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운전대를 놓으려면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4. 10. 17.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양창모 | 강원도의 왕진의사

방문진료 갔던 늦은 오후. 할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다. 팔십대 노부부 사이가 팽팽하게 날이 서 있다. 넌지시 할머니에게 물었다. “오늘, 시내에 나갔다 오셨나 봐요?” “어떻게 알았어? 약 타러 갔다 왔어.”

배산임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집 마당. 장독대 너머로 멀리 펼쳐진 호수를 내려다보고만 있어도 마음에 평화가 깃드는 곳. 거기에 사는 부부는 할머니가 시내로 가 약 타고 온 날만 되면 꼭 부부 싸움을 한다.

이십여년 전 이곳의 풍경에 반해 주택을 지어 이사 온 날은 할아버지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자 할머니의 고행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무릎 관절염 4기에 진입한 할머니는 그 무릎으로 한달에 한번 약 타러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간다. 자가운전자인 할아버지는 시내까지 가진 않고 익숙한 동네 길만 운전했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할아버지가 차로 데려다주고 마중을 나오니 그나마 괜찮지만 싸우는 속내는 따로 있다. 몇년 전 이곳의 시골 버스가 대대적인 개편을 했다. 큰 버스가 조그마한 마을버스로 바뀌었다. 할머니는 큰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갈 때는 빈자리가 있어 앉아 갔다. 하지만 버스가 작아지면서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매번 버스를 탈 때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한 시간 내내 서서 갈 때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무릎에서 쏘는 통증이 올라올 때마다 멀쩡한 서울 집 팔아 시골 와 살자고 한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부 싸움을 했다.

한 시골 마을의 노인들이 오일장을 본 뒤 버스에 올라타고 있다. 정대하 선임기자

최근 고령 운전자에 대한 운전면허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고령 운전자의 차에 비상자동제동장치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시골 노인이 운전대를 놓지 못하는 원인은 차 안에 있지 않다. 차 밖에 있다.

방문진료 갈 때마다 할머니들에게 장을 어떻게 보는지 묻는다. 인근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사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문진료 일을 하기 전, 내게 도시란 시골에 기생하는 곳이었다. 쌀 한톨 나지 않는 도시 사람들이 매일 먹는 먹거리는 결코 도시에서 자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골을 다녀보니 시골은 도시에 기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차 없는 시골 노인의 삶은 도시 사는 가족의 공급 지원 없이는 단 한달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노부부처럼 도시 사는 가족이 가까이에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활이 되려면 적어도 마트에서 장을 볼 수는 있어야 한다. 노인회관에서 점심 먹으며 이웃을 만날 수 있어야 하고, 병원 가서 약을 타 올 수도 있어야 한다. 할아버지가 운전면허를 반납하면 어떻게 될까. 읍내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것도, 쌀 포대나 수박을 들고 오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가는 오르막길은 빈손으로도 걸어 올라가기 쉽지 않다. 차가 없으면 할머니는 장 봐 온 걸 들고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그때는 부부 싸움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알고 있다. 운전면허를 반납하는 날이 부부가 이 집을 떠나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그날. 더운데 다니느라 고생한다며 할머니가 내놓은 딸기는 한 귀퉁이에 하얗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물에 씻어 상한 부위를 몰래 도려내고 고맙다 인사드리며 나누어 먹었다. 방문진료 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은 진료가 아니다. 노인들이 우리에게 내놓는 무언가를 사양하는 일이다. 도시에서는 쉽게 버렸을 딸기를 버릴 수 없는 건, 접시 위에 놓이기까지의 과정을 알기 때문이다. 시골 노인이 방문진료 온 우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도 어쩌면 우리의 그 기나긴 여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골 노인에 대한 정책을 만드는 이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도 여정이다. 정책을 바꾸기 전에 운전면허가 없는 노인의 하루를 따라가 봤으면 좋겠다. 생필품을 날라주던 자식들이 행여 일이 생겨 못 오게 됐을 때 노인의 밥상이 어떻게 되는지 들여다본다면 깨닫게 될 것이다. 노인이 운전대를 놓는 데 필요한 것은 운전대를 놓은 이후의 삶이 두렵지 않은 사회라는 것을.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