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약한 반도체 거인’ 홀로 겨울을 맞다
위기, 위기, 위기, 위기.
이례적인 일이었다. 2024년 10월8일 삼성전자는 ‘사과문’을 냈다. 전영현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장(부회장)은 이날 잠정실적 발표 직후 “오늘 저희 삼성전자 경영진은 여러분께 먼저 송구하다는 말씀 올린다”고 했다. 삼성전자가 실적에 관해 사과문을 발표한 일은 처음이다. 전 부회장은 “많은 분들이 삼성의 위기를 말한다”며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고 말했다. 이 사과문에는 ‘위기’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들어갔다.
2024년 3분기, 삼성전자는 시장 전망치를 1조5천억원 이상 밑도는 ‘어닝 쇼크’를 기록했다. 2024년 3분기 잠정실적은 매출 79조원, 영업이익 9조1천억원이다. 시장은 애초 삼성전자 3분기 영업이익을 13조~14조원대로 전망했다가 지난달인 9월부터 전망치를 큰 폭으로 하향 조정했다.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이 내려앉을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실적 발표 직전, 증권가 전망치 평균은 영업이익 10조7717억원까지 떨어졌다. 삼성전자는 이마저 충족하지 못했다.
엔비디아는 삼성과 일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삼성전자의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엔비디아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가 삼성과 일하지 않는 이유가 핵심이다. 엔비디아는 AI 학습·추론을 빠르게 구현하도록 설계된 AI 학습 반도체 ‘AI 가속기’ 시장의 약 98%를 장악하고 있다. AI 가속기 핵심 부품인 그래픽처리장치(GPU)에서도 약 80%를 점유하고 있다.
AI 가속기는 시스템 반도체인 GPU와 메모리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 등을 붙여서 만든다. 또 다른 시스템 반도체 종류인 중앙처리장치(CPU)가 수학자 한 명이라면, GPU는 초등학생 1천 명으로 비유된다. AI 딥러닝은 수많은 데이터를 단순 연산으로 빠르게 반복 처리해 결과값을 내놓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복잡한 계산을 혼자 하는 것보다 단순하고 쉬운 문제를 1천 명이 계산하는 구조가 적합하다. CPU 시대가 가고 GPU의 시대가 온 것이다.
GPU를 위해서는 연산 속도에 맞춰 빠르게 데이터를 저장했다 꺼내는 메모리 반도체가 필요하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여러 개의 디(D)램을 수직으로 쌓아서 만든 HBM이다. HBM은 연산장치 옆에서 대량의 데이터를 기억하며 보조한다. AI 가속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GPU와 HBM, 이 두 가지는 어디서 만들고 어떻게 조립될까.
엔비디아는 GPU를 개발·설계(팹리스)한다. 제조는 대만 회사 티에스엠시(TSMC)가 맡는다. 나머지 부품인 HBM은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공급한다. TSMC는 이 HBM과 GPU를 묶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작업도 한다. ‘엔비디아-TSMC-SK하이닉스’의 3각 반도체 동맹이 구축된 것이다. SK하이닉스와 TSMC는 HBM과 파운드리에서 각각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점유율은 53%(삼성전자 38%), 파운드리에서 TSMC의 점유율은 62.3%(삼성전자 11.5%)다. 두 1위 회사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AI 가속기로 시장 전체를 장악한 회사가 엔비디아다.
반도체 관련 기업의 성공은 엔비디아 잡기가 관건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여기서 배제돼 있다. HBM과 파운드리 어디에서도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파운드리부터 짚어보자. 삼성전자도 파운드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수율(완성품 중 합격 제품의 비율)이 낮은 탓에 엔비디아를 비롯한 ‘큰손’들의 일감을 수주하지 못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TSMC에 파운드리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 대해 “동종업계 최고이기 때문”이라며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른 업체를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역으로 말하면, 아직 삼성전자의 기술과 품질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2019년 반도체 비전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파운드리에서 TSMC를 제치고 1위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TSMC와의 점유율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 영역에서도 판단을 잘못했다. 2015년 HBM 시장에 나섰다가 불과 4년 만에 해당 팀을 해체했다. 그 당시만 해도 HBM 시장 규모가 작고 전망이 불확실했다. 삼성전자로서는 자신의 주특기인 전통 D램(메모리 반도체의 한 종류)이 잘나가는 상황에서 굳이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릴 이유가 없기도 했다. 이때 많은 인재가 SK하이닉스로 옮겨갔다. 이후 AI 시대가 되면서 HBM 수요가 폭증했고 SK하이닉스가 수혜를 입게 됐다. 현재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기술 격차가 1년 이상 벌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엔비디아로서는 SK하이닉스가 독점적으로 HBM을 납품하는 것보다 여러 공급사를 두는 것이 유리하다. 공급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HBM은 1년 넘게 엔비디아 퀄테스트(품질 검증)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2024년 6월 삼성전자 HBM에 대해 “(아직 검증 절차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시장에서는 당분간 삼성전자의 납품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배구조 개선 요구 터져나오는 삼전
삼성전자의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1위를 점하고 있는 전통 D램에서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다. D램은 스마트폰, 피시(PC) 등에 사용되는데 최근 이 기기들의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그간 삼성전자의 D램을 샀던 중국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D램을 개발하고 있다. 트렌드포스 자료를 보면, 세계에서 중국 기업이 차지하는 D램 생산용량 비중은 2022년 4%에서 2024년 11%까지 급증했다. 모건스탠리는 2025년 말까지 16%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기업이 공격적으로 D램 생산량을 확대한 탓에 자연스레 가격은 하락했고, 업계의 수익성은 전반적으로 악화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중국 메모리 업체의 레거시(구형) 제품 공급 영향으로 실적이 하락했다”고 설명한 배경이다.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현재 AI 반도체 시장은 D램 시장과는 다르다. 규격화된 D램을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파운드리처럼 고객사와의 협업이 중요해지고 있다. D램 반도체 시장에서 줄곧 1위를 달렸던 삼성은 변화된 시장환경을 따라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전 부회장은 사과문에서 “가진 것을 지키려는 수성(守城) 마인드가 아닌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도전정신으로 재무장하겠다”고 했다.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요구도 크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논평을 통해 “이재용 회장과 정현호 부회장은 미등기임원”이라며 “(주요 의사결정을 하지만) 등기임원은 아니어서 최근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부담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재용 회장 등이 등기임원이 돼 책임경영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탈엔비디아를 향해 가자
최근 일부 증권사는 삼성전자가 4분기에도 ‘역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실적이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4분기 영업이익 전망치를 8조원대까지 떨어트렸다. 단기간에 SK하이닉스의 HBM 기술력을 따라잡을 가능성이 작고, 삼성전자 파운드리에 큰 물량을 맡기는 회사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또 연말에는 스마트폰 비수기가 기다리고 있어, D램 판매량도 장담할 수 없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나홀로 반도체 겨울’을 맞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글로벌 투자 은행들은 삼성전자를 두고 ‘허약한 반도체 거인’이라고 표현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10월22일까지 30 거래일 연속 삼성전자를 순매도했다. 역대 최장 기록이다. 삼성전자 주가는 5만8천원 아래로 떨어지며 이틀 연속 52주 신저가를 갈아치웠다.
삼성전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탈엔비디아’가 돼야 한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하지만 엔비디아 납품도 달성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삼성전자의 겨울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주빈 한겨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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