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⑫MBC-LG 구단 1호 신인왕 1986년 김건우 이야기

『서울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프로야구팀 청룡과 베어스가 11일 각각 6명씩의 신인선수를 지명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이날 실시된 드래프트에서 베어스는 올 대학 졸업 선수 중 최대어인 박노준(고려대)을 1번으로 지명했으며, 청룡은 1번 지명권을 베어스에 넘겨준 대신 김건우(한양대)와 김태원(성균관대)을 2번에서 동시에 지명했다.』 <1985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OB 베어스 김성근 감독과 경창호 운영부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경 부장은 KBO에서 곧장 구단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박용민 단장에게 보고했다.
“박노준을 뽑았습니다.”
박 단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구단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와!”
당시 OB 매니저였던 구경백 씨(현 일구회 사무총장)의 말에 따르면 OB는 드래프트 당일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박노준은 당대 최고 스타. 선린상고 시절부터 김건우와 함께 투타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수려한 외모로 요즘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스타로 상품가치에서도 최대어란 평가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86년 시즌에 돌입하면서 MBC가 후순위로 찍은 김건우가 최고의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2번째 주제는 KBO 역사를 뒤흔든 1986년 슈퍼루키 김건우의 등장이다. 그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 역대 신인 데뷔 첫해 최다승인 18승의 전설을 썼고, MBC 청룡부터 LG 트윈스로 이어지는 구단 역사에서 최초 신인왕 타이틀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1986년 잠실구장 공동사용 원년
김건우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OB가 3년간의 대전 생활을 접고 1985년 프랜차이즈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 라이벌’ 시대가 열렸다. MBC가 잠실을 쓰고 있으니, OB는 일단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됐다.
그러나 동대문구장은 한국 아마추어 야구의 메카. 당시 고교야구, 대학야구뿐만 아니라 실업야구까지 이곳에서 소화하고 있었다.
아마추어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홈팀인 OB뿐만 아니라 원정팀들도 서울 시내 고교팀이나 대학팀 야구장을 찾아다니며 경기 전 훈련을 진행해야만 했다. 아마야구가 끝나지 않으면 동대문구장에 도착한 프로 선수들이 야구장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대기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운동장에서 워밍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대로 불만이 폭발했다. KBO는 결국 서울시와 MBC를 설득해 1986년부터 MBC와 OB가 잠실구장을 공동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잠실 한지붕 두가족’의 본격적인 라이벌 시대가 시작됐다.
아울러 1986년은 7구단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가 1군 리그에 뛰어든 해. 롯데도 구덕야구장 시대를 마감하고 신축 구장인 사직야구장 시대를 맞이하면서 KBO리그는 관중 증가에 호기를 맞이하게 된다.

◆‘동전 던지기’로 갈라진 운명
1985년 신인 드래프트 대상자부터 MBC와 OB가 우선권을 가리기 위해 동전 던지기(훗날엔 주사위 던지기)를 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엘팬알백] 11편에서 소개했듯이 1985년에는 매 라운드마다 동전을 던져 1명씩 선택했는데, MBC가 초반 4차례 연속 이기면서 알짜 선수들을 선지명으로 싹쓸이하다시피했다.
그러자 이런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 1986년 신인 드래프트부터 방식을 바꿨다. 처음 한 번만 500원짜리 동전을 던졌다. 우선권이 잡은 팀은 1번(1명)을 선택하고, 후순위 팀은 2번과 3번(2명)을 지명하도록 했다. 그 다음 우선권 팀이 4번과 5번(2명), 후순위 팀이 6번과 7번(2명) 식으로 호명했다.
“박노준이냐, 김건우냐.”
KBO 사무실에는 구단 프런트 관계자뿐 아니라 MBC 김동엽 감독과 OB 김성근 감독이 참가할 만큼 관심이 뜨거웠다.
결국 동전 던지기에서 이겨 우선권을 쥐게 된 OB는 지체없이 박노준(선린상고-고려대)을 호명했다.
그러자 MBC는 2번으로 김건우(선린상고-한양대)를, 3번으로 강속구 투수 김태원(배재고-성균관대)을 지명했다. OB는 서울고의 전성시대를 이끈 고졸 좌완 박형렬을 4순위로 선택해 장내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이 드래프트에서 호명된 주요 선수를 살펴보자면 MBC는 서효인(신일고-고려대 포수)과 함께 훗날 SK와 SSG 사장이 되는 민경삼(신일고-고려대 내야수), 이재홍(신일고-건국대 투수), 이바오로(선린상고-한양대 투수) 등을 지명했다.
OB는 훗날 KBO 심판위원이 되는 임채섭(휘문고-건국대 내야수), 스카우트로 변신해 화수분 야구의 밑거름을 만드는 이복근(충암고-경희대 내야수) 등을 선택했다.
(※잠실 라이벌 팀의 동전 던지기 역사에 대해서는 추후에 별도로 자세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김건우는 입단계약 협상을 하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OB가 박노준에게 역대 야수 최고 대우인 계약금 5000만 원(투수는 선동열의 1억3800만 원)을 건넨 반면, MBC는 김건우에게 그 절반인 2500만 원만 제시했기 때문이다. MBC는 “올 시즌 성적이 좋으면 후불로 박노준만큼 주겠다”며 김건우를 달랬다.

◆타자로 입단→스프링캠프에서 투수로 변신
“이보라우, 김건우! 너 투수 한번 안 할래?”
1986년 경남 진해에서 MBC 청룡의 스프링캠프가 진행됐다. 개막을 한 달쯤 앞두고 있었을까. 황해도 출신의 김동엽 감독이 갑자기 김건우를 부르더니 이북 사투리로 넌지시 의사를 물었다.
김건우는 당시 스프링캠프에서 타자로만 훈련하고 있었다. 이미 선린상고 시절 혹사 여파로 팔이 고장나 한양대 시절 거의 타자로만 뛰었다.
그런데 김건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내놓았다.
“네, 좋습니다.”

김건우가 이처럼 선뜻 투수를 받아들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진해 스프링캠프에 배트 6자루를 사서 가지고 갔는데 모두 부러뜨리고 말았다. 아마추어 시절엔 알루미늄 배트를 썼으니 나무배트 적응이 쉽지 않기도 했다. 그 시절엔 구단의 지원이 풍족하지 않았다. 방망이 1자루가 남았을 때 걱정을 하고 있는 김건우에게 김재박과 이광은 등 선배들이 배트 1~2자루씩을 나눠주기도 했지만, 김건우는 남아 있는 배트가 다 부러질까봐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무엇보다 대학 시절 타자에 전념하면서 피칭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수비 훈련을 하면서 공을 세게 던져도 팔꿈치 통증이 발생하지 않았다. 팔만 아프지 않다면 금세 투수로 적응할 자신도 있었다.
김동엽 감독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해 MBC가 영입한 미즈다니 히사노부 투수코치의 조언 때문이다.
미즈다니는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육성 전문가로, MBC가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코치를 데려온 케이스였다.
미즈다니 코치는 김건우가 캐치볼, 롱토스를 하는 모습이나 3루수로서 1루에 송구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동시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곤 했다.
투수 중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강견. 송구 시 중심이동이나 손목 쓰는 법 등 투수로서의 매력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동엽 감독에게 수시로 “김건우는 투수로 키우는 게 좋겠다”며 설득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캠프도 한창 진행 중인 시점. 개막까지 한 달쯤 남은 상황이었다. MBC는 당시 마운드보다 약한 타격이 더 고민이었다. 김 감독은 김건우가 타선을 강화할 재목으로 보고 있었다.
“사실 저는 내심 프로에 가면 투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김동엽 감독님은 저를 타자로만 생각하고 계셨어요. 사실 캠프 도중에 미즈다니 투수코치가 저를 볼 때마다 제 어깨를 좀 자랑하려고 세게 송구하고 그러긴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감독님께서 저한테 투수 전향 의사를 물어보셔서 바로 ‘투수 해보겠다’고 한 거죠.”
김건우. MBC 청룡 시절의 야구를 아는 팬들이라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이름이다. 동시에 가슴 저미는 아픈 손가락이다.
‘비운의 천재투수’ 김건우는 현재 충남 태안 바닷가에서 수제버거집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내하고 예전부터 나이가 들면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곳에서 살자고 했어요. 태안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지만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죠. 연포해수욕장 입구라 딱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뭘 하면서 살아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여기 수제버거를 하는 가게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햄버거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독학으로 소스도 직접 개발하면서 도전을 해봤죠. 괜찮은 것 같아 1년 전에 이 가게를 차렸습니다.”
사업은 잘 될까. 야구만 해봤던 사람이라 ‘혹시나’ 하는 걱정 어린 마음에 물어봤더니 그는 호탕하게 웃는다.
“처음엔 뒤에 텃밭이나 가꾸고 용돈벌이나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주시네요.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는 너무 바빠요. 수입도 꽤 괜찮습니다. 하하. 가끔씩 매장 안에 오셔서 저를 알아보고는 옛날 야구 이야기를 꺼내시는 팬도 계십니다.”


그의 이름을 딴 ‘건우수제버거’를 검색해 보니 태안의 맛집으로 벌써 소문이 자자했다. 한 블로거의 후기를 보면 “주인장님이 어마어마한 야구선수”라며 놀라기도 했다.
공으로 타자를 요리하며 손맛을 느꼈던 전설의 투수가 이제 햄거버로 손맛을 발휘하며 사업가로서 제2의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선린상고의 전설…‘투타 이도류’ 천재 야구선수
박노준과 김건우. 봉천초-선린중 동기(나이는 박노준이 한 살 위)인 둘은 선린상고 진학 후 스타덤에 올랐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인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고교야구의 최고 황금기. 1~2학년 때부터 투수면 투수, 타자면 타자로 맹활약하면서 선린상고를 전국무대 정상권으로 이끌었다.
박노준이 화려한 상감청자라면 김건우는 투박한 뚝배기. 박노준이 섬세한 기교를 앞세운 도련님풍이었다면, 김건우는 투타에서 묵직한 파워가 일품인 돌쇠 스타일이었다.
3학년이던 1981년 7월, 김건우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고려대 1학년 선동열 등과 함께 국가대표로 참가해 한국의 초대 우승의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1962년생인 박노준은 나이 제한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다).
특히 네덜란드전에 선발등판한 김건우는 한국야구 역사상 최초로 국제대회에서 노히트노런 대기록을 달성해 이름을 드높였다. 미국과 결승 1차전에서 선동열이 3-1 완투승을 올리자, 결승 2차전에서는 김건우가 3-2 완투승을 거두며 한국의 첫 우승을 견인했다. 김건우는 이 대회 올스타팀 투수로 선정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그 유명한 사고가 발생한다.
경북고와 선린상고의 봉황대기 결승전. 3번타자로 나선 박노준은 1회말 공격 때 홈으로 슬라이딩을 하고 들어오다 스파이크가 땅에 박히면서 왼쪽 발목뼈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려나갔고 말았다.
에이스 박노준이 한국병원으로 후송돼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는 상황. 결국 김건우가 결승전 마운드에 다시 설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김건우가 이미 준결승전 7회 투구 도중 팔꿈치에서 ‘뚝’ 소리가 날 만큼 심각한 부상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건우는 당시 통증을 참고 던지면서 9회까지 무실점으로 막고 완봉승을 거뒀다. 결승전에는 박노준이 던질 것으로 생각하고 팔이 올라가지 않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온 몸을 불살랐다.
그땐 그렇게 하는 게 '투혼'이고, 야구선수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하는 줄 알았다.
김건우는 결승전에서 도저히 공을 던질 수 없는 팔상태였지만 다시 등판했다. 4-1로 앞선 6회초 한계에 다다랐다. 공을 던질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볼넷과 폭투로 1점을 내주면서 4-2로 쫓겼다. 선린은 7회부터 어쩔 수 없이 김건우를 내리고 이바오로를 내세웠지만 결국 8회말 4점을 내주며 4-6으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김건우는 그 후유증으로 사실상 투수로선 선수생명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김건우는 일찌감치 타격에서도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선린상고 2학년이던 1980년, 3학년들을 제치고 그해 최고 타율을 올린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한양대 진학 후 김건우는 투수로 몇 이닝 던지기는 했지만 사실상 타자로만 뛰었다. 한양대에는 당시 1년 선배 이상군과 동기 성준 등 훌륭한 투수들도 많이 있었다.
김건우는 타자로서 각종 대학 대회에서 수시로 타격상과 MVP를 수상했고, 1984년 제7회 대륙간컵세계대회에서는 야수로 국가대표에 선발돼 태극마크를 달기도 했다.

◆선발 데뷔전서 ‘1안타 완봉승’ 사고를 치다
“짜~식. 니가 오늘 선발이야. 신인이라 긴장해서 잠을 못 잘까봐 미리 선발 통보 안 했어.”
'빨간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은 4월 3일 잠실구장에서 루키 김건우에게 선발투수로 등판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싱긋 웃었다.
김건우의 프로무대 데뷔전은 아니었다. 이미 3월 29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시즌 개막전에서 마운드에 오른 바 있다. 롯데 최동원의 완투에 눌려 1-5로 패한 그날, 김건우는 마지막 2이닝을 무안타 1볼넷 2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조용히 프로 신고식을 했다.
시범경기에서도 확인했지만, MBC 김동엽 감독과 미즈다니 투수코치는 이때 김건우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선발 데뷔전 상대는 청보 핀토스. 야구해설가 허구연(현 KBO 총재)이 마이크를 내려놓고 지휘봉을 잡은 팀이었다. 김건우는 경기 시작부터 쉽게쉽게 공을 던졌다.
아직 투수로는 충분히 몸이 만들어지지 않아 빠른공 위주로 승부했지만, 시속 140km 중후반의 대포알 같은 묵직한 구위에 청보 타자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직구와 슬라이더 투피치 투수. 그러나 슬라이더는 슬러브 형태로 각도가 크고 느린 것과 요즘으로 치면 커터 식의 짧고 빠르게 꺾이는 두 종류를 구사했다.
“어라, 이것 봐라.”
김동엽 감독은 마른침을 삼켰다. 김건우는 6회까지 노히트노런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7회초 좌타자 김정수(작고)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대기록이 깨졌지만, 선발 데뷔전에서 1안타 완봉승을 올리는 사고를 쳤다. MBC 타선도 청보 투수 최계훈에 4안타로 막혔지만 김건우의 어깨 덕분에 1-0 신승을 거뒀다.
김건우는 4월 16일 광주 해태전에서도 막강한 타이거즈 타선을 상대로 2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주가를 올렸다.

◆박노준 맞대결에서 승리…또 1안타 완투승 ‘승승장구’
“와~.”
선발투수 예고제가 없었던 시절, 경기를 앞두고 잠실구장 전광판에 양 팀의 라인업이 뜨자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4월 20일 일요일이었다. 전날 부산 사직구장에서 펼쳐진 해태 선동열과 롯데 최동원의 사상 첫 선발 완투 맞대결(선동열 1-0 승)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잠실구장에서도 기막힌 신인 라이벌전이 벌어졌다. 전광판 선발투수 칸에 OB 베어스 박노준과 MBC 청룡의 김건우 이름이 나란히 새겨지자 팬들과 기자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흥분에 휩싸였다.
전날 OB전에서 9회에 등판해 구원승을 챙겼던 김건우는 피로감도 잊고 역투를 펼쳤다. 이날 7회까지 단 5안타만 허용한 채 1실점. MBC가 2-1로 앞선 가운데 8회부터는 또 다른 루키 김태원이 등판해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이로써 김건우는 주말에 잠실 라이벌 OB를 상대로 이틀 연속 승리를 챙기며 시즌 4승(1패)째를 올렸다. 박노준은 8이닝 9안타 7탈삼진 2실점으로 완투패. 시즌 1승2패를 기록했다.
김건우는 4월 30일 잠실 빙그레전에서도 또 다시 1안타 완투승(1실점 비자책점)을 기록했다. 한 시즌에 2차례나 1안타 완투 경기를 펼친 것은 KBO 역사상 최초였다. 그것도 신인이, 사실상 고교 졸업 후 5년 만에 본격적으로 투수로 등판한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퍼포먼스였다.
김건우는 4월까지 5승1패, 전기리그에서만 8승3패1세이브를 올리며 태풍을 몰고 왔다.
1986년은 빙그레가 신생팀으로 처음 참가해 7개구단 체제로 치러졌던 시즌. 청보의 부진까지 맞물려 기존 다른 팀들의 승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MBC는 슈퍼루키 김건우의 등장 속에 전기리그에서 28승4무22패(승률 0.560)로 선전했지만 4위에 그쳤다.

◆김용수 마무리 전환 성공…김건우 김용수 김태원 ‘3金 시대’
김건우는 후기리그에서 더 힘을 냈다. 6월 27일 사직 롯데전에서 9이닝 3실점(비자책점) 완투승을 올린 뒤 한동안 호투에도 불구하고 승운이 안 따랐지만 한여름에 무더기 승수 사냥에 성공하면서 청룡의 후기리그 돌풍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1986년엔 김용수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해였다. 1985년 시즌 중에 뒤늦게 입단한 뒤 타구에 무릎을 맞는 불운으로 6경기(1승2패, 2세이브) 등판에 그쳤던 김용수는 전문 소방수로 자리를 잡고 구원으로만 9승9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1.67을 기록하면서 성공 시대를 열었다.
당시엔 마무리투수라고 해도 요즘처럼 1이닝만 던지는 시대가 아니었다. 2이닝, 3이닝, 심지어 4이닝을 던지며 세이브를 올렸다. 때론 앞선 투수가 무사 만루 위기 상황을 만들어 놓으면 곧바로 올라가 정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자 원조 에이스 하기룡은 김용수에게 “니가 1983년 처음 지명 받았을 때 입단했더라면 내 승수가 몇 승은 더 올라갔을 것”이라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하기도 했다.
하긴 1983년 하기룡은 방어율(평균자책점) 2.34로 1위를 하고도 10승11패로 승수보다 패수가 더 많았다. 1985년 15승을 올렸지만 김용수가 뒷받침을 했더라면 20승에도 도전해볼 기세였다.
아무튼 1986년 김건우가 선발등판하고 김용수가 마무리를 하면 사실상 ‘게임 끝’이라는 청룡의 필승 방정식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선동열과 맞먹는 구위’라는 평가를 듣던 '미완의 대기' 김태원도 신인 치고는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33경기에 선발과 구원으로 등판해 등판해 2승6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86을 기록했다.
하기룡이 부진(6승1패)하고, 정삼흠은 김동엽 감독과 마찰과 무릎부상 등으로 전년도에 비해 미미한 성적(1승2패 1세이브)을 올렸지만, 오영일(12승8패)과 좌완 유종겸(10승7패)이 10승 투수로 활약하면서 마운드가 강해졌다.
김용수, 김건우, 김태원이라는 영건 삼총사의 가세 속에 MBC는 후기리그에서 우승을 다투는 팀으로 변모했다.

◆김건우 최종전 18승…최동원이 무너지는 바람에 날아간 가을야구 티켓
후기리그는 MBC, 해태, OB의 삼파전. 우승을 놓고 9월 17일 최종전을 치러야 했다.
해태는 전날까지 33승2무18패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OB는 32승2무19패로 1게임차 뒤진 2위, MBC는 30승4무19패로 OB에 0.5게암차 뒤진 3위. 최종전 결과에 따라 운명이 갈라지게 됐다.
최종전 매치업도 흥미로웠다. MBC와 해태는 전주에서 맞대결을 벌였고, OB는 롯데와 잠실에서 최종전을 치렀다.
당시 포스트시즌 제도는 독특했다.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2위 이내에 2차례 들면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잡고, 나머지 두 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도록 돼 있었다.
해태는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후기리그에서 최종전에 패하더라도 공동 1위를 확보한 상황. 우승 결정전을 치러서 패하더라도 한국시리즈 직행을 이미 확보한 상황이었다.
반면 OB는 롯데를 이기거나, OB와 MBC가 같이 지면 플레이오프 진출 티켓을 얻을 수 있었다.
OB에 0.5게임차 뒤진 MBC는 무조건 해태전을 이기고 OB가 롯데에 패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경우 승률에서 앞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할 수 있었다.
MBC는 전주에서 열린 해태전에서 먼저 9-4로 이겼다. 당연히 에이스로 떠오른 신인 김건우가 선발로 나서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 김용수가 세이브를 올렸다.
승리투수가 된 김건우는 그해 37경기에 등판해 18승6패,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 전화기를 통해 잠실에서 희소식이 날아왔다. 롯데가 8회초 1점을 추가해 3-1로 앞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롯데는 후기리그 5위가 확정된 상황이라 이날 이기나 지나 의미가 없는 경기였다. 그러나 최동원이 19승을 기록 중이었기 때문에 KBO 역사상 최초 3년 연속 20승이 걸려 있는 게임이었다. 야수진도 베스트 멤버가 총출동해 최동원을 지원사격하고 있었다.

“2점 차에 최동원이라면 끝난 거지.”
MBC 선수단은 버스를 타고 플레이오프 진출을 자축하기 위해 전주 원정경기 숙소인 코아호텔로 이동했다. 호텔 식당에는 이미 맥주와 샴페인이 궤짝으로 깔리고, 잔치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마지막 경기에 승리투수가 되고 숙소 방에서 샤워를 마친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회장으로 이동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다급하게 OB가 9회말 끝내기로 역전승했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사람도 그랬지만 저도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라며 웃었어요. 그런데 진짜더라고요. 잔칫집이 순식간에 초상집이 됐죠. 그길로 가방을 싸서 버스를 타고 우울하게 서울로 올라왔어요.”
김건우의 회상이다.

사실이었다. OB는 9회말 믿기지 않는 대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선두타자 김광수가 안타를 치고 나가자 다음 타자 김형석이 천하의 최동원을 상대로 동점 우월 투런포를 쏘아 올렸다.
20승이 날아간 최동원은 망연자실했다. 허탈한 마음 때문일까. 신경식에게도 좌중간 3루타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중계된 공이 3루수 김용철 글러브 밑으로 빠졌다. 최동원은 허탈감 속에 베이스 커브를 잊고 마운드에 우두커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신경식이 홈까지 내달려 4-3 역전승을 확정하는 끝내기 득점을 올렸다.
OB는 해태와 공동 1위를 확보하면서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냈다.
1983년 이후 3년 만에 가을잔치를 준비하던 MBC의 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그 이후 청룡 시대엔 더 이상 가을야구가 다가오지 않았다.

◆류현진도 못 넘은 18승…MBC~LG 구단 최초 신인왕
허무하게 끝난 시즌. 그러나 청룡으로선 에이스 김건우를 발굴한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 원년부터 하기룡, 유종겸, 이길환, 오영일 등 수준급 10승 투수는 있었지만 사실 각 팀 에이스들과 견줄 수 있는 특급투수가 부재했던 MBC였다. 종전까지 1983년 이길환, 1984년 하기룡이 15승을 거둔 것이 청룡 구단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이었다.
OB는 박철순, 삼성은 김시진, 해태는 이상윤과 선동열, 롯데는 최동원이라는 에이스를 보유했고, 심지어 약팀의 상징이었던 삼미도 1983년엔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가 30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MBC 구단이나 청룡 팬들이 “우리도 김건우 있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게 됐다.
상대 에이스와 겨뤄 이길 수 있는 에이스다운 에이스의 등장. 청룡 팬들에겐 자부심이자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사실 1986년엔 김건우 외에도 특급 신인들이 즐비했다. 김건우의 한양대 1년 선배인 빙그레 이상군(천안북일고 출신)이 35경기에 등판해 무려 19경기나 완투하며 12승17패, 평균자책점 2.63을 기록했다. 한양대 동기인 삼성 성준(경북고 출신)도 15승5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36의 호성적을 올렸다.
김건우는 229.2이닝 던지면서 18승6패(다승 4위), 평균자책점 1.86(5위), 승률 0.750(4위)의 압도적 성적을 올렸다. 신인 중 유일하게 신인왕 후보는 물론 MVP 후보에도 올랐다. 김용수도 신인왕 자격이 있었고, 빙그레 이강돈은 타율 0.297(6위), 9홈런(10위)의 성적으로 타자로는 유일하게 신인왕 후보가 됐다.
박노준은 첫해 ‘투타 이도류’로 나섰지만 투수로는 5승6패 7세이브, 타자로는 타율 0.173(52타수 9안타)에 그치면서 신인왕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기자단 투표 결과 김건우는 1위표 29표 중 22표를 휩쓸면서 총점 251로 이상군(155점)을 누르고 영예의 신인왕을 차지했다.

“사실 상군이 형이 신생팀에 입단하지만 않았다면 첫해 20승도 했을지 몰라요. 제구력이 정말 좋았거든요. 그러면 상군이 형이 신인왕을 했겠죠. 동기인 성준도 15승을 하면서 잘 던졌고요. 박노준은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이 던졌어요. 프로에서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사실 팔이 정상이 아니었죠. 저요? 저는 대학 때 타자만 하면서 팔이 쉬었기 때문에 오히려 힘이 있었죠. 하하.”
순박한 얼굴처럼 여전히 마음씨도 순수한 김건우다. 다른 선수들을 치켜올리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하다.
프로 입단 첫해 18승. 그 이후 수많은 특급 신인 투수들이 도전했지만 넘지 못했다. 2006년 한화 이글스 ‘괴물 루키’ 류현진이 18승으로 김건우와 타이 기록을 세웠을 뿐이다.
2006년 당시 MBC ESPN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김건우는 9월 26일 류현진이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19승을 기록할 경우 축하를 하기 위해 꽃다발을 들고 대전구장을 찾았지만, 류현진은 19승 달성에 실패했다. 그러면서 김건우와 류현진은 KBO 역대 신인 첫해 최다승 역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MBC 청룡과 LG 트윈스는 지금까지 총 6명의 신인왕을 배출해 '신인왕의 산실'로 꼽히고 있다. 구단 역대 신인왕 리스트에서 김건우가 1호로 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치 않을 역사적 사실이다.

김건우는 1986년 여의주를 물고 온 청룡이었다. 우리에게 축복처럼 찾아와 전설을 남겼다.
그러나 찬란했던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이듬해 충격적인 사고로 사실상 투수로서 사망선고를 받고 만다.
[엘팬알백] ⑬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