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 영입 에인절스, 오타니 그림자 지울까
최근 스토브리그는 속도가 느린 것이 특징이다. 선수 계약이 늦게 이뤄진다. 선수와 구단이 모두 최대한 버틴다. 보통 FA 최대어가 나가면 그 선수를 놓친 팀들이 빠르게 플랜 B로 선회하는데, 지난 몇 년간을 보면 이제 꼭 그렇지도 않다. 플랜A와 플랜B를 보다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다시 또 다른 플랜A를 짜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린다.
올해 스토브리그 첫 대형 계약이 탄생했다. 기쿠치 유세이(33)가 LA 에인절스와 3년 6300만 달러 계약에 합의했다. 지난해 총 규모 5000만 달러 이상 계약은 11건. 이 가운데 12월이 되기도 전에 계약한 선수는 원 소속팀에 잔류한 애런 놀라가 유일했다.
악몽
에인절스에게 2024시즌은 지우고 싶은 시간이었다. 시즌 99패를 당하면서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최하위에 머물렀다. 1961년 팀 창단 이후 단일 시즌 가장 많은 패배였다.
에인절스 단일 시즌 최다패 기록
2024 - 99패 / 승률 .389
1980 - 95패 / 승률 .406
1968 - 95패 / 승률 .414
1974 - 94패 / 승률 .420
에인절스의 추락은 예견된 사태였다. 팀 타선과 마운드를 동시에 책임진 오타니 쇼헤이가 떠났기 때문이다. 2021-23년 에인절스 승리기여도를 보면 야수 1위와 투수 1위가 모두 오타니였다. 1인2역을 해준 선수가 사라지면서 투타 동력을 동시에 잃었다.
2021-23년 에인절스 야수 승리기여도
15.2 - 오타니 쇼헤이
11.0 - 마이크 트라웃
6.0 - 테일러 워드
2021-23년 에인절스 투수 승리기여도
10.9 - 오타니 쇼헤이
7.6 - 패트릭 산도발
4.6 - 리드 뎃머스
에인절스는 '포스트 오타니 시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오타니의 빈 자리를 다른 선수가 대신해야 했는데, 오히려 그 선수들이 자리를 비웠다.
트라웃은 왼 무릎 수술로 29경기 출장에 그쳤고(타율 .220) 팀 내 연봉 1위 앤서니 렌돈도 각종 부상에 시달리면서 57경기밖에 나오지 않았다(타율 .218). 마운드에서도 오타니에 이어 2선발 역할을 해줬던 산도발이 부진을 거듭한 끝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됐다(2승8패 ERA 5.08). 결국 산도발은 지난 주말 논텐더가 됐다.
핵심 선수들이 빠진 팀이 잘 굴러갈 리 없었다. 말 그대로 동네북 신세였다. 8월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2할대 승률 팀은 시카고 화이트삭스(14승37패 .275)와 에인절스(16승38패 .296)뿐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패 오명을 쓴 화이트삭스와 묶인 것에서, 에인절스가 얼마나 나쁜 시즌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새롭게 부임한 론 워싱턴 감독의 야구도 애매했다. 메이저리그 최고령 감독이 된 워싱턴은 베이스런닝과 수비 지도에 일가견이 있다. 메이저리그가 바뀐 규정으로 도루가 늘어남에 따라, 에인절스도 뛰는 야구를 앞세워 약해진 파괴력을 보완할 것으로 내다봤다.
도루는 득실이 명백하다. 성공하면 득점에 가까워지지만, 실패하면 찬물을 끼얹는 플레이다. 그만큼 계산을 잘 세워야 한다. 그러나 워싱턴 감독이 주도한 에인절스의 뛰는 야구는 무리한 시도가 많았다. 전년 대비 팀 도루 수는 72개에서 133개로 증가했지만, 도루 성공률은 72.7%(133/183)에 불과했다. 메이저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2024 팀 도루 성공률 최하위
73.3% - 콜로라도
73.1% - 화이트삭스
72.7% - 에인절스
*리그 평균 79%
수비도 워싱턴 감독의 효과는 없었다. 팀 실책이 전체 네 번째로 많았다(97개). 수비 실점 방지 여부를 따지는 DRS는 플러스 15였지만, 평균 대비 얼마나 많은 아웃카운트를 처리했는지 파악하는 OAA는 마이너스 37이었다. 오클랜드(-46)와 화이트삭스(-42) 다음으로 좋지 않았다. OAA가 이 정도로 떨어지는 건 수비가 그만큼 불안했다는 뜻이다.
재정비
안 좋은 일들로 가득했던 에인절스는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스토브리그 초반부터 종횡무진 움직이면서 팀을 재건하고 있다.
첫 행보가 무려 10월에 나왔다. 선발 그리핀 캐닝을 애틀랜타에 내주고, 한 방이 있는 호르헤 솔레어를 받아왔다. 올해 리그에서 세 번째로 낮은 장타율(.369)을 보강하는 차원이다. 강한 타격을 선호하는 아트 모레노 구단주의 한결 같은 취향도 엿볼 수 있다.
현재까지 메이저리그 계약은 총 15건이다. 여기서 마이클 와카(3년 5100만)를 비롯해 퀄리파잉 오퍼를 받아들인 닉 마르티네스(1년 2105만) 또 애런 범머(2년 1300만)와 제이콥 스탈링스, 브렌트 수터(이상 1년 250만)가 기존 팀과 계약을 갱신했다. 팀을 이동한 새 계약은 10건인데, 이 중 4건이 에인절스가 체결한 계약들이다.
에인절스 FA 계약 선수
11/07 - 카일 헨드릭스 (1년 250만)
11/13 - 트래비스 다노 (2년 1200만)
11/15 - 케빈 뉴먼 (1년 275만)
11/26 - 기쿠치 유세이 (3년 6300만)
사실, 이전까지 에인절스의 계약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팀 전력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팀 전력을 크게 높일 선수들은 없었다.
헨드릭스는 올해 컵스에서 한계를 노출했다(4승12패 ERA 5.92). 구위가 너무 떨어져 풀타임 시즌을 제대로 소화할지도 의문이다. 다노도 리더십을 갖춘 선수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선 포수다(99경기 타율 .238 15홈런). 뉴먼도 선수층을 두텁게 하는 선수일뿐, 우승을 넘보는 팀의 주전은 아니다(111경기 타율 .278 3홈런).
전력이 절대적으로 약한 에인절스는 좀 더 확실한 영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모습을 고려하면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방향성 있는 영입을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기쿠치와 대형 계약에 성공했다. 에인절스가 외부 투수에게 이보다 큰 계약을 안겨준 건 13년 전 C J 윌슨(5년 7750만)이 있었다. 이로써 에인절스는 내년 시즌 반드시 올해 수모를 씻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쳤다.
기쿠치
기쿠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건 2019년. 시애틀에서 데뷔해 토론토와 휴스턴을 거쳤다.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166경기(154선발) 41승47패, 평균자책점 4.57이다. 2023시즌 두 자리 승수와 3점대 평균자책점 시즌을 만들었지만, 항상 아쉬움이 남는 투수였다.
기쿠치의 강점은 구위다.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5마일을 상회한다. 올해 33세 시즌이었지만, 포심 구속은 더 빨라졌다(2022년 94.9마일, 2023년 95.1마일, 2024년 95.5마일). 포심을 뒷받침하는 브레이킹 볼과 체인지업도 장착하고 있다.
투수 개인 능력이 중시되면서 탈삼진이 더 부각되는 시대다. 기쿠치는 이 부문에서 자신이 있다. 최근 3년간 9이닝 당 탈삼진 수가 5번째로 많았다. 이번 시즌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다듬어 데뷔 첫 200탈삼진 시즌도 작성했다(175.2이닝 206삼진). 인플레이 타구에 대한 실책 변수를 최소화하고, 타자와의 승부에서 직접 이길 수 있는 투수다.
최근 3년간 K/9 최다
12.01 - 블레이크 스넬
10.88 - 딜런 시즈
10.70 - 프레디 페랄타
10.70 - 카를로스 로돈
10.36 - 기쿠치 유세이
10.31 - 게릿 콜
*400이닝 이상
올해 기쿠치는 스프링캠프에서 체인지업 그립을 조정했다. 스플릿 체인지업을 버리고, 서클 체인지업을 선택했다. 구속이 2마일 가량 느려졌지만, '구속 변화로 타이밍을 뺏는' 체인지업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성적이 발전했다.
기쿠치 체인지업 성적 변화
평균구속 [23] 88.7 [24] 86.8
피안타율 [23] .254 [24] .194
피장타율 [23] .508 [24] .250
헛스윙률 [23] 19.3% [24] 35.8%
휴스턴 이적 후 반전도 빼놓을 수 없다. 휴스턴은 트레이드 마감시한에 유망주 3명을 내주고 기쿠치를 데리고 왔다. 그때만 해도 휴스턴이 "너무 무리했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기쿠치는 보란듯이 한 단계 도약했다(10경기 5승1패 ERA 2.70).
투수 육성에 탁월한 휴스턴은 기쿠치의 잠재된 능력을 이끌어냈다. 기쿠치는 토론토에서 슬라이더 대신 커브에 집중했는데, 휴스턴은 기쿠치의 슬라이더가 핵심 무기라고 판단했다. 이에 토론토에서 16.9%였던 슬라이더 비중이 휴스턴에서는 37.2%까지 상승했다. 특히 9월에는 포심보다 슬라이더에 더 의존했다(포심 36.6%, 슬라이더 38.9%).
문제는 피홈런이다. 기쿠치는 항상 피홈런에 발목을 잡혔다. 최근 3년간 9이닝 당 피홈런 1.52개는 세 번째로 많은 수치다(랜스 린 1.68개, 오스틴 감버 1.60개). 최근 3년간 평균자책점이 4.24인데, 피홈런을 중립화시킨 xFIP가 3.61이다. 이건 피홈런을 줄였을 때 지금보다 안정적인 투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피홈런 약점은 좋았던 휴스턴에서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9이닝 당 피홈런 토론토 1.32개, 휴스턴 1.20개).
도전
기쿠치가 휴스턴에서 보여준 모습은 믿을만할지도 모른다. 휴스턴도 기쿠치와 계약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만약 휴스턴에서의 활약이 우연이었다면 미적지근했을 것이다. 그러나 휴스턴은 우선순위 과제가 있었고(알렉스 브레그먼) 그 사이에 기쿠치는 예상보다 훨씬 좋은 계약을 따냈다.
에인절스는 기쿠치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다른 팀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원래 기쿠치는 블레이크 스넬과 맥스 프리드 등이 계약하고 나서야 접근하는 팀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일찌감치 계약을 끝낸 건 에인절스의 조건이 그만큼 좋았다는 것이다.
관건은 기쿠치가 휴스턴 시절 피칭을 유지할 수 있을지다. 가성비가 괜찮은 투수로 여겨졌지만, 에인절스가 보장한 연 평균 2100만 달러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몸값 대비 준수한 투수에서, 몸값에 걸맞은 성적을 올려야 하는 투수가 됐다.
기쿠치는 선발진의 1선발을 맡아줘야 한다. 한 번도 견뎌본 적이 없는 무게감을 감당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기쿠치는 새로운 홈구장 에인절스타디움에서 통산 평균자책점이 8.12에 달한다(37.2이닝 34자책). 5경기 이상 나온 구장들 중 가장 나쁜 성적이다.
휴스턴에서 확인됐듯 기쿠치는 구단과 코치들의 지도가 중요하다. 에인절스도 휴스턴처럼 기쿠치에게 적합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휴스턴에서 좋아졌으니, 에인절스에서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기쿠치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동반돼야 한다.
올해 에인절스는 자존심을 구겼다. 오타니를 지역 라이벌 다저스에 뺏긴 데 이어 다저스의 우승과 오타니의 MVP까지 지켜봤다. 자극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이 상황이 기폭제가 되어 다양한 영입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오타니의 고교 선배' 기쿠치가 에인절스로 왔다. 기쿠치가, 또 에인절스가 오타니의 향수를 지울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