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권종대 프리랜서 화가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 트릭아트전 참여 가장 보람"

흥동2통 마을안길 벽화 작업 후 마을 주민들과 기념촬영한 모습. /김해시

김해지역 골목을 걷다 보면 그의 손길이 닿은 벽화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옥체험관 주변 담장과 민속박물관, 회현동주민센터 부근, 흥동2통 마을회관 골목 벽에서는 능소화·해바라기·벚꽃·목련·동백이 피어난다. 김해 대표 토기인 기마인물형토기와 다양한 문화재도 살아 숨쉰다.

김해가 고향인 권종대 프리랜서 화가. /이수경 기자

50여 년 경력을 지닌 권종대(68·김해시 회현동) 프리랜서 화가 애향심이 빚어낸 선물이다. 그의 재능기부는 코로나19 발생 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70년대 중반 미술대학에 진학하려고 서울로 가서 국내외에서 상업 화가로 활약한 지 십수 년이 흐른 후인 2019년 고향에 정착해서다. 회현동 도시재생사업을 하는 이들과 마을주민들이 소통하지 못할 때 마을 벽화를 그려서 화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근 칠산서부동 고령친화마을 흥동2통 마을 안길 벽화를 완성한 권 작가를 지난 18일 봉황동에서 만났다. 흥동2통 벽화는 정영신 칠산서부동장이 차가 많이 다니는 마을 길을 보고 주민 통행 안전을 위해 작가를 섭외해 이뤄졌다. 그는 마을 안길을 다채로운 꽃으로 가득 채웠다. 페인트와 아크릴 물감으로 이 벽화 작업을 하는 데 15일 정도 걸렸다.

그는 "동네가 을씨년스럽고 빈집이 많아지면서 마을이 썰렁해서 화사한 사계절 꽃을 많이 그렸다"며 "마을 주민들이 연세가 많은데, 마을 안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행복해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 꽃같은 능소화 벽화. /이수경 기자

앞서 그는 김해시 지원을 받아 김해한글박물관 옥상과 김해가야테마파크에 트릭아트를 제작했다. 그 이전에는 전남 신안군 암태도 마을 한 집 담벼락에 동백나무를 헤어스타일 삼아 집주인 부부 얼굴을 이어서 그려 인기 관광 콘텐츠로 유명해졌다. 이 주민 얼굴 벽화 기획은 암태도 지역 작가가 고안했고 권 작가가 참여했다.

권 작가가 상업 화가로 나선 때는 1975년이다. 중앙대 미대를 목표로 서울에 갔지만 여의치 않아 결혼을 일찍 했고 생계 차원에서 상업 화가 길로 들어섰다. 그는 "어떤 게 순수 예술인지 상업 예술인지 개념도 모른 채 일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김해가야테마파크 인도관 트릭아트. /가야미술관

그의 첫 작품은 서울 이태원에 있던 미군 부대 장군과 가족 인물화(초상화)다. 입소문을 타면서 그는 1983~1994년 11년간 사우디에 진출해 중동 왕궁 가족 인물화를 그려 인기를 누렸다. 인생 전체 가계의 80%가 외화벌이에서 얻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는 이후 자녀 교육 문제로 1990년대 후반 서울로 돌아왔다.

인물화 이후 국내에서는 박물관 기록화를 많이 그렸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메인 전시관 디오라마 그림을 비롯해 전국 각지 독립기념관 기록화 70~80%에 그의 터치가 스며 있다. 최근에는 전남 함평 나비박물관 옆에 증축한 근현대사박물관 실내 디오라마 작화도 함께했다. 기록화는 주최자가 주제를 기획하면 프리랜서팀이 그림 구성을 해서 작가들이 공동 작업하는 방식이다.

최근 권종대 화가가 그린 김해시 흥동3통 마을안길 벽화. /이수경 기자

14년 전부터는 트릭아트가 유행해 그 흐름을 탔다.

그는 50여 년 동안 가장 보람됐던 작업은 2011년 노무현재단이 의뢰한 노무현 대통령 2주기 추모전시회(서울 인사동)에서 선보인 트릭아트 작품이었다고 밝혔다. 김해가 그의 고향인 것을 알고 재단 측이 섭외했는데, 호응도가 높아 인터넷 서버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프리랜서 작업비는 일당 최소 40만~100만 원이다. 출장을 가면 대부분 의뢰처가 숙박을 제공한다. 손이 빠른 그의 재능을 아는 선후배들은 미술협회에 가입해 후배 양성을 해달라고 하지만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기를 좋아하며, 조직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생계가 막막해 상업 화가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너무 재밌어요. 기록화나 인물화를 그리다 보면 사람이 살아 있는 듯 느껴져요, 밀랍 인형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하다 보니 취미가 되고 직업이 됐습니다. 어머니가 예전 미군 부대 앞에서 부대 마크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런 손재주를 닮은 것 같아요."

앞으로 소망이나 계획은 무엇일까. 그는 "오랫동안 함께 일한 후배들이 이제 많이 활약하고 있으니까 저는 건강하게 그림 그릴 수만 있다면 제일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그릴 수 없는 그림이 있었다. "아내가 수많은 사람 얼굴 그려주면서 우리 가족은 안 그려주냐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리 그리려 해도 가족은 안 그려져요. 가족들 마음과 삶의 깊이까지 다 표현해낼 수가 없어서 용기가 안 납니다."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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