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배꼽'서 우리쌀로 만든 막걸리.."K-전통주 세계화 꿈꿔요" [人더스트리]
“노을 지는 발리 리조트 선베드에서 여유를 즐기며 마시는 가벼운 칵테일의 맛이네요.”
지난달 28일 <블로터>가 주최한 K하이볼페스티벌에서 막걸리로 만든 하이볼을 맛본 한 고객의 평이다. 막걸리를 하이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신선한 발상과 칵테일과 같은 달콤한 맛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이날 페스티벌에서 유일하게 ‘막걸리’를 원주로 하이볼을 선보인 곳은 이혜인 대표가 운영하는 '호랑이배꼽'이다. 호랑이배꼽이 선보인 ‘에피소드1’ 막걸리는 처음부터 믹솔로지 개념을 두고 개발했다. 도수는 9도. 막걸리 치고는 도수가 높은 편이지만, 토닉워터를 30% 넣고 얼음을 채우면 5~6도의 가벼운 칵테일 음료가 된다.
호랑이배꼽은 2009년 1월 평택에서 첫 발을 내디딘 양조 브랜드다. 창립자는 이 대표의 아버지이자 서양화가인 이계송 씨다. 공식 회사명은 ‘밝은세상 영농조합’이지만, 브랜드 이름이 널리 알려지며 지금은 ‘호랑이배꼽양조장’으로 불린다. 해외를 여행하며 경험한 각국의 술을 바탕으로, 가장 한국적이고 지역적인 술을 만들겠다는 열정을 담았다.
이들의 여정은 당시 농민들이 겪고 있던 어려움을 해소하려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지역 농산물인 배와 쌀을 활용한 가공품을 통해 지역 특산물의 가치를 높이고자 했다. 평택은 경기도 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쌀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이 지역의 농업과 상생하며 진정한 지역성을 담은 전통주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이 대표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언론사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개발 중이던 막걸리를 맛본 순간,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 술이 발효를 통해 완성되는 과정이 마치 흑백 사진 인화 과정처럼 느껴졌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서울 생활에 지쳐 있던 그는 ‘전통주’라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특히 남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막걸리를 만들고 싶었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관과 스토리를 녹여낸 전통주를 개발하려는 그의 시도는 맛과 디자인에서 모두 돋보인다. 사진을 전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품 촬영도 직접 진행하며, 늘 도전과 개척을 즐기는 모습이 이 대표의 양조장 운영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대표를 만나 호랑이배꼽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호랑이배꼽' 이름이 특이하다. 무슨 의미인가?
△ ‘호랑이의 배꼽자리’라는 의미를 담았다. 놀라운 생명력과 강인함을 지닌 한국인의 기질이 호랑이와 같다는 의미다. 또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배꼽(탯줄)이라는 중의적 의미도 있다. 부모와 자식,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전통주를 만들겠다는 의도도 있다.
이 같은 의미를 직관적이고 시각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꼬비’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호랑이는 무서운 존재가 아닌, 담배를 피우고 곶감을 무서워하는 의인화된 호랑이다. ‘배꼽’이 ‘배꼬비’로 변환돼 ‘꼬비’로 작명됐다. 2020년부터는 매년 신년 에디션으로 캐릭터 꼬비와 그 해의 이야기를 라벨에 담고 있다.
-평택에 양조장을 둔 특별한 이유는?
△ 경기도 평택은 호랑이 형상인 한반도의 배꼽자리에 위치한다. 평택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홍수나 가뭄, 극심한 자연재해를 경험한 적이 없다. 이토록 편안한 지역이 또 있을까 싶었다. 살면서 느껴왔던 좋은 지하수, 맛 좋은 쌀, 바닷다람 등이 쌀술을 만들기에 최고의 떼루아를 형성하고 있다.
-막걸리 양조 과정이 궁금하다.
△ 우리는 평택산 쌀, 특히 현미와 백미를 함께 사용한다. 쌀을 익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쌀을 으깨어 사용하기에 술이 제 맛을 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발효는 40일간 진행한다. 60일 이상 저온 숙성하여 은은한 맛이 우러나올 때 막걸리로 만들어 판매한다.
-호랑이배꼽 막걸리는 어떤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는가. 제품 라인업을 소개해달라.
△ 2009년부터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와 직납 방식을 통해 전국 약 100군데의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올해 초부터는 평택시에서 운영하는 5개의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탁주로는 2009년 출시한 호랑이배꼽 막걸리(6.5%, 7000원)와 지난해 선보인 호랑이배꼽 에피소드 막걸리(9%, 1만6000원)가 있다. 증류주로는 소호36.5(36.5%, 3만원)와 소호56(56%, 20만원)가 있다. 두 제품 모두 2018년 출시했다.
-호랑이배꼽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다면?
△ 위기는 자주 찾아오고 어려움은 매일 느낀다. 사람들의 입맛과 취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우리만의 정답을 찾아가려고 한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나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 즉 호랑이배꼽을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날 때면 힘든 순간이 잊혀진다. 살아 숨 쉬는 브랜드가 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 매일 고민한다.
-대표님이 생각하는 한국 막걸리의 매력은 무엇인가?
△ 막걸리는 한국인 입맛에 특별히 페어링을 따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술이다.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우리 전통주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막걸리가 제조되면서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쌀로 만든 술이 다 비슷하다는 생각은 옛말이다. 막걸리의 다양한 변주를 경험하는 재미도 있다.
-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에 변화가 있는지.
△ 한국 주류 시장의 트렌드가 매우 다양해졌다. 이전에는 소주와 맥주가 주요 선택지였다면, 이제는 다양한 주류 선택지가 있다. 막걸리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이전에는 막걸리가 무조건 저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지만 이제는 MZ세대뿐만 아니라 중장년층도 다양한 가격대와 주종을 찾는다. 소비자들이 프리미엄 막걸리를 선택하게 되는 좋은 변화다.
-한국 전통주의 세계화를 꿈꿔도 될까? 호랑이배꼽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계획이 있다면. △ 그렇다. 한국 전통주의 세계화는 충분히 가능하다. 과거에는 한국 문화가 중심에서 벗어난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K문화를 주목하고 있다.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 좋은 예다. K팝과 K푸드에 이어, K술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일본의 스시가 사케를 알렸던 것처럼, 한국 전통주가 음식과 함께 세계인의 입맛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표님의 최종 꿈은 무엇인가?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말씀해달라.
△ 호랑이배꼽 술을 통해 사람들이 즐거운 추억을 만들길 바란다. 호랑이배꼽을 술 산업이 아닌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보고 있다.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것처럼 술은 잠시 고민을 잊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술을 즐거움의 매개체로 생각하며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 마시는 술을 만들고 싶다. 모든 술에 즐거운 이야기가 있고, 술을 즐기는 과정에서 귀여운 굿즈가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드는 주류가 재미 상품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진지한 성격이지만, 유쾌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