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는 감히 못 따라와”… 체어맨이 국산차 역사에 남긴 전설

쌍용자동차 체어맨 – 국내 최초 정통 고급 세단의 탄생과 전성기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술을 품고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정통 고급 세단. 체어맨은 국산차 역사상 가장 야심차고, 동시에 가장 극적인 운명을 겪은 차였다. 출시 당시의 찬란한 전성기부터 고난의 시기, 체어맨W로 이어지는 변화까지, 쌍용차 체어맨의 20년을 되짚어본다.

벤츠 기술로 시작된 국산 고급차의 야망

1997년 등장한 쌍용자동차 체어맨은 국산 최초의 정통 고급 세단이자, 쌍용차의 첫 승용차였다. 개발에는 약 4,500억 원이 투입됐으며, 당시 제휴 관계였던 메르세데스-벤츠의 플랫폼과 엔진을 그대로 가져와 완성도를 높였다. 기반은 벤츠 W124, 디자인은 W140 S클래스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파워트레인은 벤츠의 직렬 4기통 2.3L, 직렬 6기통 2.8L·3.2L 엔진이 적용됐고, 각종 안전·편의 사양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체어맨의 완성도와 가격 경쟁력을 우려해 수출 제한을 요청했고, 결국 체어맨은 내수 전용 차량으로만 판매됐다. 그러나 벤츠 기술력을 기반으로 ‘국산 벤츠’라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며 고급차 시장에 안착했다.

IMF를 뚫고 핀 꽃, 고난 속의 체어맨

체어맨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속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출시 하루 만에 1,000대 이상 계약을 달성했다. 그러나 개발 비용으로 인한 자금난과 외환위기의 여파로 쌍용차는 대우그룹에 인수된다. 이후 체어맨은 '대우 체어맨'으로 판매되며, 대우자동차의 영업망을 등에 업고 판매량이 더욱 증가했다.

2000년대 초반, 현대의 초대형 세단 ‘에쿠스’가 등장하며 체어맨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체어맨은 꾸준한 상품성 개선과 품질 향상으로 2005년까지도 연간 15,000대 이상을 팔며 내수 시장에서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상하이차 인수와 체어맨W의 등장

2003년, 쌍용차는 중국 상하이자동차(SAIC)에 인수되면서 또 다른 고비를 맞는다. 그럼에도 체어맨은 ‘뉴 체어맨’을 거쳐, 2008년 ‘체어맨W’로 완전한 변화를 시도했다. 체어맨W는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W220) 기반의 새 플랫폼을 채택하고, 국산차 최초로 V8 5.0L 엔진과 상시사륜구동 시스템을 도입했다.

1세대 체어맨

디자인은 보수적이지만 중후한 감각을 지녔고, 하만카돈 오디오,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 레이더 크루즈 컨트롤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첨단 사양이 탑재됐다. 이 시기 체어맨은 국내 고급차 시장에서 다시 한 번 경쟁력을 확보하는 듯 보였다.

1세대 체어맨 실내

무너져간 체어맨, 그리고 쓸쓸한 퇴장

하지만 쌍용차는 상하이자동차의 ‘먹튀’ 논란 속에 투자 없이 기술만 유출당한 채 2009년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구조조정과 노사갈등 속에서 ‘쌍용차 사태’가 발생하며 회생은 요원해졌다.

이후 체어맨W는 2011년 페이스리프트, 2014년 카이저(Kaiser)로 명맥을 이어갔고, 하위 모델 ‘체어맨H’는 구형 플랫폼을 기반으로 저가형 고급 세단 시장을 노렸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현대차의 ‘제네시스’ 브랜드가 본격 론칭되면서 체어맨의 존재감은 빠르게 퇴색됐다.

뉴 체어맨 W

결국 2017년 체어맨W 생산이 종료되었고, 2018년 3월을 끝으로 판매도 중단되며 체어맨은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체어맨의 이름은 계속될까?

체어맨은 쌍용차에게 단순한 차가 아닌 브랜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모델이었다. 상하이차, 구조조정, 시장의 흐름 변화 속에서도 체어맨은 쌍용차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20년을 이어왔다.

체어맨 W

쌍용자동차는 여전히 체어맨의 부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최종식 당시 쌍용차 사장은 “체어맨 후속은 초호화 대형 SUV로 개발 중”이라고 밝혔고, 실제로 2021년 등장한 'KG 모빌리티' 체제로의 전환 이후, SUV 중심 라인업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체어맨 H

체어맨, 국산차의 야망이자 한계였던 차

체어맨은 국산차의 기술적 도전이자 마케팅 승부수였다. 벤츠 기술을 도입해 국산차의 품격을 한 차원 끌어올렸고, IMF와 대우그룹 해체, 상하이차 먹튀 논란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글로벌 브랜드와 자본의 한계를 뛰어넘기엔 쉽지 않았다. 화려했던 출발만큼이나 쓸쓸했던 퇴장이었지만, 체어맨은 여전히 한국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특별한 모델로 남아 있다.

국산차 역사에 있어, 체어맨은 실패작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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