 하고요.”
윤혜정 단장의 춤은 시대를 감각적으로 응시하고, 관객과 깊이 호흡하며, 미래를 향해 정중동의 걸음을 내디딘다. 그녀가 지금 서울에서, 세계를 향해 새겨가고 있는 춤의 궤적은, 곧 한국무용의 내일이 될 것이다.
서울시무용단, 그리고 미래
2024년 서울시무용단의 단장으로 부임한 이후, 그녀는 전통과 창작, 시민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서울시무용단은 2025년 상반기 ‘스피드’(4월 24일~4월 27일)를 시작으로 8월에는 ‘일무’, 11월에 ‘미메시스’를 공연한다. 한국무용의 동시대성을 반영한 컨템퍼러리 춤 작업으로 윤혜정 단장의 ‘스피드’와 ‘미메시스’를 준비하며 예술의 경계를 넘어서는 한국무용 그리고 한국무용을 기반한 공공 무용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윤혜정 무용단장과 함께, 서울시무용단은 한국춤의 동시대성을 품고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단체로서 한국 무용계의 새로운 발전을 선도할 예정이다. 2025년, 그 변화의 선두에는 늘 질문하고 몸으로 답해온 춤꾼 윤혜정이 있다.
“춤은 제게 ‘삶’입니다. 언젠가 그 삶이 멈추는 순간까지, 저는 춤으로 세상과 이야기할 거예요.”
![윤혜정 서울시무용단 단장 [세종문화회관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4/23/ned/20250423104521585ekdw.jpg)
글·사진 = 권혜수 우석대 교수
정리 = 박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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