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합참 ‘러-우크라 평화협상’ 띄우기…전망은 안갯속
밀리 합참의장, ‘러시아는 퇴각 중, 적이 약할 때 협상해야’
겨울철 러-우 전력 재정비가 어느 쪽에 유리할지 미지수
국무부도 ‘러-우 평화협상 토대 준비중’ 보도 잇따라
24일로 10개월째로 접어드는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남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헤르손을 탈환하면서 미국·러시아·우크라이나 간에 외교적 해법을 둘러싼 움직임이 조금씩 시작되는 모습이다. 미국 군부가 먼저 외교적 해법을 찾을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우크라이나가 부정적 자세를 꺾지 않아 지난 3월 말 튀르키예 이스탄불 회담 이후 7개월째 중단된 대화가 재개될지는 불확실하다.
■ 미 군부가 먼저 꺼낸 ‘외교적 해법’
러시아가 헤르손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한 지난 9일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은 뉴욕경제클럽 강연에서 러시아의 헤르손 철수와 곧 겨울이 다가온다는 사실 등을 언급하며, 이 두가지 변화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두 나라에 “협상을 위한 기회의 창”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밀리 의장은 나아가 전쟁이 시작된 뒤 9개월 동안 두 나라에서 20만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4만명의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숨지고, 3천만명이 난민이 됐다면서 “협상의 기회가 있을 때, 평화를 이룰 수 있을 때, 그것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두 나라가 협상에 임하려면 “승리를 말 그대로 군사적 수단으로는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상호 인식이 있어야만 한다”며 이 경우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다른 수단 쪽으로 (관심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봄까지 계속 싸워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밀리 의장의 이 언급은 지난 2월 말 전쟁이 시작된 뒤 우크라이나 편에 서, 지난 10일 현재 무려 183억달러(약 24조8000억원)에 달하는 무기와 탄약 등을 지원해온 미 군부 최고위 인사의 견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장기화되는 지원으로 인해 미국 내에 ‘지원 피로감’이 쌓이고 탄약 등 지원 물자가 현실적으로 부족해진 상황 등을 반영해 조 바이든 행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출구 전략’을 모색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8일 중간선거를 선방한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선명한 입장을 고집해야 했던 선거 전의 입장에서 유연해질 여유도 생긴 상황이다. 게다가 전쟁이 지속되면, 물가 오름세가 계속 이어져 경기침체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 밀리 의장이 말한 대로 두 나라가 계속 ‘군사적 해법’을 추구하면, 막대한 인명 피해가 불가피하다.
이와 관련해 미국 <시엔엔>(CNN) 방송은 미국이 지금 우크라이나 지원 때문에 무기 재고가 바닥났고, 지금은 겨울에 대비한 장비인 히터와 발전기 등을 구하느라고 전세계를 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사실은 미국이 한국에서 10만발의 155㎜ 포탄을 구입한다는 언론 보도를 통해 다시 한번 부각된 바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10일 한국의 155㎜ 포탄 10만발을 미국이 구매하는 방안에 한·미 국방장관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이 보도가 나온 직후 한국 국방부는 “최종 사용자가 미국이란 전제로 포탄 수출 협의를 하고 있으며, 살상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변함없다”고 말했다. 한국의 포탄을 미국에 주고, 미국이 자신들의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것이라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를 간접 시인하는 내용이었다.
■ 협상 둘러싼 다양한 말들
밀리 의장의 외교적 해법 주장에 앞서 미국과 러시아는 확전을 막기 위한 접촉을 강화해왔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 밀리 미 합참의장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 참모총장은 지난달 말 각각 두차례씩 러시아가 주장하는 우크라이나의 ‘더러운 폭탄’(방사능 폭탄) 사용 주장을 놓고 전화 협의를 이어갔다.
미 국무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아직 외교적 협상은 이르다는 공식 입장이지만, 대화의 기반을 마련하는 정지 작업을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6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몇달 동안 유리 우샤코프 러시아 외교보좌관 및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안전보장회의 의장과 비밀 접촉을 통해 확전을 막는 한편 외교적 해법의 기반을 닦았다고 전했다. 하루 앞선 5일엔 <워싱턴 포스트>는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에게 러시아와의 협상에 열린 자세를 보일 것을 은밀히 권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런 보도가 이어지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7일 밤 공개 연설에서 서방이 러시아와 대화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는 설을 부인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 △러시아의 유엔 헌장 존중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 △전쟁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 △이런 침략이 다시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 등 5개를 대화 재개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는 자신들이 그동안 이런 조건을 전제로 대화를 꾸준히 제안했으나 “러시아는 새로운 테러 위협과 폭격, 협박 등 광적인 대응으로 답해왔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이 사실상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5대 조건’을 제시하자 러시아 역시 미묘한 입장을 밝혔다. 안드레이 루덴코 외교차관은 지난 8일 러시아는 협상 시작에 어떠한 조건도 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언제나 협상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면서, 3월 말 이스탄불에서 열린 평화협상이 중지된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 대변인도 7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접촉에 열려 있으나, 다른 나라들이 러시아 쪽과의 협상을 금지하고 있다는 인식을 밝혔다.
이후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지난 14일 그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중재 노력을 해온 튀르키예를 방문한 뒤 15일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났다.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은 17일 우크라이나 매체인 <키이우 인디펜던트>에 “푸틴이 직접적인 협상을 원한다는 신호를 받았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하야해야 협상할 수 있다는 그동안의 요구보다는 누그러진 입장이었다.
■ 협상 재개될 수 있을까
미국 <폴리티코>는 15일 “국무부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평화협상 토대를 준비하고 있다”며 워싱턴은 날씨로 인해 적대적 행위가 감소할 때인 겨울에 협상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나아가 “또 10만명을 그 심연에 보내기 전에 평화협상을 왜 시작하지 않냐”는 한 미국 당국자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현재 전황을 보면 우크라이나가 헤르손을 탈환하며 드니프로강을 통해 러시아를 마주보게 됐다.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강을 등지고 있는 헤르손시는 우크라이나 내륙 북쪽으로 진공에 나설 경우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지만, 전황이 밀릴 때는 방어에 취약하다. 그 때문에 헤르손을 큰 전투나 손실 없이 내주고 드니프로강 동안을 방어선으로 전력 재정비를 꾀하는 중이다. 반대로 우크라이나가 드니프로강을 넘어 공세를 지속하려면,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이 배가돼야 한다. 결국 강을 사이에 두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며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이 기간 동안 양쪽이 전력을 재정비하면 어느 쪽이 유리해질지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다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잇따른 공습으로 전력망의 절반이 작동 불능인 상태다.
문제는 평화협상의 내용이다. 우크라이나는 잃어버린 모든 영토의 회복을 내걸고 있지만, 러시아가 동부 돈바스 등 점령지를 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상적으로는 드니프로강으로 전선을 동결한 뒤 영토와 관련해 ‘현실적인 안’을 만들고, 이를 기초로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 및 러시아의 안보 우려 등 근본적 문제를 협상 의제로 올려야 한다. 하지만 양쪽 모두가 만족할 해법이 도출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다시 한번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는 18일 공개 연설에서 “단순히 전쟁을 끝내는 게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힘을 다시 보충할 수 있는 지금 짧은 정전의 기회를 찾고 있다. 이런 일시적인 중단은 상황을 더 나쁘게 할 뿐”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도 같은 날 “교섭에 응할지 결정하는 것은 젤렌스키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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