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 원자폭탄이 전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2차대전은 어떻게 끝났는가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사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까지 바꿔 놓은 20세기 최대 사건이었다. 이 거대한 전쟁은 어떻게 끝났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어김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이 미국의 원자폭탄 두 발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끝났다.’ 정답이지만 완벽한 정답은 아니다. 소련의 참전이라는 요인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역사학자들이 쓴 제2차 세계대전사 개설서를 들여다보면, '1억 총옥쇄(一億 總玉碎;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제국이 패전을 앞두고 내세운 극단적인 구호-편집자주)'를 외치며 결사 항전을 외치던 일본의 전쟁 지도부가 연합국 측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 원인으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더불어 소련군의 참전이 어김없이 거론된다.

1945년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에 터진 미국의 원자폭탄. 과연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만든 유일한 근본원인일까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많다.

원자폭탄인가, 붉은 군대인가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이 떨어진 1945년 8월 6일에서 이틀이 지난, 그리고 나가사키에 또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9일보다 하루 앞선 8월 8일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곧바로 붉은 군대가 만주에 있는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 공세는 8월 20일에 붉은 군대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런데 한국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끌어낸 요인으로 소련의 참전은 쏙 빼놓고 원자폭탄 투하 이야기만 하기 일쑤다. 그리고 소련의 참전 때문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고 하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렇게 생각한다. ‘미국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소련은 숟가락만 걸치지 않았나?’

소련은 수백만 병력을 석 달만에 수천㎞를 옮겨 관동군을 2주만에 철저히 격파함으로써 반(半)독립적이던 관동군이 만주에서독자행동을 통해 전쟁을 더 장기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다.

붉은 군대, 일본 '무조건 항복' 끌어내다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미국군의 압도적 공세에 난타당해서 1945년에는 빈사 상태에 빠진 일본이 패망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고 원자폭탄은 일본 패망의 결정타였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상식이다. 하지만 상식이 반드시 사실은 아니다. 한국인의 상식은 역사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울까?

일본의 최고위 전쟁 지도부인 대본영(大本營)의 내부 논의를 들여다보면서 대본영이 조건부 항복을 포기하고 무조건 항복을 하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원자폭탄 투하보다는 소련의 참전이었음을 밝혀낸 역사학자가 꽤 많다. 예를 들어, 일본 태생으로 미국에서 터를 잡아 연구를 한 러시아 현대사 전공자인 하세가와 츠요시가 그렇다.

유럽에서 나치 독일을 무릎 꿇린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했던 약속대로 석 달 뒤에 치렀던 또 한 차례의 대전투. 일본의 관동군을 단숨에 철저하게 격파했다.

일본어, 영어, 러시아어로 된 1차 사료를 자유로이 구사해서 써낸 역작 『종전의 설계자들: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으로 하세가와 츠요시는 원자폭탄 피해‘쯤’은 감당하려던 대본영이 일본에 소련이 선전포고를 했고 만주에 붉은 군대가 물밀듯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동안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던 무조건 항복을 마침내 결심했다는 팩트를 논박의 여지가 없을 만큼 밝혀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내는 데 으뜸 역할을 한 요인으로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보다 '소련의 참전'을 더 높이 치는 역사학자들의 대열은 길고도 빽빽하다. 이들의 견해는 ‘일본의 항복에 가장 큰 이바지를 한 나라는 미국이며, 일본의 항복을 '무조건 항복'의 형태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이바지를 한 나라는 소련이다’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붉은 군대 제6전자근위야전군 제7기계화군단 전차부대를 맞이하는 중국 다롄(大連)의 시민들.

세계사에 남은 '가장 완벽한 승리'

제2차 세계대전의 이해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붉은 군대'가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세계사에서 가장 완벽한 군사적 성공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1945년 8월의 관동군이 워낙 약체였다면서 붉은 군대의 승리를 깎아내리지만, 한 대륙에 있는 수백만 병력을 다른 대륙 끝까지 수천㎞를 단 석 달 만에 옮겨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 나라의 국토를 합친 면적과 맞먹는 넓이의 드넓은 전구(戰區, theater of war; 전쟁이 실제로 벌어지는 지역이나 장소)에서 자로 잰 듯한 현란하고도 신속한 기동으로 적군을 단 2주만에 제압한 붉은 군대의 전략, 전쟁술, 전술은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웠다.

미하일 아나니예프, 항복하는 관동군, 1987년

군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붉은 군대'의 관동군 격파의 의의는 자못 크다.

만주의 관동군은 그저 군대가 아니라 일본 본토에 있는 정치가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일종의 반(半)독립 정치체였다. 관동군이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일본 천황이 항복 의사를 밝히더라도 만주에서 항복하지 않고 계속 싸웠을 법하다. 그랬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일은 1945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46년의, 어쩌면 1947년의 어느 날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파벨 수다코프, 관동군의 항복, 1955년

용기있게 마주해야할 역사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 것이 바로 붉은 군대의 만주 공세 작전이었던 것이다.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종전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며, 못지 않게 한반도의 운명도 달랐을 지 모른다.

오늘날로부터 80년 전인 1945년의 8월을 차분하게 곰곰이 되새겨보면 한반도의 독립에 이바지한 나라는 미국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반도 현대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슬기와 함께 용기가 필요하다.


※ 류한수 교수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영국 에식스대학 역사학과에서 러시아 혁명 및 내전기 페트로그라드의 산업체에서 일어난 변화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유럽현대사, 특히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 《러시아의 민족정책과 역사학》, 《서양사강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2차세계대전사》,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등이 있다. KBS의 <이슈 Pick, 쌤과 함께>, <역사저널 그날>, tvN의 <벌거벗은 세계사> 등에 출연했으며, 국방tv의 <역전다방>에 고정 출연한다. 현재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장이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여성전투원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