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크(작가와의 만남)는 최근 출판문화에서 신간을 홍보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작가의 창작 배경과 의도를 직접 듣고 질문할 수 있어 독자들에게 책과 작가를 깊이 이해할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독자들의 반응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책에 대한 독자의 주된 관심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북토크 후 참여자들이 남기는 SNS 후기는 자연스럽게 책과 작가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북토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다. 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이지만, 참여하는 이유와 목적은 각기 다르다. 해당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은 팬부터, 창작을 꿈꾸는 예비 작가, 새로운 책과 다양한 해석을 접하면서, 독서모임에서 다룰 주제를 얻고 싶은 독서모임 리더,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다른 참가자들과의 소통을 기대하는 사람, 다양한 문화행사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람, 어디에나 있는 친구 따라온 사람 등 매번 다양한 사람들이 책을 매개로 한자리에 모인다.
작가 역시 북토크에 참여하는 이유가 다양하다. 평소 글로만 소통하던 독자들과 직접 만나 책에 대한 반응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고, 책에 담지 못한 이야기나 집필 과정에서의 고민을 나누며 책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전달할 수도 있다. 독자들의 질문과 반응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고 다음 작품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으며,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흥미를 끌어 새로운 독자를 만날 수도 있다. 독자뿐만 아니라 다른 창작자, 출판 관계자, 책방지기 등과의 새로운 인연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김사인 시인 북토크 자리는 무엇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시는 잘 말해보려 애쓴 말이다. 시인들은 그런 말을 하려고 발광을 한다."
이 자리는 소중한 인연을 통해 열리게 되었다. 작년 여름부터 크레타를 종종 방문하던 한 어르신이 있었다. 작고 왜소한 체구지만 회색빛의 머리가 매력적인, 종종 독서모임과 북토크에 참여하시며 꼭 책 한 권씩을 사서 가시던 손님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봤더니 오래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이자, 잡지사 기자를 거쳐 출판기획자와 출판평론가로 일해온 출판계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가 지난 연말 내게 한 권의 책을 선물했다. 「김사인 함께 읽기」라는 책이었다. 그의 친구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며 관심 있으면 크레타에서 김사인 시인을 모시고 북토크를 열 수 있으면 좋겠다 얘기했다. ‘김사인’이라는 이름을 보자 옛 추억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시는 없었지만, 국어 선생님이 김사인의 시를 종종 언급했었다. 기획에 관심이 많았던 이십 대에는 박웅현 작가의 「다시, 책은 도끼다」 책을 통해 김사인 시인을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특별한 인연과 계기는 없었지만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손꼽히는 김사인 시인을 모실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연결해준 출판사 대표와 연락하여 최대한 빠르게 북토크 일정을 잡으려 했지만, 정세가 혼란스러워 3월로 일정을 잡았다. 그때 즈음이면 어수선한 시국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거라는 서로의 믿음이 깔려 있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북토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참가자의 면면도 특별했다. 시는 어렵다는 핑계로 참여를 망설였지만 어려워서 안 하고, 못하여서 안 하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싶어 딱 한 문장이라도 들으러 온 사람이 있었다. 김사인 시인의 오랜 팬이라며, 최근 기고한 글에서도 원고에서도 마지막 문장을 시인의 시 ‘봄밤’ 첫 문장으로 마무리했다는 이도 있었으며, 최근 독서모임을 새롭게 시작했는데 함께 읽었던 첫 번째 책이 「김사인 함께 읽기」였다는 이유로 멀리 대구에서 오신 참가자도 있었다. 특히 김사인 시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온 오은 시인의 등장은 이 자리를 더욱 뜻깊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참가자의 소개가 끝난 뒤 김사인 시인은 부산이라는 도시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셨다. 피란 시대의 문단, ‘밀다원 시대’의 김동리를 비롯해 그와 얽히고설켰던 조연현 등의 문인 이야기. 특히 우리나라 초현실주의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지만, 김동리 등에 반기를 들었다가 전후에 사실상 문단에서 배제된 시인 조향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부산의 근현대 문학사를 배우는 수업시간 같았지만, 이는 그가 자신과 부산, 자신과 독자, 그리고 독자와 부산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었다. 이어서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며 ‘한 문장’을 낭독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大韓民國 憲法 前文)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국가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한 수없이 많은 고민이 담겨있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끝없이 언어를 벼려내 내놓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시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가장 완벽한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대한민국 최고의 석학들이 긴 시간 머리를 함께 맞대며 만들어 낸 문장을, 그는 본인의 시도 제쳐놓고 가장 먼저 소개한 것이다. 어쩌면 이 순간만으로 김사인 시인이 전주에서 부산까지 먼 길을 달려온 의미는 완성됐을지도 모른다. 이어서 김사인 시인과 참가자는 그의 시를 한 편씩 낭송하며 우리가 만났어야 하는 이유의 빈칸을 채워갔다.
“글을 쓸 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겠다는 생각은 좋지 않습니다. 나는 기독교는 아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풀잎이 보기에 좋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북토크가 한창이던 어느 순간, 김사인 시인이 자신의 시 〈노숙〉을 낭송했다. 낮고 단단한 음성이 공간을 채우자, 참석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시를 맞이했다.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른 이는 조용히 시를 음미하며. 하지만 한 참가자는 그 순간,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한때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긴 시간을 버텨야 했다. 지친 몸과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하루하루를 견뎠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것만 같았던 나날. 그 시절, 그를 붙잡아 준 것이 바로 〈노숙〉이라는 시였던 것이다. 시간이 흘렀고, 그는 이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분주한 하루를 살아가느라, 과거의 고단했던 시간도, 그 시가 주었던 위로도 자연스레 잊혀갔다. 마치 한때 품고 있던 꿈이, 혹은 낡은 일기장이 어느새 서랍 속에서 잊히듯이.
그런데 이날,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려온 〈노숙〉의 구절이 닫혀 있던 기억의 서랍을 조용히 열어젖혔다.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 어떤가 몸이여’ 한 문장씩 쌓여가는 시구는 긴 시간 묻어두었던 그 시절의 감정을 두드렸다. 고된 밤들을 지나며 이 시를 읽고 또 읽던 순간들이,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했던 문장들이 떠올랐을까. 그는 시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내 손과 몸을 빌어오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이 시다. 내 자식이 그렇듯."
어쩌면 시는, 우리 삶의 한때를 함께 지나간 친구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잊어도, 시는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 책이란 때로 우리에게 어렵고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깊어지는 사유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고,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멈칫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일이 반드시 혼자만의 여정일 필요는 없다. 함께 읽고, 함께 이야기할 때 비로소 그 책이 가진 진정한 빛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북토크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고 작가를 만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책을 마주했는지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그 책이 자신의 삶을 바꿔 놓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여전히 책 속에서 길을 찾는 중이라고 고백한다. 그러한 목소리들을 듣다 보면, 혼자서는 지나칠 뻔했던 문장들이 다시 보이고, 책 속에 담긴 의미가 새로운 결로 다가오기도 한다.
책이 어렵게 느껴질 때, 혹은 그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까 두려울 때, 함께 읽는 경험만큼 든든한 길잡이는 없다. 혼자라면 버거웠을 한 권의 책도,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는 훨씬 따뜻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우리는 책을 읽는 동시에 서로를 읽고, 삶을 읽으며, 한층 더 깊어지는 법을 배워간다.
독서는 단순히 혼자 활자를 좇는 일이 아니다. 작가의 생각을 만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비로소 완성되는 경험이 된다. 그러니 책을 다 읽지 않아도 괜찮다. 완벽하게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처음이라 망설여진다면,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남고, 작은 의문 하나라도 떠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 사유와 자유의 시간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bookspace.cr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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