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공동체 시스템 복원력이 신뢰회복 잣대
국가 민간 경제적 신뢰지표 CDS 악화 추세
새로운 조직수장 ‘자리값’해야 지속가능성 높여
매년 연말연시는 대부분의 회사가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자리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다. KB금융 등 주요 금융지주 역시 은행장과 계열사 대표를 새로 선임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조직을 어디로 이끌고 갈 지 포부를 밝힌다. 해마다 선언하는 금융사 수장의 신년사에 등장하는 문구는 늘 그렇듯이 별로 새로울 게 없다. ‘위기관리 신뢰회복 내부통제 고객 안정 내실 효율 혁신’ 등 언제나 어디서나 듣는 익숙한 단어들이다. 결국 각자 당면한 처지에서 자기가 속한 조직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높이는 방법을 그때마다 골라 표현하는 것이다.
비상계엄으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과 외신들은 한국 공동체의 민주적 복원력(Resilience)에 크게 주목했다. 공동체 복원력은 충격으로 정상 괘도를 이탈한 사회시스템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힘을 말한다. 국가나 회사뿐 아니라 개인도 살다 보면 누구나 생존을 위협받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누구는 죽어 사라지고 또다른 누군가는 살아남아 후세에 자신의 DNA를 이어간다. 치명적 충격으로 치닫는 위기국면에서 조직과 개인의 명운을 가르는 핵심요인(Key Factor)은 충격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원심력과 속도, 즉 ‘복원력’이다. 복원력이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한다.
비상계엄 선포 후 2시간 30분만에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만 해도 외신들은 ‘자기회사의 고장난 복사기 수리하는 시간보다 짧다’는 찬사를 쏟아내며 한국의 민주적 사회시스템 복원력을 극찬했다. 하지만 한달 넘게 충격의 여파가 지속되고 혼란스러운 국면이 지속되면서 점차 한국사회의 시스템 복원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사회경제시스템 복원력이 강해야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고 경제지표도 안정된다.
‘국가신인도’로 통칭되는 공동체 복원력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지표중의 하나가 신용부도스왑(CDS, Credit Default Swap) 프리미엄이다. CDS 프리미엄은 정부나 민간기업이 외평채나 채권을 발행할 때 발행기관의 신용위험(Counterparty Risk)을 이전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신용스프레드(수수료)를 말한다. CDS 프리미엄이 확대되는 요인은 다양하지만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으로 나눠볼 때 지금 한국의 CDS프리미엄 변동성은 트럼프 2기 출범 등 외부적 요인뿐 아니라 비상계엄 등 내부적 요인이 더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금년도 정부와 국내기업의 외화채권 만기도래액이 전년대비 20% 증가한 497억달러로 추정된다(국제금융센터, 2025년 한국계 외화채권 발행시장전망, 2024.12.31). 전년도 순발행액이 105억달러 수준임을 감안하면 만기도래를 포함한 외화채권 총 발행규모는 60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주요 발행기관은 KDB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이 48%(238억달러)로 가장 많고 공기업 82억달러, 시중은행 58억달러, 민간기업 45억달러, 민간금융사 34억달러, 금융공기업과 정부가 각각 29억달러, 11억달러 등이다.
금년도 발행예정 외화채권 약 600억달러(87조원, 환율 1450원)를 기준으로 CDS 프리미엄이 평균 10bp 확대될 때마다 추가비용부담이 매년 900억원에 달한다. 2023년말 외평채 5년물 CDS프리미엄이 27bp였지만 계엄령 발표 이후 2024년말 38bp로 12bp 확대됐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발표 당일에만 장중에 전일대비 10bp 상승하며 불안정한 상황을 보였다. KDB산업은행과 KB국민은행 CDS프리미엄 역시 계엄 당시 50bp까지 상승했지만 이후 시스템 복원력이 일부 확인되면서 2025년 1월 현재 40bp 수준으로 완화되고 있다. 1년물 기준 단기 조달비용도 계엄령 이전 대비 10~14bp 이상 확대됐다. 한국 공동체의 회복탄력성이 허약해 시스템 불안정성이 오래 지속될수록 공동체 구성원이 나눠 부담해야 할 비용은 비례해 늘어난다.
태어나 살다 죽는 것은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동일한 숙명이다. 그렇다고 각자 맞이하는 죽음의 무게가 모두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장례식이 화려하고 장엄하다고 잘 살았다 말할 수는 없다. 훌륭한 삶을 산 이의 죽음은 엄숙하고 모든 이들이 경배한다. 사리사욕을 위해 공동체 모두를 위험으로 몰고간 사람의 죽음과 모두가 존경하는 리더의 죽음이 가지는 무게가 같을 수는 없다. 국가적 혼란을 초래한 내란을 저지른 무리에게서 자신의 존재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작은 고민의 흔적이라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헛된 망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잠시라도 멈춰 서서 공동체의 미래를 한번이라도 생각했다면 모두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와중에도 각자 자기 혼자 살겠다고 어리석은 언행으로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귀를 닫는 무리가 활개치는 세태에 2000년전 사마천이 묻는다. 지금 당신은 자신의 죽음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역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마천은 생전에 아버지와 약속한 ‘사기(史記)’ 집필을 완성하기 위해 죽음보다 더 치욕스런 궁형을 자청해 내시가 됐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복수를 다짐하지만 만년 서생(書生 )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글을 쓰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형으로 괴로움을 달래며 ‘사기’ 집필에 매달리던 시절에 태자모반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 조정 등원 동기생인 ‘임안’에게 보낸 편지가 ‘보임안서(報任安書)’다.
‘보임안서’에는 사마천의 생사관을 엿볼 수 있는 고사성어 ‘구우일모(九牛一毛)’가 나온다. 자신의 죽음은 ‘아홉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 없어지는 정도’로 땅강아지 개미 같은 미물의 죽음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평소 자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평소 살아온 삶의 궤적이 자기 죽음의 무게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한 사람은 대부분 유쾌하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크든 작든 하나의 조직을 책임지는 자리는 그 자리의 수장 개인의 불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옛날부터 선조들은 집터보다 집이 크면 집이 지기(地氣)를 눌러 이롭지 못하다고 했다. 사람보다 자리가 더 크면 큰 모자가 시야를 가리는 꼴이니 앞뒤 분간이 어려워진다. 고 신영복 선생은 자기능력의 70% 정도만 발휘해도 넉넉히 수행할 수 있는 자리가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적당한 ‘자신의 자리’라고 했다. 새해 들어 새로운 자리에 오른 모든 조직의 리더들이 소속 공동체의 복원력을 강화해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넉넉한 ‘자리 값’을 하길 바란다.
허정수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