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지원법은 독이 든 음식… 보조금 받고 기업 경쟁력 뺏길 우려”[현안 인터뷰]

김만용 기자 2023. 3. 1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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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사태때 구원투수 역할 임창열 전 부총리
공정기술까지 다 공개하라니
TSMC도 그 ‘독약’ 안먹을 것
중국 시장도 미국 기술도 포기못해
기업·정부 힘 합쳐 대응해야
미·중 반도체 패권 명운 걸고
한국은 대만에 주도권 뺏겼는데
세제지원 적으면 어찌 이기나
‘재벌 특혜’ 식으로 몰면 안돼
기업 죽으면 노동자 권익 무슨 소용
책임질 줄 아는 쟁의문화 정착돼야
임창열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주변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다가 긴박했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박윤슬 기자

1997년 12월 3일은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서글펐던 날이다. 그날 대한민국을 대표해 임창열(79)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저승사자 같았던 장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차관 제공 업무협약에 서명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악수했다. 사람들은 이날을 ‘국가부도의 날’로 부른다. 당시 임창열 전 부총리는 구원투수와 같았다. 국가부도의 위기 앞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11월 강경식 부총리를 전격 경질하고 통상산업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던 그를 위기 극복의 해결사로 등판시킨 것이다. 글로벌 복합위기와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벌어지는 대혼란기 속에서 어느덧 팔순을 눈앞에 둔 임 전 부총리를 만났다. 경제·산업정책 전문가로서 치욕스러운 IMF 외환위기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공직 인생을 살았던 임 전 부총리만큼 한국 경제에 의미 있는 조언을 해줄 적임자도 드물 것이다. 그와의 현안인터뷰는 지난 8일 서울 송파구의 한 카페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될 것으로 전망하나.

“침체로 가는 상황은 맞는 것 같다. 지난해도 한국의 경제성장이 별로였는데 올해는 더 안 좋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쟁 소용돌이가 한국 경제를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있다. 미국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 것도 문제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 대해선 중국에 투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걸 감안하면 앞으로 중국 시장을 포기하라는 요구까지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우리 경제는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은 대한민국 경제의 제1 주력 산업이다. 지금은 반도체 산업의 위기이자 우리 경제의 위기다.”

―민간 기업이 미·중 사이에서 어느 한 나라를 선택할 수 있을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 기업은 중국의 시장도, 미국의 기술도 포기할 수 없다. 지혜를 짜내야 한다.”

―미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적인데.

“대만 TSMC 창업자(모리스 창 회장)가 ‘돈으로 반도체 산업을 일으키려는 미국의 생각이 순진하다’고 했다는데 동감한다. 저는 미국의 반도체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 정책은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미국은 인건비 등의 면에서 결코 아시아를 이길 수 없다.”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외국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대신 생산시설 정보 공개와 초과이익 공유 등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것은 독약이 든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반도체 공정 기술도 다 공개하라는데 그걸 우리 기업이 왜 (그런 요구를) 받아야 하는가. 미국이 계속 해당 조건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미국의 보조금을 받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나라가 스스로 보조금을 줘서 경쟁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이 제일 답답할 것이다. 기업과 정부가 힘을 합쳐야 한다. 관련 협상도 정부 차원에서 나서야 한다. 세계무역기구(WTO) 차원에서 부당한 보조금 문제를 다룰 필요도 있다.”

―독약이 든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되나.

“자칫하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다 빼앗길 위험성이 크다. 미국이 앞으로 또 무엇을 요구할지 알 수 없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지금 당장 공장을 짓는 것은 아니다. TSMC도 그 독약(보조금)을 안 먹을 것으로 본다. 우리 기업들도 보조금이라며 덥석 받을 일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가 무엇을 해야 하나.

“미국도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25% 해준다. 우리나라는 15%를 세액공제해주는 법안도 국회 통과가 안 됐다. 이래선 세계에서 경쟁할 수 없다. 미국은 자국의 패권을 반도체를 통해 유지하려고 한다. 중국도 나라의 명운을 걸었다. 한국 기업들은 대만 기업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런데도 세제 지원을 다른 국가보다 적게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겠나. 세액공제를 재벌에게 특혜를 준다는 식으로 몰고 가면 안 된다.”

―윤석열 정부가 규제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규제개혁은 역대 정부가 추진해 왔지만 늘 기대 이하의 결과를 낳았다.

“규제에는 이득을 보는 그룹이 있다. 공직자도 그 그룹 중 하나다. 또 규제 때문에 득을 보는 기업도 있다. 이 사람들이 늘 규제개혁을 반대한다. 그런데 그건 문제가 아니다. 다 극복할 수 있다. 지금 가장 심각한 것은 국회에서 규제를 양산하는 게 문제다. 정부의 입법은 규제 심사를 받는다. 그런데 국회의 규제는 심사가 안 된다. 이 사태가 심각한 것이다. 국회의장 직속으로 국회 규제를 거르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이를 막아야 한다.”

―노동개혁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노동자의 권익은 중요하다. 당연히 지켜줘야 한다. 하지만 우린 시장경제를 하는 나라다. 즉 자본가의 재산권도 인정해야 한다. 그걸 보호해주지 않으면 한국에서 사업을 포기하는 자본가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노동계의 저항이 거세다.

“중요한 것은 우선 우리 기업들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이다. 기업이 죽으면 노동자의 권익이 무슨 소용 있나. 노동자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기업 경영하는 사람들이 보람을 느끼게 해야 한다. 사업해서 돈을 번다고 밥을 10끼를 먹겠나, 20끼를 먹겠나. 좀 더 좋은 집에서 좀 더 좋은 차를 타고 사는 게 전부다. 대기업 회장들이 그 많은 재산을 싸 들고 하늘나라로 갔나. 수많은 기업과 일자리를 남기고 간 것이다.”

―불법파업조장법으로 비판을 받는 ‘노란봉투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기업인 입장에선 불법파업도 화가 나는 일인데 파업 손실을 모두 기업이 감수하라고 하면 사업할 의욕이 나겠나. 한국을 떠나라는 시그널을 줄 수 있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불법파업에 대해선 노조가 책임을 질 줄 아는 노동쟁의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 임기 중 중소중견기업인들이 경영권을 매각하고 해외로 많이 나갔다는 지적이 있었다.

“해외에 사업의 기회가 생겨 나가는 것이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한국에선 사업하기 힘드니 나가는 것이다. 일종의 도피형 투자다. 미국도 리쇼어링 정책을 한다. 한국도 리쇼어링 대책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은) 위험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 외국인 투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떠나간 한국 기업들이 돌아와서 다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할지 고민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잘하고 있다고 보나.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다. 국회 입법이 필요한데 절대 다수당이 더불어민주당이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평가는 국회 평가와 묶어서 해야 한다. 저는 노동관계에선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문재인 정부에서 망가뜨린 원자력 산업을 다시 살려서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높은 점수를 줘야 한다고 본다.”

―저출산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심각한 일이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나라의 지방 도시들이 많이 소멸할 것이다. 후손들이 ‘우리 조상들은 뭐했냐’라고 할 것 같다. 우리나라 평균 출산율이 0.78명 정도다. 놀라운 것은 서울이 0.59명이고 그 중 강남이 0.49명이다. 저출산은 잘살고 못사는 문제가 아니다. 결혼이나 출산을 안 해도 된다는 사고가 팽배한 것을 경계해야 한다. 출산대책을 마련해서 성공한 나라들도 있다. 이들의 국가 대책을 참고해서 거국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민청도 서둘러 설립해야 한다고 본다. 계획적인 이민 정책이 필요하다. 또 아파트의 몇 세대마다 국공립 보육시설을 의무화해 설치하는 안도 고민해볼 수 있다. 재택근무도 출산율을 올리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임 전 부총리는 경기지사도 역임했다. 현재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경기지사 시절 방북을 위해 쌍방울그룹을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경기도와 대북 사업은 어떤 관계가 있나.

“경기도는 북한과 접경하고 있다. 저도 재임 중 경기도 차원에서 대북 기금을 마련했다. 그런데 그땐 원칙이 있었다. 현금은 안 줬다. 대북 지원은 북한 주민들에게 혜택이 가는 것을 해줬다. 인도적 지원이었다. 현금은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핵무기와 미사일로 돌아온다.”

―지금의 민주당 전신인 새천년민주당에 몸을 담은 바 있다.

“제가 경기지사로 일할 때의 민주당과 지금의 민주당은 많이 달라졌다. 미국을 한 번도 안 가본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익만을 바라보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다. 민주당도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도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고 당당하게 재판받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민주당 내에 바른말 하는 분들이 있어 희망이 있다고 본다.”

“IMF 협의자료 등 사료 많이 모아와…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만 정리”

임창열 전 부총리, 내년 자서전 출간 목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산증인인 임창열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내년 출간을 목표로 자서전을 쓰고 있다. 인생의 모든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손으로 IMF 외환위기를 주제로 직접 쓰는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임 전 부총리는 “언젠가 자서전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많은 사료를 모아왔다”며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만 정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 전 부총리는 인터뷰가 있었던 지난 8일에도 종이 가방에 가득 담을 정도의 많은 자료 사본을 기자에게 건넸다. 여기엔 외환위기 당시 의사결정 과정을 추론해볼 수 있는 대통령 보고자료, 정부의 IMF 협의 자료, 대검찰청의 외환위기사건 수사 결과 보고서, 국회 국정조사 자료 등이 담겨있었다.

최근 임 전 부총리는 한 민간연구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 이 연구원이 온라인으로 보도한 한 칼럼이 ‘임 전 부총리의 말실수로 IMF와의 합의가 파기됐고 IMF 구제금융 신청 발표 계획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몰랐다고 거짓말했다’라는 등 기존에 알려진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담은 데 대해 법원의 심판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결국,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임 전 부총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정보도문을 해당 연구원의 홈페이지에 게재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후세의 학자들이 외환위기 역사를 들여다볼 때 허위 사실이 진실인 것처럼 오해하면 안 되니 이번에 법원의 판결을 받아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 전 부총리는 “제가 외환위기를 수습하고 나서 참 마음이 아팠던 부분은 우리 국민이 그렇게 큰 고통을 겪었는데도 책임 있는 정치인과 경제 관료들이 국민 앞에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고 변명하고 있거나 남 탓을 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최근에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또다시 외환위기가 오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들이 많은데 이럴 때일수록 고위 관료들이 국민 앞에 정직해야 경제위기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만용·이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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