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야 할 정신질환?? 널리 알려야 할 정신질환??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정신의학 정보가 유튜브로 유통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정신질환자 여기게 돼.
갑자기 스스로를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보는 현상은 긍정적이지 않아.
또한 정신질환 진단은 단순한 일이 아냐
기계의 정상
자동차의 상태가 정상인지는 설계된 대로 동작하는지 여부에 따라 판정된다. 정상의 규준(norm)은 설계할 때 이미 결정되므로, 자동차의 입장에서는 선험적으로(a priori) 존재한다. 정비사들은 명문화된 규준을 따라 작업하여 비정상 자동차를 정상으로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기술력에 의해 제조된 물건이기 때문에 절대적 규준이 가능하다.
사회문화적 정상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자연발생한 사회문화적 관습들이다. 이것들은 정상적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선험적이고 보편적인 설계도가 없다. 그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다. 한 문화권에서는 비정상인 것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탈레반의 여성에 대한 탄압은 현대 서구의 관점에서는 극히 비정상인 폐습이지만, 이슬람 근본주의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전통적으로 구분된다며 이런 제도를 당연시한다. 이때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는 문화에는 정답이 없다는 입장을 갖는다.
이와 반대로 “인류의 보편적-절대적 가치”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보편성이라는 것은 당대를 주도하는 문화권의 가치일 뿐일 수도 있다. 19세기 말까지 여성의 참정권 없음은 서구에서도 당연한 규범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관습이 사회문화적으로 정상인가?”에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객관적 답이 없다.
신체의 정상
우리 몸은 자연에서 진화한 것이다. 우리 몸을 설계한 엔지니어는 없고 신체 지표(指標)에서 선험적 정상도 없다. 그러나 문화적 관습과 달리, 우리 몸은 구체적 실체다. 이런 경우 정상은 통계적으로 설정될 수 있다. 표준 인구군에서 어떤 지표를 측정하여 규범으로 삼고, 한 개인의 측정치를 이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만 8세 남아의 키는 이런 방법으로 정상 여부가 결정된다.
객관적인 방법 같지만, “표준 인구군”이나 “정상 범위”의 결정은 단순하지 않다. 특히 치료가 필요한 질병을 정의하는 기준은 통계적 유의수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임상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학계 전문가들의 합의가 필요하다. 혈압이 얼마나 높아야 고혈압이라 할지를 합의할 때에는, 혈압에 따른 심뇌혈관 합병증의 발생률 차이라는 과학적 자료가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하지만과학적 자료나 그 자료의 해석이 절대적 중립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제약업계는 질병으로 정의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더 큰 이윤을 기대할 수 있는데, 학계 전문가들은 어떻게든 제약업계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의과학 논문들을 발표할 때는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을 명시하는 것이 윤리적 표준이 되었다.
마음과 행위의 정상
우리는 사회문화적 환경 안에서 활동한다. 한 사람의 행위가 정상인지도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 평가된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회문화적 정상의 객관적인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비정상 행위를 다루는 정신의학에서 이 기준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지만, 환자를 앞에 둔 정신과 의사가 이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신의학계는 매뉴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나 미국정신의학회가 간행하는 매뉴얼은 다양한 정신질환의 진단명과 진단기준을 담고 있다. 정비 매뉴얼에 의거해 자동차의 이상을 정의할 수 있듯이, 미국정신의학회 DSM 매뉴얼에 의해 우리 마음과 행위의 이상을 정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자동차 매뉴얼은 설계에 의거하는데 비해 정신의학 매뉴얼은 전문가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합의가 이루어지는 배경은 인류 보편성이라기 보다는 당대의 서구 문화다. 따라서 과학적 발견이 아닌 문화적 변천에 따라 매뉴얼이 개정되기도 한다. 예컨대 DSM의 2판까지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분류하였는데, 1980년 간행된 3판부터는 동성애를 질병에서 제외하였다. 이때 진단은 자연에 존재하는 질병을 감별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약속일 뿐이다.
매뉴얼의 진단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진단을 위해 사람의 마음을 측정할 때 다시 어려움이 생긴다. 예컨대 주요 우울증의 진단기준 항목 중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죄책감”이 있는데, 이것은 자동차 배기가스 중 질소산화물 농도와 다르다. “과도함”이나 “부적절함”은 자연과학적 기술(記述)에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상식에 의존해서 평가하게 되는데, 개인마다 상식이 다른 만큼 자의성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우울증을 연구할 때는 사전에 워크샵을 통해 평가자들의 주관에 의한 차이를 줄이는 작업을 하지만, 이것은 그 연구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일 뿐 특정 정신기능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정상과 질병
정신적 비정상 여부가 항상 애매한 것은 아니다. 생생한 환청을 듣고, 환청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상식으로도 판단해도 타당할 것이다. 조현병이라는 진단도 가능하고, 의사는 이 상태를 치료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비정상이라고 곧 질병인 것은 아니다. 분명한 비정상이지만 질병으로 봐야 할지 판단이 곤란한 경우도 있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성인(聖人)들의 일화는 현대 의학적으로는 환각을 체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사람이 겪지 않는 비정상적 체험임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질병인지 영적 체험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무당이 신내림 받고 작두를 타는 것은 정신의학적으로는 '해리'(解離)라는 진단에 해당하지만 우리 전통 문화에서는 무당의 일상적 업무로 받아들여진다. 이 사람이 해리를 겪지 못한다면 용한 무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질병으로 보아야 할지 여부는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는 것보다 더 미묘한 측면이 있다.
물론 신체 질환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장신의 농구 스타 중에는 의학적으로 뇌하수체 종양이 있거나 마르판 증후군인 사람들이 있다. 비정상이고 질병으로 진단가능 하지만, 이들이 스타가 될 때 정상에서 벗어난 신체조건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도 분명하다. 질병이 있음으로써 인생의 성취를 이루게 된 것이다.
정신질환이란?
정신질환을 정의하거나 어떤 사람에게 정신질환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마음이 불편해져서 고통받다가 고통이 해결되고 행복해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불편함이 곧 질병이고 해결이 곧 치료는 아니다. 실연당해서 고통받던 젊은이가 새로운 연인을 만나서 행복하게 되었다고 해서, 실연은 병이고 새 연인이 치료인 것은 아니다. 물론 한 사람이 실연당한 후 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었다면, 적응장애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적응장애 진단이 성립하건 하지 않건, 항우울제와 심층 면담 등 정신의학적 기법은 그가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때 병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1960년대 정신의학계에 '반정신의학(antipsychiatry) 운동'이 있었다. 반정신의학은 당시의 반문화(counter-culture)와 겹쳐져서 정신의학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보게 만든 측면이 있지만, 반정신의학자들은 정신질환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깊이 성찰했던 사람들이다. 반정신의학자 토마스 사즈(Szasz, T. 1920~2012)는 “정신질환이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신적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신체적 이상을 질병이라 진단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신적 고통에 질병이라는 진단을 붙일 수 없다는 의미다.
인식론적 성찰이 사라진 오늘날에는, 사람이 겪는 특정 정신 상태를 병이라 정의하고 진단기준을 제시하면 그 상태는 질병이라는 실체가 되어버린다. 위원회의 합의에 의한 도구적-기계적 작업이다. 그 결과 정신의학 진단 매뉴얼은 버전 업 될수록 점점 더 많은 진단명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버전의 매뉴얼에 등재되기 위해 대기중인 잠정적 진단들도 있다.
정신질환 범위의 확장
정신의학 관련 정보들이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마구잡이로 유통되는 세계에 살면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줄어들고 있음은 긍정적이지만, 그동안 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스스로를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보는 현상은 긍정적이지 않다.
한 젊은이는 자신이 최근 겪는 것들이 유튜브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자신은 성인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라는 병에 걸렸다는 확신을 갖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한다. 그는 뇌 MRI나 뇌파 검사를 해서 ADHD를 확진하고, 치료제를 처방해 줄 것을 요구한다. 약을 복용하면 자신이 겪고 있는 “증상”, 즉 직장 업무와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이 사라지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가 섭렵했던 정보에는
ADHD가 갑자기 발병하는 질환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어려서부터 지속되는 행동적 특성이라는 중요한 배경지식은 없었을 것이다.
'병이라 진단하는 것'의 함의
특정한 상태를 질병으로 정의하고, 한 사람에게 진단을 부여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긍정적인 측면은 그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점이다. 치료를 통해 그 사람은 더 행복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에는 진단 없이도 치료하려는 경향마저 있다. 병은 아니지만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 치료(treatment) 받는 것을 건강 증진(enhancement)이라고 하는데, 증진의 정당성은 논란거리가 된다. 스포츠에서는 약물을 사용한 증진을 도핑이라는 매우 비윤리적인 행위로 간주한다. 공정함이 스포츠에서 제일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치가 우리의 일상생활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정신능력을 증진하여 업무 수행이 좋아져서 높은 고과를 받고 더 빨리 진급하는 것은 불공정이 아니다. 자신이 ADHD라며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는 직장인의 심리다. 그런데 공식 진단까지 받게 된다면, 비용은 건강보험에서 지원받고 병원에 가기 위해 반차내는 것도 정당화되니 더 좋다.
그런데 정신질환에서는 진단의 부정적 측면도 매우 중요하다. 진단받은 사람이 낙인(烙印, stigma)찍히고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특정 정신질환을 진단받은 병력이 있다는 이유로 혐오나 기피의 대상이 되고, 잠재적 범죄자 취급도 받는다. 보험에 가입할 때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정신질환 진단을 내릴 때는 진단이 환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정신의학 관계자들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미흡하며, 여전히 환자들은 자신의 병을 숨기려 한다. 그런데 요사이는 성인 ADHD처럼 오히려 당사자들이 스스로 정신질환을 진단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숨겨야 할 정신질환과 널리 알려야 할 정신질환이 구분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웅구는 198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뇌의 유전자 발현 이상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대표저서로 <정신병리학 – 정신병리의 개념적 접근>(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