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없었으면 역사 달라졌다?…목숨 건 거사, 왜 ‘3일 천하’로 끝났나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1. 6.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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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갑신정변 발발 140주년
다시 돌아보는 그날의 주무대 ‘북촌’
갑신정변 4인방.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직후인 1885년 촬영됐다. 이들의 표정에서 조국 자주근대화의 꿈을 이루지 못한데 대한 절망감이 읽힌다.
1884년(고종 21) 음력(이하 음력) 10월 17일 저녁, 홍영식(1856~1884)이 책임자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이 마련됐다. 홍영식, 김옥균(1851~1894), 박영효(1861~1939), 서광범(1859∼1897), 서재필(1864~1951) 등의 개화당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통신체제 출범을 기념하는 연회장에서 민씨 척족 등 수구파들을 몰살할 계획을 꾸민다.

청나라는 1882년 6월 10일 일어난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의 속국화를 꾀했다. 청은 민비 수구파의 요청에 의해 3000명의 군대를 파병해 반란을 진압한뒤 군대를 계속 주둔시켰다. 그러면서 병권과 재정권을 장악했고 외교권까지 넘봤지만 민비 수구파는 청에 굴종하며 일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1884년 4월, 청불전쟁이 터지고 민씨 일파를 비호하던 청이 조선 주둔 병력 중 1500명을 베트남 전선으로 빼내면서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국을 꾀하던 개화당은 행동에 돌입했다. 친군영(조선말기 수도방위 군대)의 좌영사 이조연(1843∼1884), 우영사 민영익(1860~1914), 전영사 한규직(1845~1884), 후영사 윤태준(1839~1884) 등 4명의 군사령관이 우선 척결대상이었다.

애초 거사일은 10월 20일로 정해졌다. 이미 요란한 거사 계획은 시중에 파다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후영사 윤태준은 개화당 서재필의 이모부였다. 윤태준은 재필을 불러 “박영효가 거사를 한다 던데 듣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서재필은 놀라 대답하지 못한 채 조용히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윤태준이 좌찬성 민태호(1834∼1884)에 이런 사실을 알리자 민태호는 “벌써 오래전에 들었소. 대간에 전해 김옥균을 탄핵하면 반드시 단서가 잡힐 것”이라고 했다.

개화당 정변계획 사전 누설됐지만 수구파도 “설마”하며 대처 소홀
갑신정변의 주무대였던 종로구 견지동 우정국 옛터.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우정국 자리에는 체신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문화재청]
개화당의 지도자 김옥균은 날짜를 앞당겼다. 장소도 처음에는 한규설(1848~1930)의 별장인 취운정(翠雲亭·감사원과 삼청동우체국 일원)이었지만, 우정국으로 조정했다. 개화당의 무력조직은 △김옥균이 정변을 위해 조직한 충의계 장사와 김옥균이 도쿄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시킨 사관생도 등 50명 △친군영 전영 병력 500명 △일본군 150명으로 준비됐다.

정변소문이 퍼져 우정국 연회에는 오직 우영사 민영익만 참석했다. 연회도중 갑자기 밖에서 불이 나고 위험을 느낀 민영익이 나가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민영익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매천야록>은 “(민영익의) 귀가 떨어져 나갔으며 칼이 어깨까지 다치게 했다”고 했다. 독일인 묄렌도르프(1847~1901)가 쓰러진 민영익을 부축해 달아났다.

박영효는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 중희당으로 달려가 “청군이 난을 일으켜 긴박하니 피해야 한다”며 왕을 경우궁으로 옮기고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에게 연락해 일본병력을 경우궁에 배치했다.

낡이 밝자 박영효는 왕이 찾는다고 속여 좌영사 이조연, 후영사 윤태준, 전영사 한규직, 좌찬성 민태호, 지중추부사 조영하(1845~1884), 해방총관 민영목(1826~1884)을 차례로 경우궁으로 불러들여 대청에서 살해했다. 실록은 고종이 연거푸 “죽이지 말라”라고 했지만 명을 듣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고종을 모시던 내관 유재현도 목숨을 잃었다. 유재현이 고종에게 음식을 올리자 김옥균은 “어느 시국이라고 한가하게 수라냐”며 발로 차버렸다. 화가 난 유재현은 “너희가 무엇이 부족해 미치광이 반역을 일으키느냐”고 대들었고 이윽고 김옥균이 칼로 베어 죽였다. 차제에 고종을 시해하자는 말도 나왔다. 개화파를 가장한 심상훈(1854~1907)이 “천하의 악행을 범하려는가”라며 말려 고종은 죽음을 면했다고 <매천야록>은 말한다.

심상훈은 청군사령관 원세개의 지령을 받았고 고종과 명성왕후에 창덕궁으로 돌아가야한다고 몰래 고했다. 창덕궁은 개화당 소수병력으로는 방어가 불리했다.

김옥균은 창덕궁 환궁을 반대했고 명성왕후와 고종은 겨울철 경우궁의 방한시설이 변변치 못하다며 오전 10시 일단 계동궁(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의 집)으로 옮겼다. 정변세력은 여기서 신정부 요인의 명단을 발표했다. 명성왕후는 다시 창덕궁으로 가겠다고 고집해 오후 5시경 환궁한다. 개화당은 19일 아침 9시, 창덕궁에서 완전자주독립 선포, 양반신분제·문벌 폐지, 내각제 수립·정부조직 개편, 재정통일·경제개혁 단행, 서양식 군사제 채택, 근대 형법·경찰제 설치 등 개혁조항을 공포한다.

개화당 지도자 김옥균. 김옥균의 1889년~1890년 일본 망명 시기의 사진이다. 수척한 얼굴의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그날 오후 3시, 청군 1500명이 두 부대로 나눠 창덕궁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비슷한 시각 일본공사관에는 일본 내무성 훈령이 도착했다. “조선개화당 정변에 절대 가담하지 말라”는 전갈이었다.
조선군 550명, 청군 1500명 방어 역부족, “도와주겠다”던 일본은 외면
개화당은 고립무원의 지경이었다. 먼저, 친군영 전영의 조선군 500명이 청군을 맞아 용감히 응전했지만 수십명의 전사자만 내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했으며, 충의계 장사·사관생도 50명도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고군분투했으나 쇄도하는 청군을 막아내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1861~1891), 유혁로(1855~1940), 이규완(1862~1946), 정난교(1864~1943), 신응희(1859~1928) 등 개화당 9명은 창덕궁 북문, 취운정 경로로 탈출해 일본공사관()에 머물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홍영식과 박영교(박영효 형·1849∼1884), 생도 7명은 창덕궁을 벗어나 북관묘로 피신하는 고종을 따랐다. 북관묘는 명성왕후 민씨의 전속 무당인 진령군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며 거주하던 곳이다. 홍영식 일행은 고종에게 원세개 군대를 물리치는 명을 내리라고 고함쳤다. 이어, 청군 장수 오조유가 고종을 알현하러 온다는 소식에 고종이 맞으러 가려하자 홍영식 일행이 어의를 잡아당기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자 왕을 호위하던 무예청 군사들이 달려들어 9명을 넘어뜨리고 난도질했다. 정변은 10월 17일 저녁 일어나 19일 오후에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3일 천하’라고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약 48시간, 즉 이틀이다.

외세에 의존한 개혁, 실패 예견···조선사회 낙후성도 몰이해
청군이 없었다면···. 정변 실패의 결정적 원인은 청군의 개입이다. 정변세력은 청군의 개입이 불보듯 했지만 이를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했으며 기회주의로 일관했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사실, 갑신정변 당시만 해도 일본은 청과 대적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일본은 청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경계했고 실제로 청이 군사를 동원하자 발빠르게 물러났다. 만일 청이 나서지 않았다면 일본은 개화파를 지원하는 척하며 조선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을게 분명하다.

정변 수개월 전에 미국으로부터 최신식 소총 3000정을 구입해 각 영의 무기고에 보관해 뒀다. 개화당이 이를 꺼내 사용하려하자 총에 녹이 슬어 분해소제하지 않으면 안됐다. 무기라도 준비가 됐으면 청군과의 전투 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낙후성과 시민층의 미성숙도 실패의 요인이다. 개화당의 혁신정책은 근대시민적이었지만 당시 민중은 개화당이 왜 정변을 일으켜 개화를 하려고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일본과 결탁한 개화잡귀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개화당에 대해 강한 거부감까지 가졌다.

결국, 정변 세력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그들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다. 거사 두달 뒤인 12월 13일, 도망가지 못한 김봉균, 이희정, 신중모, 이창규는 저자에서 능지처참됐고, 이점돌, 이윤상, 차홍식, 서재창, 남흥철, 최영식은 참형을 받았다. 일본으로 도망갔던 김옥균은 청나라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러 상하이에 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된뒤 국내로 송환돼 양화진 백사장에 효수됐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도 교수형에 처해졌고 어머니와 누이동생도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등 주모자의 부모, 아내와 자식도 자살했다.

개화당 엘리트들은 역설적이게도 하나같이 강경 수구보수파였던 노론명문가의 자손들이었다. 정변의 주무대 역시 신안동 김씨, 여흥 민씨 등 노론의 본거지였던 북촌이다. 정변 주역들의 집과 우정국을 비롯한 정변의 현장들은 개화파의 스승이었던 박규수(1807~1877)의 집을 중심으로 반경 수백m 내에 들어있다.

박규수 집터는 헌법재판소 구내 서북쪽 백송(천연기념물 8호)이 있는 자리이다. 박규수의 집 사랑방은 1870년대 전반,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모여 박지원의 <연암집>과 서양사정을 소개한 중국의 신서적을 공부하며 개화사상을 싹틔운 장소다. 중국 원산지의 백송은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으로 수령이 600살 정도이다.

김옥균 등 주역들 비참한 최후···가옥 국가에 몰수, 집안은 멸문지화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 일가. 우정국 책임자였던 홍영식(우측 두번째)와 그의 아버지 홍순목(중앙) 등 홍영식 가족. 홍순목은 강경 수구파의 우두머리로 영의정을 역임했다. 홍순목은 아들 홍영식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3일 만에 실각하고 살해되자 며느리, 손자와 함께 자살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퍼시벌 로웰 촬영)]
근대우편의 발상지이자 갑신정변의 주무대였던 우정국(종로 견지동)은 현재 체신기념관으로 단장돼 있다. 정변 실패후 건물은 한어학교(중국어학교) 교사로 사용됐다. 우정국 옆 회화나무는 나이가 300살이 넘었다. 일본공사관은 천도교중앙대교당(종로 경운동)에 위치했다.

개화당이 창덕궁의 고종을 처음으로 모시고 간 경우궁의 옛터는 현대 사옥의 자리다.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었다. 1906년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인 민영휘(1852~1935)가 이 자리에 휘문의숙(희문고)을 설립했다.

경우궁이 너무 추워 경우궁 다음으로 옮겨간 계동궁 터는 현대사옥 앞마당이다. 개화당은 거사 이튿날 신정부 요인 명단을 이곳에서 발표하면서 역사의 현장으로 떠올랐다. 홍영식 등 9명의 개화파가 죽음을 맞았던 북관묘는 종로 혜화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 있었다.

갑신정변의 현장, 개화파 스승 박규수 집 반경 수백m에 집중
1916년 박영효(왼쪽 세번째 콧수염 기른 인물). 감리교 신자였던 박영효가 1916년, 조선을 방문한 허버트 웰치 주교를 위해 개최한 환영회 모습. 사진 속의 장소는 그의 집과 별장이 있던 ‘상춘원’(종로 숭인동)으로 추정된다. 박영효는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10년 만에 귀국했다. [서울역사박물관(미국 드류대학교 도서관 소장 연합감리교회 아카이브)]
김옥균 가옥 자리는 정독도서관 동편이다. 거사실패후 국가에 몰수돼 1900년 설립된 한성중학교에 편입됐다. 한성중학교는 1921년 경성제일고보로 교명이 변경됐고 1951년 경기중고로 분리·개편됐다가 1976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됐다.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역모죄로 처형된 성삼문 집터도 정독도서관 남쪽에 있다.

홍영식의 집은 스승 박규수의 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홍영식의 집터도 압수돼 광혜원(제중원)이 세워졌고, 이후 창덕여고, 헌법재판소가 차례로 들어섰다. 광혜원은 공교롭게도 우정국 사건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서양의술로 살린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 고종에게 건의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서광범 가옥 터는 덕성여고 교정 남쪽으로, 안동별궁과 담을 맞대고 있다. 갑신정변 거사의 첫 횃불을 올리는 장소로 안동별궁이 검토됐지만 계획이 변경돼 우정국 주변 민가를 방화했다. 안동별궁은 서울공예박물관(풍문여고) 자리다. 안동별궁은 왕가의 혼례식이 거행되던 장소였으며 일제 하에서는 퇴직한 상궁들이 거주했다.

박영효 가옥은 경인미술관(종로 인사동)자리다. 박영효가 1872년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해 정1품 금릉위에 봉해진 이후 살던 집이다. 개화당 인사들이 모여 정변을 모의하던 주요 장소로 활용됐다.

온건개화파였다가 갑신정변 전후로 민씨 외척 정권의 중심 인물이 된 민영익의 집은 종로 관훈동 홍익빌딩에 위치했다.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와 부마 동녕위 김현근이 살던 집으로 죽동궁으로 불렸다.

2024년은 갑신정변 발발 140주년을 맞는 해이다. 개화당이 정변에 성공했다면 역사의 거대한 물결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2. 황현. ‘매천야록’

3. 신용하. ‘갑신정변의 역사적 성격’. 현대사회(제15집). 현대사회연구소. 1984

4. 문동석. ‘한양, 경성 그리고 서울’. 상상박물관. 2013

5. 장규식. ‘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 혜안.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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