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진 화포 부재, 국산화 절실
1970년대 초 대한민국 군은 미군이 제공한 낡은 105 mm 견인포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 화포는 이미 생산이 중단된 장비였기에 부품 수급과 정비가 어려웠고, 북방의 화력 증강 속에서 우리의 포병 전력은 점점 밀리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자 군 출신인 박정희는 이러한 열세를 타개하기 위해 대구경 화포의 국산화를 시급 과제로 판단했고, 1972년 병기개발 시연회를 계기로 105 mm 견인 곡사포 개발을 즉시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독자 군사기술 개발에 소극적이었고 설계도면 등 핵심 기술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에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진은 설계도 없이 미제 포를 분해·분석하며 역설계의 길을 걸어야 했다. 포신 가공과 내강 제작에 필요한 정밀 기계조차 국내에 갖춰져 있지 않았고, 연구진은 밤낮없이 창의와 끈기로 불가능에 도전했다.

‘기계 없으면 만들어라’ 연구진의 결단
설계 부재와 설비 부족이 현실이었지만, 오수석 연구소장은 “기계가 없으면 만들어서 써라”고 외치며 연구진을 독려했다. 서울대 기계과를 갓 졸업한 젊은 연구원부터 채용되어 부품 목록을 작성하고 제작 공정에 참여했다. 주 · 부조 기계는 진주의 대동준공업이 담당했고, 포신 가공은 구로동의 대한중기가 맡았다.

마침내 1973년 3월 구로동 공장에서 총조립을 개시했고, 시제품은 서울 거리 견인을 통해 일반에 공개되며 연구진들에게 큰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1973년 6월 25일 시사회에서는 곡사·직사 시험 모두 우수한 명중률을 보여줬고, 박정희 대통령은 개발진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다. 이 순간은 단순한 무기개발을 넘어 대한민국 기술자립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KH178의 제원과 전력화 의미
KH178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105 mm 견인곡사포로, 칼리버 38 배율급으로 개발되었으며 사거리는 통상 HE탄 기준 약 14.7 km, RAP(로켓보조탄) 사용 시 약 18 km까지 확장 가능했다. 또한 NATO 및 미군 표준 탄약을 운용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호환성과 실용성 모두 확보했다.

이 곡사포는 한국이 외국 무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절을 끝내고 국내 방산업체와 연구기관이 협업해 완성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였다. 그 결과는 훗날 국산 주력 자주포 체계인 KH‑179, 그리고 자주포 개발로까지 이어지며 한국 방위산업의 초석이 되었다. KH178의 사례는 단순한 무기체계의 개발을 넘어 국가 기술주권 회복의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국산화의 상징이 된 군산복합 생태계
KH178 개발 과정에는 단지 설계·제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 부품·가공 산업 전반이 군수체계로 유입됐고, 포병 · 기계 · 기술자들이 새로운 역량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 주 · 부조 기계 생산, 포신 가공, 설계 역량 확보 등이 산업 전반에 파급됐고 이를 통해 현대위아 등 방산기업이 국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또한 KH178은 수출 실적까지 확보하며 한국 방산산업이 세계 무대에 도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처럼 KH178은 무기체계 자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국가 안보뿐 아니라 산업발전과 기술자립의 상징이었다.

남은 과제와 한국 방위산업의 성장 여정
물론 KH178 개발 당시에도 많은 난관이 존재했다. 설계도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연구진이 해법을 찾았고, 이후 155 mm급으로 전환되면서 KH178 체계는 본격적인 최신화 단계로 넘어갔다. 현대전에서 사거리·정밀도·다탄약 대응력이 중요해지면서 KH178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따라서 한국은 곧 이어 KH‑179, 자주포 K9 등을 개발해 나갔다. 하지만 KH178이 보여준 ‘국산 무기의 가능성’은 한국 방위산업의 성장 궤적을 결정짓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오늘날 한국이 자주국방, 방산수출국으로 위상이 올라간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초창기의 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