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광주‘금재로’의 주인공…의병장 금재 이기손 [도로명 속 남도 역사인물]

광주 북구에 유동과 북동을 잇는 길이 '금재로'다. 한말 의병장 금재((錦齋) 이기손(李起巽, 1879~1957)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북성중학교 정문 옆길에서 시작, 수창초등학교 후문과 북동성당을 지나 대인교차로까지의 도로로, 길이는 869미터다.

#용진산에서 거병
이기손은 1879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산동 장등마을에서 부친 이영의(李榮儀)와 모친 청안 이씨 사이에 3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안식(安植), 호는 금재(錦齋)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공부하기를 좋아하였고, 9살 때 유교경전인 4서 3경을 통독할 만큼 신동에 가까웠다. 성년이 되어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1851~1931)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금재는 동료들에게 사전이라 불릴 정도로 학문에 통달하였지만, 집안 사정으로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과 도학에만 몰두한 유학자였다.
이기손이 언제 거병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지만, 1908년 초엽으로 보인다. 그가 거병한 장소는 광산군 임곡면과 장성군 동화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용진산이었다. 이기손이 1909년 3월에 쓴 격문을 보면 '호남의장(湖南義將) 이기손'으로 나온다. 이는 그의 의병부대가 '호남의군(湖南義軍)'임을 알게 해준다. 호남의군의 조직을 보면 상대장은 이기손, 선봉장은 박일동(전)과 엄석운(후), 중군장은 양동환, 후군장은 오용근, 호군장은 김선원, 우익장은 정만선, 좌익장은 조만길, 포대장은 김봉선, 서기는 이재훈이었다.
각종 기록에서 확인된 이기손 의진의 규모는 20명~50명이었다. 용진산에서 거병하였지만, 삼도동의 석문산과 함평 나산의 유덕산 등으로 거점을 옮겨갔고, 주요 전투지는 광산군(현 광산구)과 함평군, 영광군 등이다.
이기손은 격문과 통문을 통해 거병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의병을 모았다. 그리고 1909년 2월에는 "……원컨대 성(省)안의 뜻있는 인사들이여!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성공을 기도한다면 나라의 원수를 갚고 강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불초 이 몸은 살아서는 우리 임금의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이 땅의 귀신이 될 것이다. 어찌 편안히 앉아서 저놈들의 능욕을 받겠는가"라는 격문을 발한다.
동년 3월 2일에는 "호남의병장 이기손은 중군장 양동환, 선봉장 엄석운, 중군장 오용근 등과 함께 격문을 보내어 성(省) 안의 여러분께 삼가 고한다.……아! 무릇 공경 목수 및 사·농·공·상이 이미 예의를 잃고서 무슨 낯으로 가을 등잔 밑에서 글 읽으며, 인의의 도를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언행일지를 기약할 수 있으냐……이로써 동포에게 고하노니 때는 바야흐로 왔다. 여러분이 떨치고 일어난다면 나라의 원수를 갚고 국토를 회복할 수 있다.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기손이 이끈 호남의진이 일제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한 것은 1909년 6월부터 7월이었다. 이는 1913년 일제가 남긴 『전남폭도사』의 다음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09년 6월 16일 오후 6시 나주분견소 임곡임시파견소(현 광산군 임곡면 임곡리) 상등병 2명, 보조원 6명이 적괴(敵魁, 적의 우두머리) 이금제(李錦齊, 이기손)가 이끄는 약 40명의 비도(匪徒)와 함평군 장본면 장림촌(현 광산구 동호동)에서 충돌, 2명을 죽이고 모제르(Mauser) 총 1정과 기타 잡품을 노획하였다.",
"7월 4일 오후 1시 함평군 월악면(현 월야면) 월악산에서 구밀(求密, 현 함평군 해보면 문장리) 파견소 헌병 2명, 보조원 3명과 삼거리 파견소 헌병 1명, 보조원 4명이 적괴 이금제(李錦齊, 이기손)가 이끄는 폭도 50명과 충돌, 이를 격파했는데, 3명을 죽이고 화승총 1정을 노획했다.", "7월 6일 오후 7시 영광군 마촌면 산정리(현 대마면 화평리)에서 이곳 분견소 헌병 2명, 보조원 4명이, 적괴 이기손이 이끄는 약 30명의 비도를 공격, 화승총 1정을 노획했다."
"7월 26일 오후 6시 말재(馬峙) 파견소 헌병 1명, 보조원 3명이 영광수비대원 30명과 협력해서 영광군 삼북면(현 장성군 삼계면) 혼관산에서 수괴 이기손이 이끄는 약 20명의 적을 공격, 2명을 죽이고 이를 격퇴하였으며, 화승총 1정을 노획했다."
"동일(7월 26일) 밤 11시 사가점 파견소 헌병 1명, 보조원 3명이 영광군 삼북면 수하리(현 장성군 삼계면 화산리 사하마을) 고지에서 적괴 이기손이 이끄는 약 30명의 적을 공격 이를 궤주시켰는데, 6명을 죽이고 화승총 6정을 노획하였다."
전남폭도사』에는 이기손 의병부대의 전투 기록이 5회 나오는데, 시점은 1909년 6월 16일부터 7월 26일까지이다. 이 시기,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위 기록에 의하면 5번의 전투 기간 중 이기손 의진의 의병 15명이 전사하고 있고, 모제르 총 1정과 화승총 9정을 빼앗기고 있다. 5번의 전투 중 장성군 삼계면 화산리 고지에서 영광 수비대원과 헌병에 맞서 싸운 7월 26일 저녁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전투 경과 의병 6명이 전사하고 화승총 6정도 빼앗기는 패배를 당한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
이 무렵 광주·전남의 의병은 막대한 타격을 입는다. 이기손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9월 초순 부하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의진의 해산을 명한다. 그가 군대를 해산하면서 남긴 '해병문(解兵文)은 다음과 같다.
"호남에도 의병 땅이 없어졌다. 옛 시에 이르되 영웅도 운이 다하면 다시 도모하기 어렵다 하였다. 이제 세계 정세가 왜적의 세력이 창궐일로 다다르니 방금에 심남일, 안덕봉은 병력을 놓아버리고 깊이 들어갔으며, 전해산 박포대(박도경, 필자주)도 군병을 풀고 산으로 돌아갔으니, 나 홀로 기손만이 어찌하리오. 군려(軍旅)를 익히지 못하였으니 중차대한 국난을 감당할 길 없도다. 의병을 거느리고 촌락을 두루 다니며 왜적들과 싸워온 지 여러 차례나 세력이 여의치 못함에 군용기재를 허다히 잃었도다. 이제 우리 군중에 영을 내리노니 나 또한 군병을 풀고 멀리 망명길로 떠나 후사를 도모하고자 하오니 왜적들은 나의 갈 길 쫓지 말지어다."
이기손은 의진을 해산한 후 「해방시 유감(解兵時 有感)」이라는 시에서 "왜적은 날로 늘고 아군은 줄어만 가니 서로의 세력이 지탱하기 어려워라. 헛되이 적에게 죽고 만다면 그 무엇 나라에 유익하리오(賊衆我寡 勢不相支 徒死於賊 何益於國)"라며, 망명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금재 이기손이 선택한 망명지는 만주였다.
그는 망명 직전 집을 나서면서 「망명시 유감(亡命時有感)」이란 다음의 시를 지어 그의 심정을 표현했다. "왜적 무리 씨 없이 죽이려고 기약했으나 포획한 것 헤아리니 수백에 불과하도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통곡하노니 왜적들아 나의 길을 막지 마라(賊虜期於屠戮無類 捕獲不過數百 天乎天乎 賊勿追後)"
그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시기 일제의 마수를 벗어난 광주 출신 유일의 의병장이었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건너간 그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경 귀국, 전북 금산에 은거한다. 그는 금산에서 서당을 차리고 제자들을 기르다 1957년 8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1977년 정부는 금재 이기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송정공원과 본량초등학교에는 이기손 의병장을 기리는 의적비도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