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명문가가 이순신 장군 때문에 미역만 먹게 된 이유

음력 7월 8일, 이순신 장군에게 패배한 일본 명문가가 그를 기억하는 방법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1592년 4월, 한반도를 넘어 명을 정복하겠다는 야심과 함께 왜군이 한반도를 침략했다. 왜군은 부산, 동래, 김해를 순식간에 점령했고, 빠른 속도로 북상하여 단 15일 만에 한양마저 점령했다.

출처 : 위키백과

한양 수복을 위해 농민병을 주축으로 7~8만 명의 대군이 모였는데 이때 조선 최악의 패전인 용인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조선 최악의 패전인 용인 전투

출처 : KBS <불멸의 이순신>

용인 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일어난 전쟁으로 1,600여 명의 왜군이 무려 40~50배가 넘는 7~8만의 조선군을 와해시켰다.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와키자카 야스하루.

출처 : <한산: 용의 출현> 속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
흰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10만의 군사가 차례로 무너져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바람 앞의 촛불. 조선이 처한 현실이 딱 그랬다. 이때 나선 이순신. 장수들이 전투에서 연이어 패하고, 왕실은 북으로 달아나고 있을 때,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바다에서 왜군을 막았다.

출처 : 연합뉴스

거제 앞바다에서 치러진 옥포해전의 첫 승! 이어 당포 (통영), 당항포 (고성), 한산도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용인 전투 후 기세등등했던 와키자카가 처절하게 패배한 게 바로 한산도 대첩이었다.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출처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한산> 스틸 이미지

왜군의 수군 66척이 완전히 박살 났으며, 와키자카는 패잔병들과 함께 겨우 도망쳤다. 그렇게 무인도에 10일을 갇혀 지내면서 미역만 먹었다고 한다. 와키자카는 자신의 패배를 처절하게 기록했다.

나는 성급했고 적장은 침착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했지만 그의 전술은 치밀했다. 나는 적장 앞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후 와키자카 가문은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 날만 되면 전투에 패배한 순간을 기억하고자 미역만 먹는 가문의 풍습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해군을 제압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왜군이 한반도에 상륙해서 후방 지원과 필요한 물자를 보급해야 하는데, 이순신이 그걸 막아낸 것이다,

출처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후 조선에 다시 침입한 왜군은 부산으로 침략했고 이순신의 활약은 눈이 부셨다.

한때 모함으로 감옥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이순신에게는 배 12척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왜군은 100척이 훨씬 넘는 규모로 쳐들어 왔는데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옵소서. 제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어찌 이기지 않겠나이까?

이순신은 명량해협에서 왜군을 기다렸고 순식간에 왜선들을 밀어붙였다. 우왕좌왕하는 왜선을 격파하여 총 31척을 격파시켰다. 이게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이후 1598년, 노량해협에서 무려 450여 척의 왜선을 침몰시키며 목숨을 잃은 이순신.

전투가 치열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임진왜란도 마침내 종결됐다.

만약 이순신이란 영웅이 없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의를 위해서 싸운 이순신과 장졸들. 또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초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후손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가장 치열하게 알아야 할 것은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