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데바 수입'에 이은 최악의 악수(惡手), '의대 5년제'[기자수첩]
"정책방향 동의 못해도 '의료개혁에 진심' 믿고 싶었지만"…배신감 토로
원칙대로 하자니 '대규모 유급→의사공급 중단' 딜레마에 무리수 둔 교육부
비판 거세자 急철회…"전문가로 존중받을 수 있다면 시키지 않아도 돌아올 것"
"제가, 지난 8개월은 정부를 짝사랑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지난 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 막바지에 들은 '사직 전공의'의 발언에 흠칫했다. 이날 참고인 자격으로 보건복지부 국감에 출석한 대한의사협회(의협) 임진수 기획이사는 향후 전공의들의 복귀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지 묻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조금 길게 말해도 되겠냐"며 대뜸 이 같이 말했다.
'짝사랑'이라니. 지난 2월부터 계절이 세 번 바뀌도록 정부와 서로 "국민 생명을 볼모 삼지 말라"며 강(强)대 강 대치를 벌여 온 의료계, (현 의협 집행부라곤 하나) 그 중 대정부 노선이 가장 강경한 전공의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달달한 단어가 아닌가. 그런데 연이은 임 이사의 얘기에는 실연 후 고해(告解)처럼 들리는 대목이 일정 있었다.
임 이사는 정부가 과거 의·정 합의를 무시하고 의대 증원을 밀어붙이며 '우리는 의료개혁에 진심'임을 강조할 때, "그래도 믿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모르는 정부의 원대한 계획이 있겠"거니 했지만, 돌아온 것은 대학병원 교수들의 집단사직 등이 현실화되면 '전세기로라도 환자를 실어 나르겠다'거나 의대 해부실습에 쓰이는 카데바(교육용 시신)의 '해외 수입'도 고려하겠다는 말들이었단다. 결국 '두 번 속으면 속은 놈이 바보'란 현타(현실 자각 타임)만 남았다는 임 이사의 얼굴은 분노보다는 깊은 상실감에서 비롯된 체념에 가까워 보였다.
응급실 위기가 대두된 추석 연휴를 앞두고 '피 나고 열이 나도, 병원에 전화해 중증도를 문의할 수 있으면 경증'이라던 복지차관의 비공식 지침에 대해 "정상적인 의대교육을 받은 의사로서, 어떻게 (정부가) 이렇게까지 우리를 모욕할 수 있나" 싶었다던 그의 말 속에 힌트가 있었다.
'정상적 의대 교육'. 한 시인은 '(짝)사랑은 실망의 동의어'라 했지만, 지금의 전공의·의대생 이탈을, 단순히 기대와 다른 정부 정책에 맘 상해 벌이는 시위로만 간주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임 이사는 지난 주말 교육부의 발표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의대 5년제' 논란을 두고"교육부 장관의 배임(背任)"이란 표현까지 썼다. 인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학기 내내 엄청난 암기량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로 악명 높은 의과 교육과정 6년(예과 2년·본과 4년)의 단축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 의대생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서가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상당수 의대는 학생이 수업일수의 4분의 1 또는 3분의 1을 넘겨 결석하면 F학점을 주고 F가 하나라도 있으면 유급 처리된다. 정부로서는 원칙대로 하자니 연 수천 명의 의사 공급이 끊기게 된 데다, 내년 예과 1학년은 기존 학생들까지 7500여 명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것이다. 이미 지난 7월 유급 판단시기를 달리 적용(학기 말→학년 말)하는 등의 '편법'을 허용했는데도 해결이 요원하자, 내년도 복귀 전제로 휴학을 승인하되 아예 이 공백을 제도적으로 소거해 버리겠다는 게 정부의 아이디어였다.
'의대학사 정상화'란 미명 아래 나온 이 비상대책이 올 2학기 기준 40개 의대 재적생 출석률이 3%도 채 안 되는 상황(2.8%, 1만 9374명 중 548명)에서 대규모 집단유급을 막기 급급한 고육책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명징하게 드러낸 것은 설화(舌禍)의 당사자인 교육부다.
미국도 '전시상황이나 파병 등의 특수상황'에서 군의관의 조속한 배출을 위해 커리큘럼을 압축적으로 운영하기도 한다는 다소 황당한 설명에 이르면 △전시에 비견되는 이 사태를 초래한 주체는 누구인지 △애당초 의대 증원을 추진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교육과 수련의 질(質)이 담보되지 않은 채 의사 수만 늘리는 것이 정부가 공언한 지역·필수의료 확충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간 의대 교수들과 전공의, 의대생이 의대 2천 명 증원에 반대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교육 질 하락' 우려였다. 서울의대 학생회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금도 서울대에선 해부학 실습이 조당 10명씩 진행되고 있다며 카데바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학생이 서너 명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정부는 국립대 등을 지역 필수의료 거점으로 육성하겠다며 대규모 인력·시설 확충 지원을 약속했지만, 강원대병원장의 전언처럼 교수들의 번아웃(소진)·심각한 의료 적자에 직면한 국립대병원들은 하루하루 버티기도 버겁다.
관계부처인 보건복지부와의 사전 협의도 물론 없었다. 뒤따른 '졸속' 비판은 필연이다. 이주호 부총리는 한술 더 떠 "대학들이 할 수 없다고 하면, 안 하는 것"이라며 정책 언급 이틀 만에 포기 의사를 밝혔다. 당시 국감장에서 의대 학장들과 소통하며 고안한 방안이었다고 해명했으나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는 '5년제 불가' 입장을 전달했다고 반박해 '위증 논란'까지 불거진 상태다.
의대 증원에 찬성해온 의사가 국감에서 정부의 의료개혁 현황을 "파탄 지경"이라 진단하고, 환자단체가 당국의 사태해결 의지를 반문하게 된 데엔 증원 강행의도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 정부의 '갈지 자' 행보가 컸다. 국무총리가 말했듯 '사람을 살리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필수의료 의사들조차 정책 지지를 망설이게 된 원인을 내부에서 찾아보길 권하며 임 이사의 의견을 덧붙인다.
"사직 전공의 선생님들은 이 나라에서 수련을 받고 전문의가 됐을 때 전문가도 존중받고 소신껏 진료할 수 있고, 의사로서 살아가는 게 보람 있다고 느껴진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복귀할 겁니다. 지금 돌아가는 모양으론 솔직히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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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이은지 기자 leunj@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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