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110V 아닌 220V 쓰게 된 건…모두 ‘이 사람’ 덕분입니다
故 한만춘 연세대 명예교수
전기공학의 선구자 평가받아
국내 최초 아날로그 컴퓨터 제작
지난달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중 약 20%가 한국인으로 드러난 가운데, 전년 동기 대비 7.6% 증가한 수준으로 확인됐다. 당초 방일 외국인 중 한국인이 최다였으나 지난 7월부터 중국인이 1위를 차지하며 한국이 밀려나게 됐다.
이런 결과는 지난 18일 일본정부관광국(JNTO)이 발표한 8월 방일 외국인 통계로, 지난달 일본을 찾은 외국인은 293만 3,000명 수준으로 나타났다. 이중 한국인은 61만 2,100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일본을 찾는 한국인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여행의 필수품으로 꼽히는 110V(볼트)용 돼지코 어댑터의 수요 역시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코로나19의 종식 이후 억눌렸던 여행심리가 폭발하자 생활용품점 다이소에서 판매 중인 해외여행용 멀티 어댑터는 올해 1월부터 3월 현재 판매량이 전년 대비 500%가량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돼지코 어댑터는 일본 여행 시 필수적으로 챙겨야 하는 용품으로 꼽힌다.
이는 일본이 110V 전력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왜 110V가 아닌 220V를 사용하게 된 것일까? 한국은 현재 220V 전력을 지원해 돼지코 모양의 콘센트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는 110V가 전선에서 낭비되는 전력이 많아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 역시 110V 전력을 지원했으나 박정희 정부 당시 이를 220V로 바꾸는 승압 사업을 시행했다. 한국전력이 승압 사업을 통해 220V로 완전히 전환된 것은 한 대학 교수의 공이 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故 한만춘 연세대 명예교수다.
지난 1965년 농어촌 전화 사업을 시작한 박정희 정부는 승압 사업을 함께 추진했다. 이는 일본의 영향으로 구한말부터 계속 써오던 110V 대신 220V 설비로 마련한 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승압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에는 여러 요인이 영향을 끼쳤다.
이는 110V가 가는 전선을 사용한 탓에 노후화 시기가 빨라 회선을 자주 교체해 주는 등 추가 비용이 상당했다는 점과 당시 박정희 정부의 대외 개방과 보호무역의 복선형 전략을 일환으로 110V를 쓰던 미국, 일본의 전기제품 수입을 억제하고 국내 전기산업과 전자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한 보호무역 성격도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덧붙여 인프라가 별로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로의존성 문제도 크지 않았으며, 전기의 사용량이 크게 늘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승압 사업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성장하기도 급급했던 경제 상황과 온 전선을 용량이 크고 굵은 전선으로 엄청난 소요 비용을 생각한다면 110V를 220V로 변경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며,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사치적인 사업이라는 지적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장기적인 미래를 생각해 승압 사업을 추진하기로 시작했다. 결국 박정희 정부 당시인 1973년 한국전력공사 주도로 이뤄진 사업으로 2005년 말까지 가정용 전력을 110V에서 220V로 올리기 위한 국책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32년이나 걸린 승압 사업을 추진하는데 가장 큰 공을 들인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은 한만춘 교수다.
바로 한만춘 교수가 승압 사업의 핵심이 되는 220V 도입을 처음으로 박정희 정부에 건의했기 때문이다. 한만춘 교수는 당시 상당수의 나라가 우리나라보다 먼저 220V를 도입해 쓰고 있다는 사실에 접하고 이를 도입하자는 건의를 제기했다. 특히 그는 220V로 변경할 경우 같은 전력을 소비하는 전자제품의 전압을 두 배로 올리기 때문에 소비되는 전비가 절반가량 줄어든다는 점에 주목했다.
220V를 도입할 경우 필요한 전선의 수요가 줄어들뿐더러 전선에서 낭비되는 전력 역시 줄일 수 있었다. 이런 한만춘 교수의 이론에 주목한 박정희 정부는 이를 채택해 승압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 해당 사업으로 현재 우리나라는 220V 설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다만, 한만춘 교수는 승압 사업이 시작된 지 11년째인 1984년 승압 사업의 완료를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승압 사업으로 인해 전력 설비 수입 자재 대체효과와 더불어 전력손실은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전기 요금 부담도 줄어들었으나 한만춘 교수는 자신의 이론을 접목한 승압 사업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한만춘 교수의 이론은 현재까지 우리 생활 곳곳에 묻어나고 있다. 실제로 한국전력공사는 당시 설비의 증설 없이 발전소 1기를 대체하는 효과를 얻은 한만춘 교수의 이론을 두고 “당시에 이런 이론을 생각한 것 자체가 획기적이다”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다만, 220V 승압으로 인해 인체 감전의 위험도가 높아졌다는 점과 화재 위험이 더욱 높아졌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견해가 제시되기도 한다.
한편, 한만춘 교수는 우리나라에 220V 설비를 도입한 것뿐만이 아니라 국내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61년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를 개발하며 우리나라의 첫 아날로그 컴퓨터를 제작했다.
당시 연세 101 아날로그 전자계산기는 이후 전력 계통의 안정도 개선 및 제어기 개발, 원자력 발전의 안정성 연구 등 많은 연구에 쓰이면서 당시 우리나라 전기 전자공학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우리나라 전기공학의 기반을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만춘 박사는 국내 1호 전기공학 박사로, 부족한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전 승압 사업’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한국 전력산업의 아버지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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