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와 오사카 사이 어딘가에 놓인 도시, 나고야.
처음 일본 여행을 계획할 때 빠르게 스쳐 지나가버리는 도시 중 하나지만,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알게 된다. 이 도시는 일본의 또 다른 시간과 얼굴을 품고 있다는 걸.
자동차 공업의 중심, 도요타의 본거지, 조용한 문화 도시, 그리고 예상 외로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기 좋은 공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나고야는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여행을 보여준다.
오늘은 기술과 전통, 정적과 활기를 함께 품은 이 도시를 여행자답게 느긋하게 걸어보자.
고요하지만 깊이 있는 시작, 아츠타 신궁

나고야를 처음 마주한 날, 아침부터 향한 곳은 신사였다. 이 도시에 숨겨진 시간을 가장 먼저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츠타 신궁은 나고야 여행의 출발점이 되기 충분했다.
700만 명이 넘는 이들이 매년 이곳을 찾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부터 다르다. 아스팔트 대신 사각사각한 자갈길, 나무로 된 구조물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풍경.
그 속에서 이곳이 일본 신화의 핵심이라 불리는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삼종신기 중 하나인 쿠사나기노츠루기(초목을 자르는 전설의 검)가 모셔져 있고, 왕실 보물과 전통 의상, 고문서까지 담긴 전시관은 작지만 밀도가 굉장히 높았다.
고요함 속에 깃든 무게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문득, 이 도시가 가진 시간의 결이 섬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이 들려주는 권위의 역사, 나고야성

신사를 나와 시내로 이동하면 이 도시의 자부심 같은 공간을 만나게 된다. 1610년 도쿠가와 가문이 세운 나고야성은 겉모습부터 웅장하다.
성곽 위 황금으로 빛나는 샤치호코(해치를 닮은 상상의 생물상)는 관광객들에게 ‘포토존’이지만, 도시민들에게는 정체성과 같은 존재다.
2차 세계대전 중 화재로 일부가 불타버렸지만, 2018년 복원된 혼마루 어전은 그 섬세한 그림과 구조물의 아름다움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기억에 남는 건, 그 안에서 마주친 해설자의 한 마디였다.
“이 성은 과거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말이 꽤 인상 깊었다.
도시는 과학이다 – 나고야 시립 과학관

무거운 역사를 돌아보고 나면, 아이처럼 다시 밝아지고 싶어진다. 그럴 땐 나고야 시립 과학관이 딱이다. 도심 속 거대한 은색 돔 하나가 하늘에 떠 있는 이 공간은, 그냥 외관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여긴 단순히 과학을 설명하는 곳이 아니다. 진짜로 인공 토네이도를 눈앞에서 일으키고, 영하 30도 남극 전시실에서 오로라를 보며, 천체투영관에서 별들을 따라 여행하게 만든다.
각 전시는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도 감탄하게 만든다. 물 흐름을 조절하고, 전기를 연결해 실험하고, 거울의 반사를 통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보는 일련의 체험들이 이 도시의 기술적 성격을 단단히 보여준다.
유리 위를 걷는 기분, 오아시스 21

과학관에서 도보 10분 거리.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오아시스 21은 지상 14미터 높이에 떠 있는 유리 구조물 ‘스페이스십 아쿠아’로 유명하다.
바닥을 걷고 있는 건지, 하늘을 걷고 있는 건지 애매한 기분. 그만큼 이 공간은 여행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유리판 아래로 물이 흐르는데,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잔물결이 빛을 튕겨낸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렇게 예술적인 순간을 만난다는 건 의외였다. 지하에는 식당과 상점이 있고, 지상에는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쉼터도 있다. 이곳은 그냥 건축물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도심 속 ‘오아시스’다.
아이들의 파라다이스, 레고랜드® 재팬

도심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약간 이동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레고랜드® 재팬. 레고 블럭으로 도시 전체를 만들어버린 이 테마파크는, 단순히 놀이공원이 아니라 아이들의 창의력이 물리적으로 실현된 공간이다.
1700만 개의 블럭과 10,000개의 조형물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용을 타고 모험을 떠나거나, 화재를 진압하거나, 고대 유적을 탐험하는 등
각 놀이기구마다 테마가 뚜렷하고 교육적인 요소가 녹아 있어 부모들 사이에서도 만족도가 높다.
특히, 여기선 아이들이 직접 LEGO®를 조립하며 창작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참여형 체험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하다.
도자기의 숨결이 깃든 공간, 노리타케 정원

레고랜드의 밝고 활기찬 분위기와는 정반대지만, 감동의 깊이는 결코 뒤지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노리타케 정원이다.
1904년, 이곳 나고야에서 시작된 고급 식기 브랜드 ‘노리타케’는 이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역사를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이 정원은 도자기를 예술로 만든 사람들의 흔적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공방에서는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의 손길을 직접 볼 수 있고, 박물관에는 메이지 시대부터 현대까지 노리타케가 생산한 다양한 식기가 전시되어 있다.
무엇보다 ‘키른 레스토랑’에서는 그 아름다운 식기에 담긴 음식을 직접 맛볼 수 있어, ‘보는 예술’이 ‘먹는 예술’로 연결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바다의 리듬이 들려오는 곳, 나고야항 수족관

바다가 멀지 않다는 건 도시의 색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나고야항에 위치한 나고야항 수족관은 단순한 해양 전시관이 아니다. 그 안에는 마치 ‘움직이는 바다’가 통째로 들어와 있다.
이곳은 건물 자체가 두 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남쪽 건물은 산호초, 심해 생물, 남극 펭귄 등 다양한 서식지를 그대로 재현해놨고, 북쪽 건물에는 벨루가, 돌고래, 범고래 같은 거대한 해양 포유류들이 유영한다.
특히 범고래 쇼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메인 수조는 보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수중 터널을 지나면서 물속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고, 그 순간 나고야는 갑자기 바다 도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역민들의 맥박이 흐르는 거리, 오수 쇼핑 지구

자, 다시 도시로 돌아오자. 조용했던 정원과 성, 신사도 좋지만, 도시의 현재를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싶다면 오수 쇼핑 거리를 걷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굳이 유명 관광지를 찾지 않아도 된다. 그냥 천천히 걷기만 해도 된다. 1,200여 개의 상점과 골목길이 펼쳐지는 이 거리는, 나고야의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이다.
전자기기부터 구제 의류, 애니메이션 굿즈,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까지. 잡다한 것이 넘치는 그 혼란 속에 특유의 ‘일본스러움’이 숨겨져 있다.
주변에선 지역 축제도 자주 열리고, 골목 골목마다 길거리 음식 냄새가 유혹하는 이 거리에서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되는 순간이 분명히 찾아온다.
기술을 움직이는 심장, 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

나고야는 기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 정점에 있는 공간이 바로 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이다. 이곳은 단지 자동차 브랜드를 소개하는 공간이 아니다.
처음엔 섬유 방직 공장에서 시작해, 수십 년에 걸쳐 세계적인 기술 혁신을 이뤄낸 도요타의 모든 흔적이 움직이는 기계, 체험형 전시, 산업의 철학으로 담겨 있다.
방문자들은 진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와 구조를 눈앞에서 보며, 한 기업의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의 도시,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를 직접 체험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기계’와 놀며 과학적 호기심을 키워나가는 모습을 보면, 이 도시는 단순한 공업 도시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철도의 진화, SCMAGLEV & 철도 공원

철도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어린 시절 기차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SCMAGLEV & 철도 공원은 꿈 같은 장소다.
이곳은 초전도 리니어 열차부터 도카이도 신칸센,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 달라진 기차의 내부 모습과 기술을 시뮬레이터로 경험할 수 있는 체험형 박물관이다.
직접 운전석에 앉아보기도 하고, 열차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거대한 모형과 실제 차량들을 통해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속도’와 ‘기술’을 시각화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입으로 기억하는 나고야

여행을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건 결국 그 지역의 맛이다. 나고야는 소박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향토 음식이 가득하다.
히츠마부시는 장어덮밥을 4가지 방식으로 먹는 재미가 있다.
처음은 그대로, 다음은 와사비와 김을 얹어, 세 번째는 국물을 부어 오차즈케처럼, 마지막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방식으로 마무리한다.
이 음식 하나로 나고야의 정갈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미소카츠는 진하게 발효된 붉은 된장을 소스로 얹은 돈카츠로, 씹을수록 짭짤한 감칠맛과 은은한 단맛이 어우러진다.
텐무스는 작고 아담한 주먹밥 안에 바삭한 새우튀김이 들어 있는 음식으로, 간단하지만 꽤 만족스러운 한 끼다.
기시멘은 납작한 면발로 만든 국수로, 독특한 식감과 가다랑어포 향이 어우러져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낸다.
이 모든 음식은 그 자체로 지역의 시간과 손맛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오래된 것들이 살아 숨 쉬는 축제, 나고야 마츠리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도 나고야에는 지켜지는 전통이 있다. 그건 바로 마츠리, 축제다.
기네코사 마츠리에서는 신성한 대나무를 강에 세우고, 남성들이 타고 올라 예측을 점친다.
그 모습은 마치 천년 전 일본의 풍속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듯한 체험이다.
와카미야 마츠리는 화려하게 장식된 가마와 수레가 도시를 도는 퍼레이드.
특히 자동 인형이 등장하는 수레는 지역 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축제들은 그저 흥겨운 이벤트가 아니라 이 도시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리고 나고야를 떠나는 마지막 날
돌아보면 나고야는 소란스럽지 않은 도시였다. 그러나 너무도 다양한 세계가 조용히 공존하고 있었다. 기술과 전통, 어린이와 어른, 산업과 공예, 현대와 고전.
그 사이에서 우리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도시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기억에 오래 남는 여행지는 꼭 강한 인상을 남긴 도시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이 나고야에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배우게 된다.
나고야 외에도 일본은 가볼만한 곳이 너무 많은데요. 아직 고민하고 있는 분들은 아래 기사를 참고하셔서 여행 계획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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