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이후 처음…‘야생마’ 이상훈 20승의 ‘빛과 그림자’

[엘팬알백]㊷'LG 역사상 유일' 1995년 이상훈은 어떻게 20승을 달성했나

야생마 이상훈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리고 있다. 이상훈은 1995년 20승 고지까지 역주를 거듭했다. ⓒ스포츠서울
『프로야구의 계절. 메인구장인 잠실벌 삼성-LG의 빅카드는 삼성의 잇따른 보크로 결승점을 얻은 LG가 5-1로 승리했다. LG 선발 이상훈은 7.2이닝을 4안타 1실점으로 호투, 첫승을 올렸다.』 <1995년 4월 16일자 스포츠서울>

LG 트윈스는 1995년 4월 1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시즌 개막전에서 삼성을 5-1로 완파하며 2연패를 향한 힘찬 시동을 걸었다.

아울러 전년도 18승으로 LG 구단 역사상 최초로 다승왕에 오른 투수 이상훈은 생애 첫 개막전 선발등판에서 승리를 따내면서 '야생마'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42번째 주제는 구단 역사상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20승 투수의 탄생 이야기다. 가장 빛나면서도 가장 뼈아팠던 이상훈의 1995년 20승 훈장. 그 도전 과정을 밀도 있게 추적해 나간다.

1995년 4월 16일자 스포츠서울 1면. 시즌 개막전에서 승리로 출발한 이상훈을 대서특필했다. ⓒ스포츠서울

◆‘야생마’ 생애 첫 개막전 선발…20승으로 가는 열차 탑승

1995년 LG의 개막전 선발투수는 누구일까.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는 베테랑 김태원과 영건 에이스 이상훈을 놓고 다양한 추측을 내놓고 있었다.

1993년 9월에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김태원은 1994년 16승5패, 평균자책점 2.41을 기록하며 기량이 완숙 단계에 올랐다. 1993년(광주 해태전)과 1994년(인천 태평양전) 2년 연속 개막전 선발로 나섰을 만큼 경험 많은 10년차 베테랑 투수. LG는 김태원의 호투를 발판 삼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개막전 2연승도 기록했다. 게다가 개막전 상대팀 삼성을 상대로 1994년 3승1패, 평균자책점 2.20으로 강한 면을 보인 투수였다.

이상훈은 1994년 18승6패, 평균자책점 2.47을 찍으며 해태 조계현과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청룡 시절을 포함해 구단 최초로 다승왕을 차지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연 영건 에이스. 이상훈 역시 전년도 페넌트레이스에서 삼성을 상대로 3승2패, 평균자책점 2.50으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이광환 감독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이상훈. 이제 리그를 지배하는 특급투수로 도약했다는 판단이었다.

이상훈의 개막전 선발은 시대의 교체를 의미했다. 1980년대 MBC 청룡 시절 입단했던 김용수, 정삼흠, 김태원 등이 주축이었던 마운드가 1990년대 LG 트윈스 시대에 입단한 이상훈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1995년에도 선발 로테이션 축이 된 이상훈, 정삼흠, 김태원(왼쪽부터). 이상훈은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돼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대접받았다. ⓒ스포츠서울

이상훈은 기대대로 호투했다. 7.2이닝 동안 4안타 1실점 역투를 펼쳐 팀의 5-1 승리를 이끌었다.

감기 증세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변화구 제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볼넷 4개를 내주고 탈삼진은 2개에 그쳤다.

하지만 전년도 다승왕이 그냥 얻어진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개막전에서 첫승을 올리며 폭풍처럼 휘몰아칠 1995시즌을 향한 강력한 예광탄을 쏘아올렸다.

“3일 전부터 감기 때문에 병원에 다녔어요. 개막전 선발이라 1점도 내주지 않는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결국 1점을 뺏겼고 투구내용도 불만입니다. 컨디션이 최악인 상황에서 8회까지 1점만 줬다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개막전 승리 후 이상훈이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LG는 과거 MBC 청룡 시절엔 유난히 개막전에 약했던 팀이었다.

1982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이기고, 청룡 시대 마지막 해인 1989년 신인 김기범의 완투로 승리하긴 했지만 그 사이 6년 연속(1983~1988년) 개막전 패배를 기록했다.

그러나 1990년 LG 시대 이후에 와서는 흐름이 달라졌다. 1991년과 1993~1995년 4차례나 개막전에서 승리했다. 당연히 3년 연속 개막전 승리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경사였다(LG는 1996년까지 지금도 깨지지 않는 4년 연속 개막전 승리로 내달린다).

이상훈은 4월 20일 잠실 라이벌 OB 베어스전에 시즌 두 번째 출격을 했다. 여기서도 6회까지 퍼펙트게임 행진을 펼치는 등 압도적인 구위를 뽐내며 시즌 2승째를 챙겼다. 9이닝 동안 단 3안타만 내주면서 2실점으로 역투해 시즌 첫 완투승을 올렸다.

해태 '싸움닭' 조계현은 1990년대 중반 'LG 킬러'로 위세를 떨쳤다. ⓒ스포츠서울

◆‘LG 킬러’ 조계현과 선발 격돌…뼈아픈 시즌 첫패

시즌 3번째 등판은 4월 20일 잠실 해태전이었다. 상대 선발투수는 난적 조계현. 소문난 ‘LG 킬러’였다.

1993년 4월 11일 이후 LG전에서만 11연승을 달린 ‘싸움닭’. 1994년 8월 7일 대전 한화전 이후 9연승을 질주 중인 ‘야생마’. 더군다나 전년도 공동 다승왕 투수들의 격돌. 그야말로 ‘동물의 왕국’ 최강자를 가리는 빅매치에 야구팬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지만 이날의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이상훈은 1회초 선두타자 이건열을 볼넷으로 내보내며 선취점을 허용했다. 당시 LG 타자들은 조계현만 만나면 현란한 ‘팔색조’ 투구에 점수는커녕 안타조차 뽑기 버거워하던 시절이었다.

불길한 조짐은 2회초 수비로 이어졌다. 1사 만루 위기에서 이건열의 평범한 투수 앞 땅볼을 잡은 이상훈이 1(투수)-6(유격수)-3(1루수) 더블플레이를 노리며 2루에 던졌는데, 유격수로 출장한 이우수가 송구를 놓치면서 2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그해 류지현은 방위복무 중이었다).

3회에는 우익수 박준태의 악송구로 인해 추가 1실점했다. 이상훈은 마운드를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LG는 이날 2-8로 패했다. 이상훈은 2이닝 5실점(3자책점)으로 시즌 첫 패를 안았다. 전년도부터 이어오던 9연승 행진도 마침표를 찍었다.

반면 조계현은 넉넉한 득점 지원을 즐기며 LG 타선을 농락했다. 6이닝 1실점 호투로 LG전 12연승을 달렸다.

LG로서는 당시 해태를 상대할 때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보다 더 무서운 투수가 조계현이었다. 오죽했으면 LG 선수들이 치킨만 봐도 싸움닭이 떠올라 몸에 경기를 일으킨다고 했을까. 그 시절 조계현은 LG에게 그런 존재였다.

특급 선발투수와 특급 마무리투수의 하이파이브. 이상훈과 김용수는 1990년대 LG 마운드를 지탱하는 대들보였다. ⓒ스포츠서울

◆연전연승…놀라온 승수쌓기 ‘10승 고지’ 선착

연승 행진 뒤에 찾아온 쓰디쓴 패배. 하지만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다시 들판을 질주했다.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한 태평양을 상대로 4월 30일엔 잠실에서 9이닝 2실점, 5월 5일엔 인천에서 9이닝 4실점(3자책점)으로 연이어 호투하며 완투승을 올렸다.

5월 11일 잠실 한화전에서 8.1이닝 4실점(3자책점)으로 승패 없이 물러났지만, 그 이후 다시 3연속 선발승을 거뒀다.

6월 7일 잠실 롯데전에서는 1995시즌 들어 유일한 구원등판을 했다. 선발투수 정삼흠이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한 가운데 6-2로 앞선 상황. 이상훈은 7회초 LG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공 10개로 1이닝을 삼자범퇴 처리했다.

이날 LG가 0.5게임차로 돌풍의 OB를 끌어내리고 하루 만에 1위를 복귀할 정도로 1995년 시즌 초반부터 잠실 라이벌 LG와 OB는 숨막히는 선두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훈이 긴급하게 구원등판한 건 치열한 팀 순위싸움 때문이 아니었다.

KBO리그에 투수분업화를 선도하고 있는 이광환 감독이었기에 그럴 이유는 없었다.

이상훈이 앞 등판(5월 30일 잠실 OB전 8이닝 1실점 선발승)에서 미세한 팔꿈치 통증이 발생했기에 상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짧게 구원등판해 테스트를 한 것이었다.

다행히 ‘이상무’였다. 안심이 됐다.

이상훈은 사흘 후인 6월 10일 대구 삼성전에 선발등판했다. 여기서 7이닝 2안타 1실점 호투로 건재를 과시하며 시즌 8승째를 수확했다.

이어 6월 16일 잠실 한화전(8이닝 2실점)과 22일 인천 태평양전(8이닝 1실점)에서 선발승을 올렸다. 거의 완투와 맞먹는 역투였다. 8연승을 달리면서 마침내 시즌 10승 고지를 밟았다.

팀의 시즌 54경기째이자 자신의 시즌 16번째 등판(선발 15경기) 만에 달성한 두 자릿수 승리였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초고속 승수쌓기 페이스였다. 그야말로 일을 낼 기세였다.

서울고 출신 선후배 배터리. LG 포수 김동수와 이상훈은은 찰떡궁합을 이뤘다. 둘은 1995년 나란히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스포츠서울

◆해태에 완투패 또 완투패…해태전에서만 3연패

잘 나가던 급행열차에 제동이 걸렸다. 6월 28일 광주에서 해태를 만났다. 8이닝 5실점(4자책점)으로 완투패를 당했다. 4-2로 앞선 8회에 이종범(2점홈런)과 이순철(솔로홈런)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으면서 또 패전투수가 된 것. 이날까지 시즌 10승2패를 기록했는데 2패 모두 해태에 당했다.

하지만 1995년의 이상훈은 한 번의 기분 나쁜 패배로 슬럼프에 빠지지 않았다. 곧바로 반등했다.

7월 4일 잠실 OB전과 9일 군산 쌍방울전에서 보란듯이 두 차례 모두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올렸다. 안타도 각각 4개와 3개밖에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투구였다.

그렇게 전반기에 12승2패, 평균자책점 2.46으로 한화 송진우(11승3패)를 제치고 다승 단독 1위로 마감했다.

이상훈은 현역 시절 자주 오른쪽 어깨 탈구 증세를 겪었다. 수비시 갑자기 오른쪽에 낀 글러브를 뻗을 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오른쪽은 김용일 트레이너의 젊은 시절 모습. ⓒ스포츠서울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후반기 레이스가 7월 18일 시작됐다. 그런데 또 하필이면 잠실 해태전. 이상훈은 설욕을 벼르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해태만 만나면 뭔가 일이 꼬였다. 수비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1회초 시작하자마자 2사 2루서 홍현우의 타구를 잡은 3루수 송구홍이 1루 악송구를 하면서 선취점을 내줬다.

3회초 1점을 만회해 1-1 동점을 이룬 뒤 5회초에도 연이은 2개의 실책과 1개의 실수(기록상 안타)가 겹치면서 결승점을 헌납했다.

9회까지 2안타 2볼넷만 허용한 채 2실점(비자책점)으로 완투했지만 돌아온 건 팀의 1-2 패배. 자신도 다시 패전의 멍에를 썼다.

해태는 선발 이강철(6이닝 1실점)에 이어 7회부터 선동열을 투입해 마지막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상훈이 시즌 3패를 모두 해태에 당하는 순간이었다.

◆완봉승 또 완봉승…연전연승 삼손의 괴력

이상훈은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 돌입하기 전 머리카락을 자른 뒤 시즌 도중엔 내내 길렀다.

야생마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폭풍투를 펼쳤다. 누군가는 그래서 ‘삼손’이라고 했다.

실제로 삼손처럼 괴력을 발휘했다. 7월 25일 잠실 태평양전(9이닝 3안타 완봉승)부터 8월 13일 잠실 OB전 승리(8이닝 2안타 1실점)까지 5연승을 질주했다. 그 사이 8월 3일 잠실 삼성전에서는 단 88구로 9이닝 3안타 완봉승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상훈은 이날까지 시즌 17승3패를 기록하면서 평균자책점을 2.01로 낮췄다.

LG는 1990년대 중반 최고의 인기팀으로 자리잡았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100만 관중을 기록했다. ⓒLG트윈스

◆싸움닭과 야생마의 재격돌…잠실이 미어터졌다

그렇게 거침없이 질주하던 이상훈에게 또 고비가 찾아온 듯했다.

5일 후인 8월 18일 다시 잠실에서 해태를 만나야 했다. 시즌 17승을 거두는 동안 단 1승도 올리지 못한 상대. 오히려 자신의 시즌 3패를 모조리 안겨준 악몽의 팀이었다.

상대 선발투수는 더군다나 LG전 12연승 무패를 달리고 있는 ‘LG 킬러’ 조계현이었다.

시즌 초반 한 차례 맞대결에서 야생마는 싸움닭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번 오기와 승부근성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LG는 전날까지 단독 1위를 달리고 있었고, 4위 해태는 1.5게임차로 3위 롯데를 추격 중이었다. 전통의 흥행카드 빅매치에 선발투수가 조계현과 이상훈이라면?

아니나 다를까. 이날 오후 잠실구장 일대는 인산인해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한여름 평일(금요일) 야간경기. 팬들은 대낮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지하철 2호선 잠실종합동장역 내부까지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찼다. 아니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요즘처럼 온라인 예매가 없던 시절. 오후 3시에 현장에서 매표를 시작했는데 2시간 10분 만에 3만500장의 표가 모두 팔려 나가 ‘매진’이라는 푯말이 나붙었다.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팬들은 발을 동동 굴렀고, 일부 팬들은 표도 없이 무리하게 입장을 시도했다.

오후 5시께 선수들이 사용하는 3루쪽 입구로 30여 명이 힘으로 문을 밀고 들어왔고, 오후 6시쯤에는 중앙출입구로 70여 명이 난입하면서 어린이가 넘어져 다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얼마나 이 경기를 보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경기 전부터 달아오른 열기만 놓고 보면 행여 무법천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엘팬알백] 20화에서 소개한 1990년 8월 26일 최악의 관중난동 그날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해태와 LG가 만나면 응원전이 가열되기도 했다. 1990년 8월 26일 해태-LG전에서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난입해 경기가 중단된 모습. ⓒ스포츠서울

오후 6시 30분.

허운 주심의 “플레이볼!” 선언 속에 이상훈이 1회초 해태 타선을 삼자범퇴 처리하며 장군을 불렀다. 그러자 조계현은 1회말 LG 타선을 삼자범퇴로 막으면서 ‘멍군’을 불렀다.

이렇게 6회 공방까지 똑같이 2안타 무실점 0의 행렬이 이어졌다. “투수전이 난타전보다 재미있다”는 건 이런 경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조계현 상대 12연패에서 벗어나던 날. 1995년 8월 19일자 1면에 이상훈이 조계현과 완투 대결에서 1-0 완봉승을 거두며 시즌 18승을 달성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1-0 완봉승…조계현 상대 12연패 악몽 탈출하던 날

결말을 알 수 없는 숨 막히는 승부. 그 팽행하던 고무줄이 끊어진 것은 7회말이었다.

선두타자 박종호의 빗맞은 타구가 3루수 뒤쪽에 떨어지는 ‘바가지 안타’가 됐다. 이어 서용빈의 중전안타 때 중견수 김훈이 공을 더듬으면서 무사 1·3루의 황금찬스가 만들어졌다.

다음 타자 김선진의 타구는 3루수 정면 땅볼. 귀중한 3루주자가 무리해서 홈을 노릴 상황이 아니었다.

3루수 홍현우가 3루로 황급히 귀루하는 박종호를 체크하더니 2루로 던지면서 더블플레이를 노렸다.

그런데 박종호가 그 사이 재치있게 방향을 바꿔 과감하게 홈으로 쇄도했고, 해태 2루수 송인호가 홈으로 던졌다. 초접전 모드. 박종호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을 파고들자 허운 주심은 양팔을 수 차례 옆으로 벌리며 “세이프!”를 선언했다.

LG의 1-0 리드.

그러자 성난 해태 팬들이 그라운드에 생수병과 음료수병을 내던졌다. 좌측 외야 관중석에서는 쓰레기통을 통째로 그라운드에 투척하는 팬들이 있었다. 경기가 7분간이나 중단됐다.

다행히 관중의 그라운드 난입은 없었다. 1990년과 같은 불상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날 승부는 이 1점이면 충분했다.

이상훈은 재개된 경기에서 9회까지 4안타 2볼넷 무실점으로 완봉승을 올렸다. 1995년 해태전 3연패 이후 올린 첫 승이었다.

조계현은 8이닝 4안타 1볼넷 1실점(비자책점)으로 역투했지만 패전투수가 됐다. 1993년 4월 11일 이후 이어오던 LG전 12연승 퍼레이드가 끝났다.

LG로선 조계현 상대 12연패의 악몽을 날려버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사실 악몽이 시작된 1993년 4월 11일 또한 LG 팬들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광주에서 조계현에게 9회초 2사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하다 송구홍의 투수 옆을 스치는 중전안타로 가까스로 대기록의 희생양을 피했다.

하지만 그날부터 LG는 ‘싸움닭’을 한번도 넘어뜨리지 못했다.

다시 말해 1993년 입단한 이상훈으로선 LG가 조계현에게 이기는 걸 한번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1993년과 1994년에는 김태원이 조계현과 호적수로 맞서면서 명승부를 펼치곤 했지만 늘 승자는 조계현이었다. 김태원이 조계현보다 안타를 덜 맞아도 승자는 변함없이 조계현이었다.

그런데 이상훈이 1995년 마침내 ‘싸움닭’의 벼슬을 꺾었다. 그동안 LG 에이스들이 1점만 내주고도 패하는 기분을 그대로 느껴보도록 되돌려줬다.

이상훈은 개인 6연승 행진 속에 전구단 승리를 기록하며 시즌 18승(3패)째를 수확했다.

18승은 1986년 신인왕에 오른 MBC 청룡 김건우와 1990년 대기만성형 에이스로 떠오른 김태원이 기록한 승수. 이상훈은 구단 역대 최다승 기록 보유자인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평균자책점은 마침내 1점대(1.90)로 떨어졌다. 탈삼진(114개), 승률(0.857)까지 4개 부문에서 단독 선두를 내달렸다.

“힘들었습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해태전 징크스는 내가 느낀 것보다는 주위에서 만든 것이죠. 의식하지 않으려 했어요. 조계현 선배에 대한 팀의 연패를 끊으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한편, 이날 잠실구장을 직접 찾아 경기를 관람하던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승리가 확정되자 즉석에서 1000만 원의 격려금을 선수단에 전달하며 기뻐했다.

OB 김상진은 LG 이상훈과 동기로 1990년대 중반 라이벌 구단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두산베어스

◆‘배트맨’ 김상진 vs ‘야생마’ 이상훈…1995년 전설의 맞대결 3전3승

1995년 이상훈의 20승 도전 과정을 생각하자면 해태 조계현 외에 OB 김상진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1980년대 롯데 최동원과 해태 선동열의 전설의 3차례 선발 맞대결처럼, LG 팬들은 그해 이상훈과 김상진이 맞붙었던 3차례 진검승부에서 끓어오르던 흥분의 잔상을 여전히 추억 속에 간직하고 있다.

1995년 LG의 야생마 이상훈도 뜨거웠지만, OB 배팅볼 투수로 입단해 에이스로 성장한 ‘배트맨’ 김상진도 뜨겁기는 매한가지였다.

김상진은 기량이 절정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해 시즌 17승은 물론 3연속 완봉승에 8차례 완봉승을 기록했다는 것만으로도 1995년의 김상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한 시즌 8차례 완봉승은 KBO 역사상 1986년 해태 선동열만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던 기록. 요즘은 선발투수의 목표가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라는 점에서 완투조차 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는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 시절 이상훈과 김상진은 트윈스와 베어스 양 팀 팬들의 자존심이 걸린 이름이었다.

LG 팬들은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투수생명을 잃은 MBC 청룡 시절의 김건우 이후 실로 오랜 만에 이상훈이라는 승리의 보증수표를 만났다.

OB 팬들 역시 원년 22연승의 전설 박철순 이후 모처럼 나타난 우완 정통파 김상진의 시원시원한 투구에 매료됐다.

1995년 다승왕에 오른 LG 이상훈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자 다승 2위 OB 김상진이 축하를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강속구로 무장한 좌·우완 에이스들의 맞대결이 펼쳐지는 날엔 잠실구장이 미어터졌다.

“OB 꼴찌~”와 “LG 바보~”로 나뉜 양 팀 팬들의 응원구호는 경기 전부터 잠실구장을 메아리쳤다.

둘은 그해 세 차례(5월 30일, 7월 4일, 8월 13일) 선발 맞대결을 펼쳤다.

여기서 이상훈은 3전3승을 올렸다. 각각 8이닝 1실점, 9이닝 1실점(완투승), 8이닝 1실점의 역투. 시즌 20승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그해 17승으로 다승 2위에 오른 김상진이 만약 거꾸로 그 3승을 가져가거나 2승1패를 거뒀다면 다승왕이 바뀔 수도 있었다. 둘의 운명과 희비가 교차된 지점이었다.

김상진은 훗날 기자와 만났을 때 1995년 이상훈에게 3전 전패를 당했던 이야기를 풀어놨다.

"상훈이는 서울고-고려대를 나오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잖아요. 저는 배팅볼 투수로 시작했고. 지금 돌이켜 보면 제가 그런 부분에서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상훈이를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나쳐 과욕이 된 거죠. 그러다 보니 상훈이와 맞대결을 할 때 평정심과 밸런스가 무너졌던 것 같아요."

'야생마' 이상훈이 볼 판정에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스포츠서울

◆20승 눈앞에 두고 찾아온 깔딱고개

KBO 역사에서 이상훈 이전에 마지막으로 시즌 20승 고지에 오른 투수는 1990년 해태 선동열이었다. 그 이후 누구도 없었다.

하지만 1995년의 이상훈은 선동열 이후 5년 만에 20승을 기대할 수 있는 페이스로 질주했다. 8월 중순(18일)에 이미 18승을 올렸으니 말이다.

이상훈은 18승 고지를 밟은 뒤 인터뷰에서 “승수를 따지기보다는 매 경기 최선을 다하겠다”면서도 “앞으로 6경기 정도 더 등판할 듯한데 가능하리라 생각한다”며 20승 달성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인생사가 뜻대로만 흘러갈까. 20승의 9부 능선까지 넘었지만 최대 고비가 뒤늦게 찾아왔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한 발 내딛기도 버거워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깔딱고개'를 만났다.

8월 18일 한국시리즈를 방불케하는 조계현과 완투 대결을 펼친 뒤 이상훈은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는 9일 만인 8월 2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쌍방울과 더블헤더 제1경기에 선발등판했다.

이상훈은 여기서 9이닝 1실점(비자책점) 완투를 펼쳤다. 하지만 1-1 무승부로 승수 추가에 실패했다.

LG는 이날 더블헤더 제2경기에 이기면서 2위 OB를 6게임차로 벌리며 단독 선두를 질주했다.

그런데 그 이후 LG 내부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이상훈이 사흘만 쉬고 8월 31일 잠실 롯데전에 선발등판한 것. 선발 로테이션을 철칙처럼 지키고 가장 현대적인 마운드 운영을 하던 이광환 감독이었기에 의외의 기용이었다.

LG는 이날 경기 전까지 3위 롯데에 2연패를 했지만 두산에 5게임차로 앞서 있던 상황이었다.

3연전 스윕패를 막고, 이상훈의 20승과 LG의 한국시리즈 직행을 조기에 확정하려는 계산이었지만 패착이 됐다. 시즌 막판도 아닌 8월 말이어서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도 무리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상훈은 7이닝 3실점으로 나름대로 제몫을 했지만 롯데에 0-3으로 패했다. 이상훈으로선 그해 해태를 제외한 다른 팀에 처음으로 패한 날이었다. 시즌 4패째를 당했다. 뭔가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 5일 만인 9월 5일 사직 롯데전에서 이상훈은 4이닝 5실점으로 무너지며 시즌 5패째를 안았다.

10일 잠실 태평양전(더블헤더 제1경기)에서는 8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노 디시전(승패없음)'으로 물러났다. 6회까지 2-0으로 앞서 있어 승수를 추가하는가 했으나 7회와 8회 1점씩을 내주면서 승리를 날렸다. 최근 4경기에서 1무2패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불운의 연속이기도 했지만, 구위가 떨어지고 있었다. 4일 휴식 후 등판하다 시즌 막판 로테이션을 앞당겨 3일 휴식 후 선발등판한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이상훈은 뜻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자 심판의 볼 판정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반기의 자신감 넘치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에이스와 함께 팀도 흔들리면서 이날 태평양에 1무1패를 기록했다. 반면 OB는 추석 연휴 해태전 4연승으로 LG를 제치고 50일 만에 1위로 올라섰다.

피말리는 1위 싸움을 해야하는 LG로서나 20승 달성이 불투명해진 이상훈으로서나 심적으로 쫓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이상훈이 마운드에 주저앉은 모습. 시즌 20승 달성을 앞두고 큰 고비를 만났다. ⓒ스포츠서울

이상훈은 다시 사흘만 쉰 뒤 9월 14일 잠실 OB전에 선발등판했다. 팀도 그도 다급했다. 한국시리즈 직행을 위해서는 OB를 꼭 잡아야했기에 무리를 감수했다.

결국 7.2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고 팀타선이 폭발하면서 LG가 5-1로 승리했다.

이상훈이 4전5기로 마침내 시즌 19승을 찍었다. 김건우와 김태원을 넘어 LG 구단 역사상 시즌 최다승 신기록을 작성하는 순간이었다.

8월 18일 18승 이후 근 한 달(27일) 만에 맛 본 승리투수의 감격. LG도 선두 경쟁팀 OB에 2연승을 거두면서 다시 선두를 탈환했다.

“솔직히 그동안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18승을 거둔 뒤 4차례나 승리를 추가하지 못할 때 타이틀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지친 게 사실입니다. 200이닝을 처음 넘기다 보니 힘이 떨어졌어요. 이젠 타이틀에 연연하고 싶지 않아요. 1승 추가가 너무 부담이 됐습니다.”

이제 20승까지 한 걸음만 남았다. 하지만 OB전에서 수비 도중 무릎이 약간 뒤틀려 몸 상태를 체크해야 했다.

결국 8일 만인 9월 22일 인천 태평양전에 선발등판했다. 여기서 8.1이닝 1실점으로 호투해 '몸에 문제없음'을 알렸다.

하지만 이상훈은 1-1 동점에서 강판해 또 승수 추가에 실패했다. 팀도 연장 12회말 뼈아픈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참 20승이란 게 뭔가 싶었다. 하늘이 허락해야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할 수 있듯, 20승 역시 하늘이 점지한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고지라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역투를 펼친 뒤 포효하는 LG 에이스 이상훈. ⓒ스포츠서울

◆최종등판에서 천신만고 끝에 거둔 시즌 20승

이상훈은 9월 27일 잠실 쌍방울전에 마지막 선발등판을 했다. 다음날 잠실 해태전이 정규시즌 최종전으로 잡혀 있지만, 2위 LG로선 쌍방울을 일단 이기고 봐야 하는 상황. 이날 1게임차로 앞서 있는 선두 OB가 인천에서 태평양 돌핀스와 시즌 최종전에서 패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만약 이날 LG가 쌍방울을 이기고, OB가 태평양에 덜미를 잡힐 경우 LG로선 28일 해태전을 잡으면 0.5게임차로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짓게 된다.

하지만 이날 OB가 태평양을 이긴다면 OB가 자력으로 1위를 확정하는 상황이었다.

이상훈에게도, LG에게도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이상훈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며 역투를 거듭했다. 6회까지 4-1로 앞섰다. 쌍방울은 이미 한 시즌 농사가 끝난 상황이라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7회초 길홍규에게 솔로홈런을 내주는 등 2실점하고, 8회초 정기창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4-4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벼랑 끝에 몰린 LG 선수들은 안간힘을 썼다. 팀의 한국시리즈 직행과 이상훈의 시즌 20승 달성을 위해서였다.

8회말 선두타자 류지현이 좌전안타로 포문을 열었다. 여기서 2번타자 김재현이 천금의 1타점 중월 2루타를 날렸다. 5-4 리드. 이어 노찬엽의 1타점 좌익선상 2루타가 터져 다시 6-4로 달아났다.

'캐넌히터' 김재현이 이상훈의 20승 도우미로 나섰다. 1995년 9월 27일 잠실 쌍방울전 8회말 결승 2루타로 이상훈의 20승 달성을 도왔다.

이상훈은 9회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타자 심성보에게 좌전안타를 맞았다. 마지막 고비였다. 다음타자 박경완을 유격수 땅볼로 유도해 1사 1루. 여기서 김주성의 타구가 3루수 앞 땅볼이 됐다. 6회부터 대수비로 들어간 3루수 이종열이 2루수 박종호에게 연결했고, 박종호가 다시 1루수 서용빈에게 빛의 속도로 던졌다.

5-4-3 더블플레이로 경기 끝!! LG가 6-4 승리를 확정하는 순간이었다.

이상훈은 9이닝 120구 6안타 1볼넷 3탈삼진 4실점(2자책점)으로 완투승을 올렸다. 마침내 시즌 20승을 달성했다.

1990년 선동열 이후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던 20승 고지. 이상훈이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선동열 이후 5년 만에 꿈의 고지를 밟는 주인공이 됐다.

KBO 역사를 보더라도 시즌 20승은 역대 12번째 대기록이었다.

선수로 따지면 OB 박철순(1982년 24승), 삼미 장명부(1983년 30승), 해태 이상윤(1983년 20승), 롯데 최동원(1984년 27승, 1985년 20승), 삼성 김시진(1985년 25승, 1987년 23승)과 김일융(1985년 25승), 해태 선동열(1986년 24승, 1989년 21승, 1990년 22승)에 이어 8번째. 이상훈은 새로운 주인공으로 역사에 발자국을 찍었다.

고려대 8년 선후배 사이인 해태 선동열(오른쪽)과 LG 이상훈이 1993년 사직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앞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95년 이상훈은 1990년 선동열 이후 5년 만에 KBO리그 20승 투수의 계보를 이었다. ⓒ스포츠서울

표에서 보듯 선발 이상훈은 20승을 모두 선발승으로만 채운 최초의 선수였다. 장명부, 김시진, 김일융이 선발 20승을 돌파하기는 했지만 시즌 승수 중에는 구원승도 포함돼 있었다. 그만큼 1980년대 각 팀 에이스들은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출격했다.

이상훈의 20승 달성은 이광환 감독의 철저한 투수 분업화 철학 속에서 빚어진 작품이었다.

아울러 한 시즌 선발 로테이션을 지켜가면서도 20승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는 점에서 한국야구사에 있어서도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이상훈 이전까지 LG 구단 역사(전신 MBC 청룡 포함)에서 시즌 20승을 달성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아무도 없다. 현재까지 LG 투수 중 시즌 20승을 기록한 선수는 이상훈이 유일하다.

아울러 LG 구단 역사상 유일한 '2년 연속 다승왕'이라는 타이틀도 작성했다.

하지만 이상훈은 20승을 달성한 그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이날 OB가 수원에서 3-2로 승리해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넘겨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광환 감독이 꽃다발을 전달하는 것으로 조촐하게 20승 축하를 했고, LG 선수들도 조용히 축하를 건넬 뿐이었다.

이상훈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LG 이광환 감독이 쌍방울전 완투승으로 기념비적인 시즌 20승을 달성한 이상훈에게 꽃다발을 주며 축하하고 있다. 이날 OB가 인천에서 태평양을 꺾고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한 까닭에 이상훈의 표정도 밝지 않다. 불 꺼진 그라운드가 팀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스포츠서울
“20승에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페넌트레이스 1위 자리를 OB에 내주고 말아 너무 아쉽습니다. 20승을 하게끔 끝까지 던지도록 해준 코칭스태프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8월 중반 이후 OB와 게임차가 좁혀지는 데에다 20승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많았습니다.”

이상훈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인터뷰 말미에 “20승을 달성했으니 MVP에 도전해보겠다”는 말을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역사는 야생마를, 그리고 LG 트윈스를 외면했다.

1995년 MVP를 수상한 OB 김상호(왼쪽)와 신인왕 이동수. ⓒ스포츠서울

◆MVP는 OB 김상호…LG, 여전히 시즌 MVP 0명 배출 통한의 역사

『김상호(OB)와 이동수(삼성)가 95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MVP와 신인왕으로 선정됐다. 1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프로야구 기자단 투표에서 김상호는 전체 유효투표 56표 중 1위 46표, 2위 10표를 얻어 총점 510점을 따 1위 9표, 2위 37표 등 300점을 얻는 데 그친 LG의 20승 투수 이상훈에 210차로 크게 앞서 MVP로 뽑혔다.』 <1995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

충격적인 투표 결과였다.

물론 김상호도 MVP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다. 시즌 전경기(126경기)에 출장해 타율 0.276, 25홈런, 101타점을 올렸다.

구장 규모가 가장 큰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팀의 선수로는 KBO 출범 후 최초로 홈런왕에 올랐고, 장종훈(1991, 1992년) 이후 KBO 역사상 두 번째 100타점 타자가 됐다. 최다안타(137개) 5위에 장타율(0.474)도 7위였다.

이상훈은 시즌 30경기(선발 29경기)에 등판해 20승5패를 기록했다. 다승뿐만 아니라 승률(0.800) 1위에 평균자책점(2.01) 2위, 탈삼진 5위(142개)로 고른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WAR(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도)로 비교해 보면 기여도의 차이가 크다.

144경기 체제로 보정한 WAR/144(스탯티즈 기준)에서 이상훈은 8.90으로 김상호(4.29)를 압도한다.

하지만 당시 투표인단의 선택은 김상호였다. 이는 개인 성적 외에 다른 요인도 작용했다.

우선 페넌트레이스에서 OB가 극적인 뒤집기로 1위를 차지하면서 한국시리즈 직행에 기여한 가산점을 부여받았다. 아무래도 우승팀 프리미엄이 붙었다.

여기에 이상훈이 평소 취재진과 마찰이 일어난 부분도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상훈은 좋게 보면 솔직하지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다 보니 LG 프런트는 물론 취재진과도 불필요하게 트러블이 생겼다.

당시 투표방식은 1인 1표의 득표제가 아닌 후보 1~5위에 10점부터 1점까지 가중치를 두는 점수제였다.

김상호는 배점이 높은 1위에 표가 집중됐고, 이상훈은 반대로 낮은 점수의 표가 많았다. 예상 밖으로 김상호와 점수차가 크게 벌어진 이유다.

김상호는 1988년 MBC 청룡에 입단한 뒤 팀동료 이용철에게 밀려 신인왕 수상에 실패했다. 1990년 OB로 트레이된 뒤 1995년 MVP를 수상하며 한을 풀었다. ⓒ스포츠서울

투표 시점도 영향이 있었다. 플레이오프 최종전(6차전)이 10월 10일 펼쳐졌는데, 투표는 이틀 뒤인 12일에 열렸다.

이상훈이 플레이오프에서 1승도 올리지 못하고 부진하면서 LG가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그런 잔영이 가시기 전에 투표가 이뤄졌다.

만약 페넌트레이스 직후나 한국시리즈까지 모두 마친 다음 투표를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김상호도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까지 삼진 6개를 기록하는 등 부진했기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예상밖의 결과에 투표를 마친 기자단도 당혹스러워했다. 수상자의 주인공은 그렇다 치더라도 점수 차이가 너무 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듬해부터 투표 방식이 변경됐다. 점수제에서 득표제로 바뀌게 됐다.

요즘엔 페넌트레이스 MVP 투표 시점도 포스트시즌 활약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정규시즌 종료 후 투표를 한 뒤 시상식 때 개봉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상훈이 1995년 정규시즌 MVP를 받지 못하면서 LG 트윈스 구단에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고 있다. 페넌트레이스 MVP 수상자 0명 배출이라는 모진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LG 트윈스에서 언제, 누가 최초의 MVP 주인공이 될까.

“좀더 정중하고 사근사근한 사람이 돼야겠습니다.”

이상훈이 MVP 탈락 후 12월 7일자 경향신문과 와이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995년 LG의 행보도 이상훈과 흡사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정작 내실을 찾지 못하는 아픔을 겪는다.

[엘팬알백] ㊸편에서 계속

1990년대 LG 이상훈은 곧 승리의 이름이었다. '야생마'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시원시원한 세리머리는 LG 팬들의 가슴에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스포츠서울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