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코르테 포즈
아차. 초구를 놓쳤다. 한가운데, 약간 낮은 코스다. 평범한 포심이었다. 스피드도 그저 그랬다. 시속 92마일(약 148㎞) 짜리다. 그걸 그냥 지켜만 봤다.
다음 공이다. 비슷한 걸 또 던진다. 조금 높았을 뿐이다. 두 번 용서는 없다. 힘껏 배트가 돌았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출구 속도가 104.3마일(약 167.9㎞))이다. 26도의 각도로 발사된다. 385피트(117미터)를 날아 우중간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전광판의 스코어가 바뀐다. 2-3이 3-3이 된다. (14일 다저 스타디움, 김혜성 시즌 1호 홈런)
빠르긴 빠르다. 베이스를 일주하는데 20초도 안 걸린다. 짧은 시간에도 여러 가지 세리머니가 이뤄진다. 바쁘디 바쁜 데뷔 첫 홈런이다.
우선 2루를 돌며 해맑은 포즈로 시작한다. 양손을 흔들며 ‘안녕’ 하는 동작이다.
벤치로 들어갈 때다. 짓궂은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다. 앤디 파헤스, 테오스카 에르난데스가 해바라기 씨를 사정없이 뿌린다. 너무 좋다. 얼마나 당해보고 싶었나. 양팔을 활짝 벌려 기꺼이 맞아 준다.
잠깐. 그전에 하나가 더 있다. 덕아웃에 도착하기 직전이다. ‘데코르테 포즈’를 취한다. 손으로는 V자를 만든다. 그걸 옆으로 눕힌다. 그리고 눈앞으로 쓱~ 훑는다. (이 장면은 TV 중계화면에 잘 잡히지 않았다.)
본래는 오타니 쇼헤이의 CF에 등장하는 포즈다. 화장품을 사용한 연기였다.
그걸 본 키케(에르난데스)가 놀리기 위해 만들었다. 스킨 제품 대신 ‘손가락 V’로 느끼함(?)을 표현한다. 이후 너나 할 것 없다. 다저스 선수들이 홈런만 치면 따라 한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하이 파이브’
물론 가장 눈길을 끈 세리머니는 따로 있다. 다음 타자와 함께 연출한 것이다.
홈을 밟은 직후다. 환영 나온 동료가 격한 동작으로 축하한다. 9번 김혜성의 경우 다음은 1번 오타니다.
데뷔 첫 홈런 아닌가. 그것도 지고 있던 게임의 동점포다. 보통은 격렬한 모션이 나오기 마련이다. 환호와 함께 몸통 박치기, 혹은 강렬한 하이 파이브 등이 보편적이다. 관중석의 환호도 그런 분위기가 어울린다.
그런데 이날은 다르다. 뭔가 예의 바르고, 다소곳하다. 동양의 품격마저 느껴진다.
들어오는 주인공이 한 손을 올린다. 다른 손은 공손하게 떠받들고 있다. 그야말로 예를 다하는 모습이다.
혹자는 그런 반응이다. ‘오타니에게는 왜 저렇게 쩔쩔매냐.’ 하면서 불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중계 화면의 각도 탓이다. 다른 앵글에서 보면 오타니도 똑같은 모습을 취한다. 미리 짠 것 같은 합이다.
이 내용은 우리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았다. 일본 매체 스포츠 호치가 내막을 전해준다.
‘오타니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떠받드는 하이 터치(하이 파이브)를 했다. 한국식 영접이다. 그건 상대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혜성이 평소 그렇게 (하이 파이브를) 한다. 오타니는 그 사실을 야마모토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스넬 형, 예이츠 그분”
사실 김혜성(26)의 깍듯함은 유난스러울 정도다. 지난 2월 스프링캠프 때부터 잘 알려졌다. 유명한 선수들을 지칭할 때면 어김없이 드러난다.
한국 기자와 얘기할 때도 반듯한 경칭을 붙인다. 이를테면 블레이크 스넬(32)은 “스넬 형”, 커비 예이츠(37)는 “그분”이라고 정중하게 부른다. 동갑 개빈 스톤은 “~선수”라고 호칭한다.
우주 대스타 오타니는 다섯 살이나 많다. 그러니 오죽하겠나.
“저 보다 나이가 많.으.시.니.까, 만나면 먼저 인사드린다.”
“매일 출근 하.시.면.서. 보면 한국말도 써.주.시.고….”
그런 존칭을 써가면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첫 대면 때는 역습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MVP는 그라운드에서 동료들과 잡담 중이었다. 지극히 편한 짝다리 포즈였다.
그런데 걸어 나오던 김혜성과 마주쳤다. 뉴 페이스는 걸음을 멈추고 정확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인다. ‘아차’ 싶은 오타니도 이내 정신을 차린다. 자세를 갖추고, 반듯하게 응대한다.
하지만 그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적어도 예절, 인사 쪽으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구나.’ 하는 사실 말이다.
캠프 동안 잔잔한 화제였다. 혜성과 같이 나타난 독특한 ‘하이 파이브’ 동작이 그랬다. 코치, 스태프와 격의 없는 인사를 나눌 때도 꼭 지킨다. 반드시 한 손을 떠받들고, 겸손한 자세로 손을 마주친다.
처음에는 이상한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뜻이 조금씩 알려졌다. 특히 오타니를 비롯한 일본 선수들은 공감하는 폭이 더 깊었다.

홈런 친 다음 타석에 좌우놀이 교체
어제 홈런은 꽤 의미가 컸다. 데뷔 1호라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다. 밀리던 경기의 균형을 맞춘 한 방이었다. 덕분에 야마모토 요시노부는 패전을 면하게 됐다. 심지어 승리 투수(5승)로 신분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우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다음 타석에 교체되고 말았다.
3-3이던 6회 말이다. 상대가 좌투수 호건 해리스를 등판시켰다. 상황은 2사 1루였다. 그러자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김혜성을 멈춰 세운다. 그리고 미겔 로하스를 대타로 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작전이다. 로하스의 2루타로 결승점을 뽑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뒷맛이 쓰다. 동점 홈런을 포함해 2안타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좌우놀이의 희생양이 됐다.
경기 후 인터뷰에 그런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홈런은 치고 싶다는 치는 게 아니다. 욕심내지 않고 그냥 쳤는데, 나온 것이다. 항상 이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었는데, 여기서 첫 홈런을 쳐서 무척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팀에서 내가 할 역할이 어떤 것인지 잘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한다.”
겸손함과 기특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안쓰러움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얘기다. 깍듯한 ‘두 손 하이 파이브’. 그건 오타니 같이 따뜻한 마음에게만 해라. 매정한 감독에게는 그냥 한 손으로도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