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삼성폰 파는 격"…KT&G는 왜 '전담'에 '냉담'할까 [박동휘의 컨슈머 리포트]
포스코, KT, KT&G는 한때 ‘민영화 3인방’으로 불렸다. 벌써 20여 년 전 일이라 이젠 이들 기업이 공기업이었다는 사실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주인이 바뀌기도 했지만, 포스코와 KT는 과감한 혁신을 통해 ‘미래 비전’을 거머쥠으로써 자본 시장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꿔놨다.
포스코는 철강이라는 ‘산업의 쌀’을 기반으로 전기차용 배터리 소재 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포스코홀딩스 주가는 3년 전 대비 약 2.5배 올랐다. KT 역시 디지털 전환(DX) 분야를 신사업으로 개척하면서 ‘아날로그’의 이미지를 깼다. 포스코홀딩스 만큼은 아니지만 3년 전 대비 주가도 30%가량 상승했다.
이런 점에서 KT&G는 민영화 3인방 중 늦깎이다. 관(官)의 지배에서 벗어난 시기도 2년 정도 늦다. 담배가 가진 ‘필요악(惡)’이란 숙명 탓에 포스코나 KT처럼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바꾸는데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주가는 10년 전과 비교해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이런 이유로 KT&G는 행동주의 펀드의 표적이 되곤 했다.
'민영화 3인방' 중 비즈니스 모델 전환에 가장 더뎌
그렇다면 담배 회사엔 미래가 없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궐련형 전자 담배의 등장으로 글로벌 담배 산업은 과거 수백 년 간 짊어져야 했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다. 전 세계 담배 제조 1위인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PMI)는 ‘말보로의 종말’을 외치며 전자 담배 시장에 연간 수조 원을 쏟아붓고 있다.
PMI의 ‘피벗’은 마치 테슬라가 전기차 시장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과 비슷하다. 테슬라가 ‘모델X’를 출시하기 직전까지 자동차 전문가들조차 배터리로 구동하는 자동차를 장난감 취급했다. 궐련형 전자 담배도 마찬가지다. PMI가 아이코스를 내놓기 전만 해도 흡연자들은 수증기가 연초를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민영화 선배들의 성공 사례에다 글로벌 1위 기업의 패러다임 전환에 직면한 KT&G가 가야 할 길은 명확해 보였다. 하지만 KT&G는 어쩐 일인지 PMI처럼 과감한 ‘피벗’을 단행하는 데 주저하고 있다. 아이코스를 상대로 한국 시장을 지켜낸 ‘릴’이라는 엄청난 패스트 팔로우(빠른 추격자) 상품을 개발해 놓고도 해외 시장 개척엔 소극적이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KT&G는 왜 전담 시장을 키우는데 냉담한 것일까.
KT&G와 PMI의 15년 장기 계약은 현 경영진이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양사는 한국을 제외한 해외에 전자 담배 공동 판매를 위한 장기 협약을 맺었다. KT&G는 PMI의 해외 유통망을 통해 릴을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여는 대신, 릴이라는 브랜드를 해외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쓰지는 못한다는 것이 협약의 골자다.
KT&G가 공시한 ‘주요 계약 사항’에 ‘본 계약은 2038년 1월29일까지 15년에 걸친 계약이며, 3년 주기로 성과 검토 및 수량이 확정되는 보증이 연계돼 있다’. 문제는 최소 판매 보장 물량이 장기 협약 이전 KT&G가 해외에서 팔던 것에 못 미친다는 점이다. 양사는 올해를 포함해 첫 3년 보증 수량을 160억본으로 책정했다. 지난해 KT&G는 해외에 57억본을 수출했다. 3년 간 동일한 양을 수출한다고 가정하더라도 3년치는 171억본이다.
관련 업계에선 PMI와 KT&G의 장기 협약은 PMI가 자발적으로 릴을 열심히 판매해야 협약 효과가 발생하는 구조라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KT&G 관계자는 “전자 담배 스틱을 해외에 팔려면 진입 장벽이 워낙 높아 2020년 해외에 수출을 시도할 때부터 PMI와 공동 마케팅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며 “세부 계약 내용을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15년간 최저보증수량이 우상향하도록 설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애플에 삼성폰 판매 맡긴 격" VS "미들급이 헤비급에 정면 도전 못해"
문제는 PMI가 릴 판매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실제 일본 도쿄나 오사카의 편의점에 가보면 KT&G의 전자 담배는 ‘PMI 릴’이라는 브랜드로 팔리고 있다. ‘PMI 아이코스’와 일본 1위 담배 회사인 JTI의 ‘풀룸’이라는 전자 담배 브랜드에 비하면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할 정도로 구석에 진열돼 있다. 한국인 관광객 등 이미 릴의 전자 담배 기기를 가진 흡연자가 아니라면 PMI 릴을 구매할 이유는 거의 없다.
KT&G는 해외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렇다 할 마케팅을 하지 않고 있다. 전국에 릴을 홍보하는 전시장은 5개뿐이다. JTI가 전자 담배 구매자를 위한 멤버십 제도를 도입하는 등 마케팅에 적극적인 것과 대조적이다. JTI의 풀룸 전시장은 멤버십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위스키, 커피 등을 갖춰놓고 있다.
KT&G가 전자 담배 시장의 판을 키우는 데 주저하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담’이 아니라 ‘노담(No 담배)’을 외치는 보건복지부 등의 정책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KT&G 경영진으로선 체급이 다른 경쟁자가 만든 판에 섣불리 뛰어들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테슬라에 맞선 현대차나 애플과 겨루는 삼성전자와는 경우가 다르다는 항변이다. 현대차만 해도 올 3분기에 11조652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 테슬라(약 5조원)를 앞질렀다.
이에 비해 글로벌 담배 제조 분야 상위 4개 사와 KT&G의 격차는 꽤 크다. PMI는 지난해 317억달러(약 40조원) 매출에 EBIT(법인세와 이자 차감 전 영업이익)가 123억(약 15조원)달러에 달했다. KT&G의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 각각 5조8514억원, 1조2676억원이었다.
BAT, 알트리아, JTI의 작년 매출 역시 각각 276억달러, 206억달러, 2조6578엔(약 23조원)으로 KT&G보다 4~5배 많다. 영업이익률로도 KT&G는 글로벌 톱5 중 꼴찌다. KT&G로선 전자 담배라는 ‘미래’에 투자함으로써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확실한 보상이 따르는 현재, 즉 연초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돈 벌면 안되는 담배 회사?…미래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경영진
일각에선 ‘대리인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영화 이후 사실상 KT&G 공채 출신이 경영진을 구성하는 거버넌스(지배구조) 특성상 장기 투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IB업계 관계자는 “담배 가격을 저가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국내 사정상 KT&G는 이익을 많이 내기는 어려운 회사”라며 “이사회가 대표를 선임할 때 판단 근거로 삼을만한 실적은 매출뿐인데 전자 담배로 해외 시장에서 PMI와 겨루면서 매출을 꾸준히 끌어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KT&G는 전통 연초 시장에 꾸준히 투자한 결과, 올 3분기에 역대 최고의 분기 매출을 달성했다. 최근 경영진이 밝힌 중장기 성장전략에 따르면, KT&G는 9월 인도네시아 투자부와 신공장 건설을 위한 투자지원 협약을 체결했고, 10월에는 카자흐스탄에 NGP(차세대 담배)와 연초를 생산하는 ‘하이브리드형’ 신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이와 관련, KT&G 관계자는 “연초를 비롯해 건강기능식품과 차세대 담배(NPG)가 KT&G의 3대 성장 축”이라며 “전자 담배 스틱 매출을 2027년까지 매년 연평균 30% 가량 성장시키겠다는 점을 IR 등을 통해서 주주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장기적으로 비궐련 사업으로의 구조적 전환(2027년 NGP+건기식 비중 60% 이상 목표)을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대표 선임 절차에 대해서도 “대표자의 평가는 매출 뿐만아니라 수익성, 성장성, 안정성 등 정량화된 재무성과지표, 전략성과지표, 시장 성과지표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다”며 “2027년까지 매출 10조원 목표 및 3대 핵심사업 중심의 '글로벌 톱티어 도약' 등 중장기적 비전 방향을 이미 밝힌 바 있으며, 이에 발맞춰 중장기적으로 약 3.5조 규모의 성장투자에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식은 미래를 먹고 산다’. 이 같은 자본 시장의 오랜 격언은 현대차와 테슬라의 사례에서 이미 증명됐다. 테슬라가 시가총액 1000조원을 웃돌 정도로 글로벌 투자 자금의 블랙홀로 격상되는 동안, 현대차 주가(21일 기준)는 2021년 고점 대비 약 20% 하락했다. 현대차 시총은 39조원에 불과하다. KT&G가 미래에 투자하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는 한 KT&G는 영원한 은둔의 배당주로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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