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강사하다 느닷없는 고시 합격, 26년만에 사표내고 한 도전

법률 규제 리스크 관리 AI솔루션 ‘아이호퍼’ 개발한 씨지인사이드 박선춘 대표
창업 기업은 한 번쯤 자금 부족에 시달리는 등 큰 시행착오를 겪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지납니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력, 서비스를 갖고 있다고 해도 생존하기 어려운데요. 잘 알려지기만 하면 시장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중소기업이 죽음의 계곡에 빠지게 둘 순 없습니다. 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법률 규제 리스크 관리 AI솔루션 ‘아이호퍼’ 개발한 씨지인사이드 박선춘 대표. /더비비드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규제는 끊임없이 증가한다. 우리나라의 규제는 2015년 1만5000개 수준이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2024년 2월 기준) 8만6000개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규제를 수시로 확인하고 여차하면 사업 방향을 수정해야 하는 기업에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 글로벌 기업의 40%는 규제 리스크 관리에 매년 평균 325억원을 지출한다.

박선춘 씨지인사이드 대표(55)는 법률·규제 리스크 관리에 주목했다. 각종 규제가 개별 기업은 물론 산업 전반의 존폐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을 혁신하는 서비스나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은 규제 때문에 성장동력을 잃는 경우가 많다. '타다 금지법'이라 불린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으로 핵심 서비스를 중단해야 했던 VCNC 사례가 대표적이다. 박 대표를 만나 법률·규제를 현명하게 다루는 방법을 들었다.

◇친구 따라 했던 공부가 불러온 결과

1996년 입법고시 합격 후 해외 연수. /박선춘 대표 제공

전북대 사회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학원 강단에 섰다. 중등 수학, 고등 영어를 가르쳤다. “6개월 만에 수강생이 50명에서 300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럴수록 마음은 텅 비어갔어요. 가르치는 걸 좋아했지만 그게 업이 되는 순간부턴 즐길 수 없었습니다. 그 길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평소 좋아하던 책을 싸 짊어지고 신림동의 한 고시원에 들어갔다. “우연히 고시원 복도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한양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준비한다더군요. 친구를 따라 행정고시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시험 과목이 비슷한 입법고시도 함께 응시한 것이 덜컥 최종 합격으로 이어졌어요. 그렇게 공무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국회기획조정실장 당시 의장 업무 보고를 하는 모습. /박선춘 대표 제공

1996년 국회의사당으로 출근했다. “여의도 지하차도에서 올라가다 보면 국회의사당의 돔 모양이 서서히 올라오는 게 보이는데요. 첫 출근길에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새해 일출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벅차올랐습니다. 제겐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길목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졌어요. ‘저곳이 내가 평생 근무할 곳이구나’라고 생각했죠.”

첫 발령 부서는 법제실이었다. “국회의원이 요청한 내용에 따라 법안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7개 분야 중 농림해양 분야 담당이었죠. 들어가자마자 요청받은 법안은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이었습니다. 경매를 모두 수기(手記)로 기록하던 시절이라 부정·비리가 많았거든요. 이를 막기 위해 전자 시스템을 도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만들었습니다.”

국회 국정감사 시 기관보고를 하는 모습. /박선춘 대표 제공

인사과, 농립해양위원회, 예산분석총괄과 등을 오가며 한 계단씩 승진했다.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총괄과장으로 6년을 지냈습니다. 연 400조원 규모의 국가 예산을 총괄하고 검토하는 역할이었죠. 연말이 다가오면 일하느라 2~3개월씩 집에 못 갔어요. 스스로에게 가혹한 만큼 후배들에게도 엄격했죠. 12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제출한 후배에게 5페이지만 훑어보고 ‘다시 써오라’고 돌려보낸 일도 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과한 처사였죠.”

◇미국 생활 3년이 준 가르침

국회방문단과 미국의회조사처에 방문했다. /박선춘 대표 제공

2015년 주미대사관 공사참사관으로 발령 받았다. “외교관 신분으로 일하면서 국내 공무원과 소통할 일이 많았는데요. 자료 요구나 업무 지시를 받을 때 일부 공무원들의 말과 행동이 다소 고압적으로 느껴지더군요. 거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20년간 저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각 기관의 담당자에게 경직된 태도로 대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어요. 이젠 제가 바뀔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서 얻은 깨달음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의회·행정부·백악관을 모니터링하고 주요 현안을 보고하는 일을 맡았는데요. 미국의 주요 기관에서 ‘피스컬노트(FiscalNote)’란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더군요. 피스컬노트는 정부·의회·법원에서 제정한 정책·규제·판례 등의 정보를 분석해 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서비스하는 스타트업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법률·규제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죠. 우리나라 도입이 시급보였습니다.”

주미대사관 근무 시절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박선춘 대표 제공

3년 뒤 귀국하자마자 사업 가능성 검토에 나섰다. “19대 국회 법안과 관련된 1만7600건의 정보를 AI에 학습시키고 입법 가능성을 도출했습니다. 정확도는 87%에 달했죠. 예측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불필요한 비용은 줄어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선례만 봐도 피스컬노트 도입 이후 정보의 투명성이 높아진 것을 볼 수 있어요. 과거엔 정치인이나 로비스트, 부자들만 접근할 수 있던 고급 정보가 담긴 비밀 상자가 개방된 셈이죠.”

창업의 꿈을 품은 채 공직 생활을 이어갔다. “두 번의 승진이 있었고 1급 공무원 자리에까지 올랐죠. 공직 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업을 결심한 겁니다. 우리나라 법률·규제 시장은 정보의 비대칭으로 거래비용이 매우 높습니다. 대기업은 국정감사를 앞두고 대형 로펌과 거액의 계약을 하고, 참신한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은 엉뚱한 규제에 묶여 날개를 펼치지 못하기도 하죠. 26년의 경험을 잘 녹이면 사회 비용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법률·규제에 특화된 생성형AI

2022년 1월 씨지인사이드 초기 팀원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박선춘 대표 제공

2022년 1월 씨지인사이드를 설립했다. 의회(Congress)와 정부(Government) 안(Inside)에 있는 모든 법률, 규제, 정책 데이터와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라는 의미다. 앞서 테스트했던 법률안 통과 예측 알고리즘을 고도화했다. 서비스명은 ‘아이호퍼(iHopper)’라 지었다. 지식(Intelligence)의 깔때기(Hopper)라는 뜻이다.

법령·조례·규제·정책보고서 등 공공데이터를 수집했다. 법안 수는 약 7만건, 각 법안의 영향을 주는 요인(인물·법안·환경) 데이터는 약 680만건에 달한다. “데이터를 단순히 수집하기만 하면 활용도가 떨어집니다. 수집한 모든 데이터를 유기적으로 연결했어요. 가령 법령 하나를 클릭하면 관련 인물·정책보고서·개정안 등을 한꺼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죠. 특정 이슈에 대응할 때 주목해야 하는 인물과 그 인물이 주장하는 바를 쉽게 파악해 대응할 수 있습니다.”

아이호퍼 홈페이지에서 법률안 통과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호퍼

법안 통과 가능성 예측 알고리즘으로 특허를 등록했다. 미국의 피스컬노트에 이은 2번째 사례다. “사람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과 비슷해요. 법안 통과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인물, 법안 내용, 환경 등 크게 3가지로 나눴습니다. 총 26가지의 세부 영향요인이 있죠. 예를 들어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합니다. 법안의 98%는 통과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오죠. 국회가 열려야 법안을 심사할 텐데 총선 전후로는 국회가 잘 열리지 않으니까요.”

2023년 여름부터 생성형AI ‘아이호퍼 렉스(iHOPPER-Lex)’ 개발에 들어갔다. “법률·규제에 특화된 챗GPT라고 보면 됩니다. 가령 직원 수, 사업장 위치, 연매출 등의 정보를 입력하고 2024년 적용되는 새로운 규제를 물어보면 답을 받을 수 있죠. 규제나 정책 변화를 놓쳐 벌금을 낼 일이 사라지는 겁니다.”

아이호퍼에 대해 설명하는 박선춘 대표. /더비비드

데이터 기반의 AI라는 점이 강점이다. “지난 12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변호사가 AI로 만든 가짜 판례를 법원에 제출했다는 뉴스가 있었죠. 아이호퍼 렉스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정보 검색과 텍스트 생성을 결합한 검색증강생성(RAG) 방식이라서요. 데이터 속 정보만을 취급하기 때문에 엉뚱한 결과물을 낼 일이 없어요.”

◇고생길 훤한 창업의 길

씨지인사이드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가 주최한 디데이 본선에 진출했다. /디캠프

2023년 씨지인사이드는 연 매출 17억원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KC산업, 대한전문건설협회, 서울시 등 38곳에서 아이호퍼를 이용해 법률·규제 리스크를 관리하고 있다. 지난 1월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가 주최한 디데이 본선에 진출해 가능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B2B(기업 간 거래)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더 넓게 보려고 해요. 곧 출시할 아이호퍼 렉스는 교수·변호사·회계사·공무원 등 개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창업을 후회한 적은 없다. “‘1년만, 2년만 더 일찍 할 걸!’ 이런 후회는 자주 해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뛰어들 걸 싶은 마음이죠. 다만 창업을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일단 말리고 싶어요. 고생길이 훤하니까요. 매 단계가 위기의 연속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도전에 뜻이 있고, 동기부여를 스스로 찾는 사람이라면 누가 말려도 창업할 겁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